[기고] 개발협력연대 출범 1년… 정부·기업·학계 등 최적의 협업 사례 발굴돼야

기업의 목적은 이윤 창출에 있다.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글로벌화되고, 소비자 의식이 변화되고, 개도국의 빈곤 탈피를 위한 국제적 협력이 강화되고, 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한 관심 등 새로운 이슈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기업의 목적과 그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은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이러한 인식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난 2000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기업들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 인권 존중, 노동규칙 준수, 환경보전, 반부패를 지향하도록 ‘글로벌 콤팩트(Global Compact)’를 출범시켰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 ial Responsibility)’, 그리고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 개념이 일반화되었으며 2010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표준화한 ISO 26000이 제정되었다. 미국 유수의 기업인 코카콜라, 인텔(Intel), 스웨덴의 테트라팩(Tetra Pak) 등은 자신들의 사업 영역 내에서 이윤창출 활동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긴밀히 연결해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이 되었다. 이처럼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민간기업의 중장기적인 이윤 창출에도 이익이 된다는 인식하에 다국적 기업들의 CSR에 대한 투자가 더욱더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도 최근에 이러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가지고 기업의 해외활동에 접목시키고 있다. 이를 기업이 단독으로 수행하기도 하지만 기업 간의 협업을 통하여, 나아가서 정부의 공적 개발원조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민관협력(PPP: Private Public Partnership)으로 시행하기도 하며 그러한 경우 더 큰 효과를 거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알게 되었다. 외교부는 국가 전체적으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민관협력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해외 진출 기업과 NGO를 위한 윈윈은?

#1. “한국의 한 유명 선박제조업체가 인근 지역에 조선소를 지으려고 하면서 지역 주민과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지난 19일 필리핀 출장길에서 만난 존 레이 티앙고 나보타스 시장과의 인터뷰 말미에, 통역을 도와준 하트하트재단 임문희 지부장님은 “개인적으로 여쭐 게 있다”며 시장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 그건 한국 기업이 아니라 중국 기업으로 아는데요.” 알고 보니, 지역 주민과 갈등을 겪는 것은 중국 기업인데 어찌 된 일인지 현지 주민들에겐 그게 한국의 H기업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 내친김에 임 지부장에게 “이곳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의 CSR 활동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최근 대형음료회사를 인수한 국내의 한 대기업 관계자와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CSR 활동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업 관계자는 “가난한 필리핀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려고 예산을 뽑아본 결과,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고 말했답니다. 필리핀에서 23년째 선교사로 지내고 있는 임 지부장이 이 예산 내역을 보니, 사립대학교 입학을 기준으로 뽑은 것이었습니다. 임 지부장은 “필리핀은 빈부 격차가 심해서, 사립대학 학비는 공립대학의 12~13배다”라며 “사립대학에 갈 정도의 경제적 수준이면 굳이 장학금을 줄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다”고 조언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대기업 관계자는 “올해는 사업 계획이 잡혔으니 내년쯤 다시 의논해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사례를 접하며, 오는 4월 10일 ‘더나은미래’가 주최하는 ‘해외 진출 기업의 글로벌 CSR’ 콘퍼런스와도 맥락이 닿아있어서인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필리핀 빈민촌임에도, 취재를 하러 간 기자에게 이름도 잘 모르는 한류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기업의 CSR, 윤리적 책임도 다해야 완성

5년 전,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을 몇 개월 동안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언론에 짤막하게 보도되었을 때만 해도, ‘소문’의 진원지를 후속 취재할 길이 없어 사건은 묻히는 분위기였습니다. 며칠 후 유흥주점 종업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언론사가 이를 집중보도하면서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습니다. 로비를 받고, 늑장수사와 수사중단을 지시한 경찰 고위 간부들이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며 ‘법치국가’ 대한민국을 비웃는 듯한, 대기업 오너의 삐뚤어진 행태에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도, 올해에도 계열사 자금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태광, SK 등 대기업 총수가 구속되는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 높아지자, 일부에서는 반대 목소리도 제기됩니다. “기업의 진정한 책임은 이윤 창출을 통해 세금을 납부하고, 일자리를 늘려 고용을 잘하는 것 아니냐” “선진국은 기업 사회공헌 비율이 우리보다 훨씬 낮다” 등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최근 몇 년 사이 유독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요구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 조지아대 캐롤 교수는 CSR의 4단계 책임론으로 유명합니다. 1단계는 경제적 책임으로,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해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단계는 법적 책임으로, 공정한 규칙 속에서 법을 준수하며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단계는 윤리적 책임인데, 기업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비자와 종업원, 지역주민, 정부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기대와 기준,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단계 자선적 책임은 경영활동과 관계없이 기부나 사회공헌 등을 통해 사회로부터 얻은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설치하고 고장 난 채 방치… 왜 원조하나요

