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AI 시대, 필란트로피를 묻다] 기술은 나눔을 돕는 수단

그리스어로 ‘인간 사랑’을 의미하는 필란트로피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베푸는 자선만을 뜻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사회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돈과 재산뿐 아니라 시간·지식·기술·관계망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으며 공동체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공공적 실천이다. 따라서 필란트로피의 핵심은 기부액의 크기보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 타인에 대한 연대,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시민의 믿음에 있다. 한국 근대의 기부문화와 시민정신도 이러한 과정에서 성장했다. 1896년 독립문 건립 모금은 신분과 지역을 넘어 시민들이 공공의 상징물을 함께 세운 근대적 모금운동의 최초 사례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이재민을 돕기 위한 모금은 국경과 민족을 넘어 고통받는 타인을 돕고자 한 인도주의적 실천이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는 상인·노동자·농민·학생·여성 등이 나라의 위기를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참여했다. 이후 기부문화는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재해와 기근 구호, 한센병 환자 지원, 해외 한인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등으로 영역을 넓혀 갔다. 이 과정에서 기부는 개인의 선행에 머물지 않고 시민을 조직하고, 공동의 목적을 형성하며,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 가는 힘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권력은 우리 민족의 자발적인 필란트로피 운동을 탄압하고, 전쟁을 위한 국방헌납과 같은 비자발적 모금을 강요했다. 광복 이후에도 독재 정부는 일제가 시행하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필란트로피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역사를 돌아보면 필란트로피 운동에는 신문과 언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문 건립 당시에는 독립신문이, 국채보상운동 때는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만세보·제국신문 등이 사회문제를 알리고 모금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시민들의 참여 방법을 안내하는 한편,

김효진 위시빌더 대표 썸네일
[People&Planet] 기술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세탁기는 한때 여성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한 발명품으로 불렸다. 젖은 빨랫감을 손으로 비비고 짜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면서 생긴 변화는 분명 컸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세탁기가 등장한 뒤 여성의 삶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2010년 경제학자 다니엘레 코엔피라니(Daniele Coen-Pirani) 등의 연구는 가전제품의 보급이 1960년대 미국 기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증가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가전제품을 보유한 가정의 생활시간을 살펴본 다른 연구에서는 여성의 무급 가사 노동 시간이 대체로 줄지 않았다. 빨래 한 번이 쉬워졌더라도 더 자주 빨래해야 한다는 기대가 생길 수 있다. 세탁기가 일을 덜어 주어도 세탁물을 챙기고, 널고, 개는 일이 누구의 몫인지는 기계가 결정하지 않는다. 의료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설사로 인한 탈수를 치료하는 경구수분보충액(ORS)이다. 물과 소금, 포도당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설사로 잃은 수분과 전해질을 보충하는 비교적 단순한 방법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ORS는 콜레라에 걸린 난민 아동을 치료하는 데 사용됐다. 이후 1979년 방글라데시 정부는 유니세프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경구수분보충 캠페인을 시작했다. 효과적인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보건인력을 교육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체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모든 아이가 이 치료를 받는 것은 아니다. 유니세프가 2026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설사를 앓는 아동 가운데 ORS와 아연을 함께 투여받는 비율은 세계적으로 약 22%다. 효과가 입증된 방법을 필요한 때에 구할

김민석 마스턴투자운용 센터장
[People&Planet] 대체투자 자산운용사에 왜 ‘사회공헌추진단’이 생겼을까

대체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에 사회공헌추진단이 생겼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대기업 계열도, 금융지주 계열도 아닌 독립계 자산운용사라면 물음표는 더 커진다. 게다가 개인 고객을 상대하는 리테일보다 연기금과 공제회 같은 기관투자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전형적인 B2B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자산운용사라고 하면 대개 숫자와 수익률, 투자 구조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반면 사회공헌은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기업이나 이익 규모가 큰 대기업의 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니 상업용 부동산에 주로 투자하는 대체투자 하우스가 대표이사를 단장으로 한 사회공헌 조직을 꾸렸다는 소식이 다소 생경하게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기업의 사회공헌은 대체로 두 가지 동력으로 움직여 왔다. 하나는 그룹 차원의 방침이다. 계열사마다 사회공헌 예산과 조직을 두고 그룹의 가치를 함께 실천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소비자와의 관계다. 브랜드 이미지가 곧 매출로 이어지는 B2C 기업일수록 사회공헌에 공을 들인다. 독립계 대체투자 운용사에는 둘 다 없다. 사회공헌을 하라고 요구하는 모회사나 지주사도 없고, 예산과 방향을 내려보내는 그룹 컨트롤타워도 없다. 사회공헌 소식을 보고 상품에 가입해 줄 대중 소비자도 거의 없다. 하지 않을 이유는 많지만, 해야 할 ‘외부의 이유’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구조다. 누가 시켜서도,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도 아니라면 실마리는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 기업이 무엇으로 먹고사는지, 곧 ‘업의 본질’이다. 필자는 롯데그룹에서 커뮤니케이션과 CSR 업무를 경험하며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사회공헌이 오래 지속되려면 바로 그 업의 본질에서 출발해야