제가 처음 국제구호개발 현장을 가본 것은 2006년입니다. 월드비전과 함께 케냐 투르카나 지역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보고 난 후 병원 건물 뒤편에서 한참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이는 두 손가락으로 팔을 감싸니, 한 마디가 남을 만큼 앙상했습니다. 케냐에서 또 한 번 놀란 현장은 드넓게 펼쳐진 ‘소람(Sorgho m·옥수수의 일종)’ 농장이었습니다. 수십년의 역사를 지닌 월드비전은 이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지역개발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작년 초, 저는 태양광 전등이 필요한 라오스 현장을 취재 갔다가 다소 민망한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라오스 싸이냐부리의 한 소학교에서 수십 명의 선생님이 점심만찬을 차려놓고 저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저를 안내한 분이 2년 동안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지낼 때 지은 건물이었는데, 코이카가 이 지역의 봉사단 파견을 돌연 없애면서 컴퓨터실은 무용지물이 돼버렸습니다. 그녀는 “너무 미안하다”며 매년 자비를 들여 라오스를 찾아 자체 애프터서비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원조하는 나라(공여국)’의 첫발을 내디딘 초보자에 불과합니다. 코이카가 생긴 지 22년 됐지만, ODA 규모가 늘어나고 개발협력과 관련한 관심이 높아진 건 10년도 안 됩니다. ODA 예산이 증가하면서 국내사업을 하던 NPO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해외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국제본부로부터 매뉴얼을 전수받을 수 있는 일부 초대형 NPO를 제외하면, 코이카와 토종 NPO, 기업, 대학, 병원 등 많은 곳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태양광이든, 수세식 화장실이든, 학교 컴퓨터실이든 지어주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라오스에 가보면 중국인들이 뿌려놓은 태양광 패널이 고장 난 채 방치된 걸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비효율, 이중규제… 이제 그만 내려놓으세요

기자 초년병 시절 가장 이해가 안 됐던 것은 공무원의 명함이었습니다. 같은 부처임에도 부서별로 명함의 모양과 디자인이 제각각이었습니다. “기관의 첫인상이나 마찬가지인데 통일하지 않으면 외부에서 어떻게 보겠느냐”고 했지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한 서울대 교수와 식사 자리에서 이 문제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을 들었습니다.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꾸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해야 간판업자도 먹고살고, 명함 파는 업자도 먹고산다. 과학기술 R&D 예산이 다 쪼개져서 나눠 먹기식으로 배분되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정부 부처도 비효율적인 걸 알지만 그 비효율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일자리가 생긴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꽤 그럴듯한 논리였습니다. 정부의 비효율과 중복문제는 해묵은 주제입니다. 한 NPO 고위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들어 청와대에서 ‘나눔문화를 정부 시책으로 삼겠다’며 정부 고위 관계자가 도와달라고 하기에 ‘이제 겨우 NPO가 스스로 자리잡았는데, 왜 정부가 나서느냐. 제발 관심 좀 끊어달라’고 말해서 불편한 분위기가 연출됐다”고 말했습니다. 한 기업 고위 임원은 “정부가 기업 팔을 비틀어 진행하는 사회공헌은 효과성도 낮고, 장기적으로 기업이나 사회에 모두 도움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실제 현 정부에서 부처별로 경쟁하듯 기업의 손길에 기댄 사회공헌성 프로그램이 많았습니다. 지난 11일 한국NPO공동회의와 한국비영리학회가 공동주최한 포럼에서도 이 같은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입법 예고한 ‘나눔기본법’에 대해 참석자들은 “목적별·대상별·부처별로 분산된 나눔 관련 업무를 총괄하지 못하면 또 하나의 이중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박두준 아이들과미래 상임이사는 “국세청에서 이미 자산 10억원 이상, 수입 5억원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고액기부 시대 만나는 비영리단체들의 고민

한두 달 전쯤, 비영리단체의 젊은 간사들과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애로사항을 자연스럽게 털어놓았는데, 한 단체의 간사가 재밌는 얘기를 했습니다. “서울의 송파·강남·서초 권역의 지부를 맡고 있는데, 이 지역의 고액기부자들을 따로 관리해보려고 본부 후원관리팀에 물어봤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 본부 후원관리팀에선 그 데이터베이스 자체가 자신의 실적이기 때문에 빼앗기는 걸 싫어한다. 고액기부자 관리는 해당 지부에서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라고 하더군요. 신년을 맞아 더나은미래 팀원들은 ‘향후 5년 기부&모금 트렌드’ 전망을 듣기 위해 모금액 100억원 이상 대형 NGO 9곳의 모금 전문가들을 만났습니다. 예상대로 고액기부 시대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 본부를 둔 인터내셔널NGO와 달리, 토종 NGO들은 “최신 모금 기법과 기부자 관리, 세무와 법무 등 거액 모금에 경험이 없어 고민” 이라고 했습니다. 위 사례와 같이 고액기부자 관리를 본부에서 할 지 해당 지부에서 할 지 등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논의를 아직 시작조차 못하는 상황입니다. 고액기부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면 초기에는 대학교나 병원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모교를 발전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 아직은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영리단체 또한 곧 고액기부자를 모시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날 겁니다. 이 과정에서 비영리단체의 질적 전환이 또 한 번 요구될지도 모릅니다. 최영우 도움과나눔 대표는 “서울대의 외부 발전위원이 60명가량인데, 시어머니가 60명이나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이 열려 있지 않으면 쉽지 않다”며 “임기 제한 규정이 없는 비영리단체의 이사회 문제, 늘 제기되는 회계 투명성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작은 칭찬 한마디가 아이들의 닫힌 마음 열어

“철판이 뽑혀 나오는 기계래요. 이걸 보는 순간, 그냥 아빠 생각이 났어요.” 중학생 여자아이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습니다. IMF 때 사업이 망한 아빠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사진 속에는 서울 문래동에서 발견한 기름때 묻은 공장기계가 있었습니다. 아이와 저는 이 작품 제목을 ‘아빠’라고 붙이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활짝 웃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저와 더나은미래 기자들은 서울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일일강사를 했습니다. 두산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시간여행자’의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청소년 60명은 지난 5개월 동안 사진과 역사를 배우고, 서울 문래동과 부암동 등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년 1월이면 이 작품은 전시회에 걸리게 됩니다. 저는 아이들이 작품집에 실릴 에세이를 직접 쓰도록 돕는 일을 맡았습니다. 한 아이는 온통 새까만 바탕에 하얀 국화꽃 사진을 대표작으로 골랐습니다. “왜 이 사진을 찍었느냐”는 질문에, 처음에 “그냥 흰 국화꽃이 좋아서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상처받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제가 1지망으로 원했던 고등학교에 떨어졌어요. 2지망 고등학교 원서를 넣고 오는 길에, 제가 가고 싶었던 1지망 학교에 원서를 넣으려고 깔깔대며 버스를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났어요. 속상해서 죽고 싶었어요. 이 꽃을 그 아이들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었어요.” 에세이 제목을 ‘2지망’으로 정했습니다. “네 얘길 써보라”는 말에 아이는 “정말 이 얘길 써도 돼요?”라고 반문하더니, 나중에 멋진 에세이 한 편을 만들어왔습니다. ‘문화역 서울 284′(구 서울역사)라는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도,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어지럽게 엉켜 있는 전선과 콘센트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촬영한 아이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친구들과 갈등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뜬구름 잡는 보육 정책, 부모들만 ‘끙끙’

가히 전쟁입니다. 둘째 딸 유치원 보내기 말입니다. 발품 팔아 정보 모으고, 눈치작전으로 원서 넣고, 당첨돼도 유치원비에 ‘억’ 소리 나는 게 대학 입시 전쟁 못지않습니다. 역시 우리나라에선 ‘눈치’가 빨라야 살아남습니다. 만 3세까지만 있는 가정어린이집에 보낼 때, “미리 5세반이 있는 다른 어린이집에 등록해둬야 한다”는 조언을 흘려 들었습니다. ‘설마’ 했죠. 지난 11월부터 아이를 보낼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알아보며,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며칠 전, 한 어린이집에 원서를 넣으러 갔더니 “어머니, 어차피 넣어봐도 안 되니까 그냥 가세요” 하더군요. 서울시 보육 포털 서비스에 들어가, 어린이집에 대기 등록하니 한 곳은 37명, 또 한 곳은 120명 넘게 줄 서 있더군요. 유치원은 더 가관입니다. 근처 공립학교 유치원은 모조리 반일반(9~1시)뿐이었습니다. 공짜라고 해도, 직장맘에게 ‘그림의 떡’입니다. 사립 유치원은 70만~90만원대의 학원비를 자랑합니다. 대개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하는, 하루 5시간 교육비치곤 너무 비쌉니다. 청소년수련관에서 운영하는 유아 체능단에 접수, 저녁 9시 무렵 추첨을 하러 갔습니다. 작년까지는 선착순이어서 “새벽 2시부터 줄 섰다” “아르바이트까지 고용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올해 교육부의 ‘선착순 금지’ 지침 때문인지 추첨제로 바뀌었더군요. ‘김○○’. 추첨 항아리에서, 제 딸아이의 이름이 불리자 환호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날 추첨이 끝난 강당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습니다. 접수만 해놓고 당일 추첨에 참가 못한 이들을 두고, ‘당첨된 것으로 봐야 한다’ ‘추첨 의사를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등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탈락한 부모들은 “재추첨하라”고 소리를 높여 결국 재추첨이 벌어졌고, 결국 이미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초고속 성장… 그러나 ‘품격’ 갖춰야 할 때

“야영장에 도착한 아이들에게 차에서 내리는 순서대로 세계 각 나라의 국적을 부여한다. 국적이라는 것이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프랑스나 일본 등 부자나라 국민이 된 아이들은 밥과 반찬, 물, 담요 등을 풍성하게 받고, 수단 등 가난한 나라의 국적을 받은 아이들은 캠프 기간 내내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지내게 된다.”(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중에서) 지난주 한비야씨와 존번 델라웨어대 교수를 만난 후 저는 ‘나라의 품격’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겐 ‘사람의 품격’이 있듯, 나라에도 ‘나라의 품격’이 있겠지요. 품격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고위직에 있다가 은퇴해보면, 세상살이의 쓴맛을 제법 느끼게 된다고 하지요. 저도 한때 그런 상처 아닌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더나은미래’ 편집장이 된 후, 조선일보 사회부나 정치부 기자 시절 친분이 있었던 몇몇 취재원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기자직을 뒤로한 지 4년 만에 복귀한 저는 ‘순진하게도’ 그들도 반가워할 줄 알았습니다. “우와~ 반가워요. 이게 얼마 만이야? 언제 한번 밥이나 먹어요.” 이런 멘트를 날린 상대방은 일주일이나 이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필요에 의해 사람을 만나고, 필요에 의해 사람을 버리는 ‘진짜 세상’이 좀 느껴지더군요. 덕분에 중요한 교훈도 얻었습니다. 경찰청 출입기자, 한나라당 출입기자라는 알량한 권력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저를 ‘인간 박란희’로 대해주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을 권력·지위의 높낮이로 판단하지 않는 것, 강자에게 약해지지 않고 약자를 배려하는 것,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주위에 나누어주는 것. 진짜로 품격 있는 사람은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여성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일·가정 양립 가능한 사회

“형님, 혹시 일요일 오후에 잠깐 저희 애들 좀 봐주실 수 있으세요?” 지난 18일, 저는 다급히 몇 통의 전화를 돌렸습니다. 더나은미래는 2주에 한 번씩 일요일 오후에 지면제작을 합니다. 그때마다 남편이 애들을 돌보는데, 이번 주 갑작스레 남편의 일정이 잡힌 것입니다. 급하게 베이비시터를 섭외하기 시작했습니다. 1)시누이.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산행이 잡혀 있었습니다. 2)손윗동서. 난색을 표하며, 어쩔 수 없으면 봐주겠다고 했습니다. 차량에 아이 둘을 태워 경기도까지 왔다갔다 해서 번거로움과 부담감에 포기했습니다. 3)큰딸 친구 엄마. 아홉 살짜리 큰딸은 문제없지만, 손이 많이 가는 네 살짜리까지 부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4)내가 직접 회사에 데리고 간다. 2주 전에도 애 둘을 데려갔는데, 또 그러기엔 엄두가 안 났습니다. 충청도의 시어머니, 경상도의 친정엄마까지 목록에 올렸다 지웠습니다. 결국 믿을 구석은 저한테 월급 받는 ‘또 하나의 일하는 엄마’인 베이비시터뿐이었습니다. “주말엔 안 봐주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니까 봐준다”고 했습니다. 고마움, 서러움, 분노, 억울함까지 북받쳐서 눈물이 좀 나왔습니다. 하루 전날, 식사자리에서 지속가능한 기업을 위한 컨설팅을 담당하는 A씨를 만났습니다. 아빠가 된 지 얼마 안 된 그는 “추석에도 시골에 못 가고 일했다” “일주일에 하루도 집에 못 들어가서 아내가 속옷을 챙겨서 회사에 온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A씨의 상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습니다. 저는 농담 반 진담 반 “그래서야 지속가능한 가정이 유지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저와 절친한 워킹맘 2명이 아이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20~30년 후 딸들이 살게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다른’ 건 ‘틀린’ 것 아냐… 다른 의견 표현할 줄 아는 ‘용기’ 가져야

1968년 4월 5일, 미국 아이오와주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사인 제인 엘리어트는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흑인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운 마틴 루터킹 목사가 암살된 다음 날이었지요. 그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합니다. 푸른눈과 갈색눈 두 그룹으로 나눠, 금요일엔 푸른눈이 열등한 그룹이 되고 월요일엔 갈색눈이 열등한 그룹이 됩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차별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학급에서 가장 인기있던 푸른눈의 소녀는 첫날 열등한 그룹이 되자, 갑자기 구부정하게 걸었고 행동이 어색해졌고, 수업을 따라오기 힘들어했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갈색눈 친구가 일부러 뻗은 팔에 등을 부딪쳤습니다. “내가 너보다 우월하니까, 네가 사과해야 해.” 갈색눈 친구의 도전적인 태도에 푸른눈 소녀는 웅얼거리며 사과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함께 놀자고 열등한 푸른눈 그룹 친구를 초대한 갈색눈 아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실험을 시작한 지 반나절 만에 벌어진 상황에 엘리어트는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이 실험은 이후 다큐멘터리로 상영돼 미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킵니다. ‘푸른눈, 갈색눈'(한겨레출판)이란 책을 읽으며, 얼마 전 초등학교 2학년 딸의 학교에 독서명예교사로 1시간 동안 수업을 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첫 번째 남자아이가 ‘야구선수’라고 답하자, 그 옆의 아이도 ‘야구선수’, 그 옆의 아이도 ‘야구선수’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한 명만이 ‘축구선수’라고 했습니다. 여자아이 한 명이 ‘디자이너’라고 말하자, ‘간호사’라고 답한 아이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디자이너’를 말했습니다. 30년 전 저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봤습니다. ‘대통령’ ‘미스코리아’ 같은 다소 황당하고 거창(?)한 답변을 하는 친구 몇 명은 꼭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NGO는 대행사 아냐 함께 가야 할 동반자

언론사에 있다가 1년 남짓 NGO에 몸을 담갔을 때, 저는 꽤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직원들이 젊고 이직이 많았으며, 연봉은 처절하게 낮았습니다. NGO는 그야말로 사람 하나하나가 ‘일당백’을 해야 하고, 그 사람 하나가 빠지면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밀려올 만큼 공백이 크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의 ‘생태연구소’를 가보니, NGO임에도 멋진 건물에 공무원보다 많은 월급과 전문성을 갖춘 조직이었습니다. ‘NGO 직원은 좋은 일 하려고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가는 사람들이니까, 적은 월급을 감내하면서 사는 건 당연하다’ 혹은 ‘NGO 직원들 월급에 쓰려고 내 후원금의 일부를 떼가는 건 말이 안 돼’ 하는 생각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NGO란 원래 정부가 모두 커버할 수 없는 복지·교육·지역사회·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하는 전문조직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돈’이지요. 공무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기업 임직원은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월급을 받습니다. NGO는 그 취지에 동참하는 시민들이 내는 후원금으로 운영되지요. 해외의 NGO들은 우리처럼 늘 ‘을’만은 아닙니다. 그냥 파트너이지요. 정부가 직접 하기 힘든 사업을 할 때, 기업이 사회공헌을 함께 하려고 할 때 찾는 파트너입니다.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NGO가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기업 사회공헌의 현실과 대안’ 시리즈를 하면서, 화가 날 때가 많았습니다. 각 기업의 실명을 일일이 밝히고 싶었지만, 해당 NGO에서 “큰일 난다”고 해서 익명을 써야 했습니다. ‘돈’이 어디서 오느냐에 의해 모든 갑을 관계가 결정된다면, 공무원이나 NGO나 모두 ‘을’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NGO는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