[사회혁신발언대] 교실 뒷자리, 집안일을 걱정하는 아이들

아침 자율학습 시간, 책상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진 학생이 있다. 준비물을 자주 챙겨 오지 못하거나 방과 후 친구들과의 모임을 한사코 마다하는 학생도 있다. 겉으로는 소극적이거나 학업 의욕이 부족한 학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중병이나 장애, 정신질환을 겪는 부모나 형제를 돌보고 집안일까지 책임지는 ‘영케어러(가족돌봄청소년)’의 고단한 삶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영케어러 문제는 개별 가정이 감당해야 할 사적인 어려움이나 ‘효행’의 관점에서 다뤄지곤 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다르다. 과도한 돌봄 부담은 청소년이 누려야 할 학습과 휴식, 관계와 성장의 기회를 제약한다. 한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넘어 청소년의 기본적인 발달권을 위협하고,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키울 수 있는 구조적 문제다. 첫째, 돌봄 부담은 일상적인 학업 결손을 낳고 미래의 기회까지 제한할 수 있다. 만성적인 피로와 밤샘 간병은 지각과 결석, 수업 집중도 저하로 이어진다. 학습 결손이 장기간 누적되면 진학과 진로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노동시장 진입과 경제적 자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청소년기에 짊어진 돌봄의 무게가 한 사람의 생애 전반을 흔들 수 있는 이유다. 둘째, 기존의 ‘신청주의’ 복지 체계만으로는 이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영케어러 청소년 상당수는 가족의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외부에 알리는 것을 꺼린다. 자신이 수행하는 돌봄을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가족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스스로 복지기관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는 만큼, 학생들의 변화를 일상적으로 관찰할 수

[사회혁신발언대] 홀로 돌보는 아이들, 이제는 함께

“나는 혼자 전쟁터에 서 있었고 나를 잃어가며 누군가의 하루를 지켰다.” 인천광역시청년미래센터의 수기공모전 모음집 ‘마음을 전하는 청년들의 기록’에 담긴 한 가족돌봄 청소년의 고백이다. 이 짧은 한 문장에는 보호받고 성장해야 할 시기에 홀로 돌봄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아픔과 고립감이 담겨 있다. 초록우산이 현장에서 만나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래들이 진로를 고민하고 미래를 준비할 때, 이들은 아픈 가족의 약을 챙기고 생계를 걱정한다. 이제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의 문제는 개인이나 한 가정만의 어려움으로 남겨둘 수 없다.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구조적 문제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이들이 감당하는 현실의 무게를 실감한다. 돌봄은 흔히 가족 간 사랑과 책임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보호받아야 할 아동·청소년이 오히려 부모나 조부모, 아픈 형제자매를 돌봐야 하는 상황은 다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고립’과 ‘시간의 상실’이다. 가족의 질병이나 장애는 가정의 경제적 기반까지 흔들 수 있다. 생계를 보태기 위해 아이들이 학업을 중단하거나 간병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일도 생긴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사이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시간과 기회도 줄어든다.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삶을 돌볼 여유를 잃고 번아웃과 고립을 경험하는 아이들도 있다.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은 2021년부터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을 둘러싼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 2267명을 발굴해 긴급 지원을 했다. 특히 돌봄 부담이 높은 117명에게는 ‘돌봄부담경감 프로젝트’를 통해 돌봄코디네이터를 일대일로 연결하고 맞춤형 현금과 서비스를 지원했다. 돌봄코디네이터가 가정을 정기적으로 찾아 돌봄 상황과

[임팩트의 행방불명] 임팩트 프레임워크(SROI, IMP)에 대한 실무적 오해

현장에서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하는지 물으면 이런 답을 자주 듣는다. “우리는 SROI 기반으로 측정합니다”, “우리는 IMP 기반으로 측정합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대개 의미는 비슷하다. SROI(Social Return on Investment)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사회성과를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는 뜻이고, IMP(Impact Management Platform)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IMP가 제시한 ‘임팩트의 다섯 가지 차원(Five Dimensions of Impact)’에 맞춰 임팩트 리포트를 작성한다는 뜻이다. 물론 틀린 설명은 아니다. 다만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하는가’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임팩트를 화폐가치로 환산하거나 IMP의 다섯 가지 차원에 맞춰 정리하는 것은 성과를 ‘어떻게 표현하고 보고했는가’에 관한 설명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성과가 어떻게 발생했고, 그중 조직이 실제로 기여한 몫이 얼마인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 SROI의 핵심은 화폐가치화가 아니다 SROI는 재무적 대용치(Financial proxy)를 활용해 사회성과를 화폐가치로 표현하도록 돕는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는 흔히 ‘SROI=화폐가치화’로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전 단계다. 어떤 변화를 성과로 볼 것인지, 그 변화 가운데 조직이 실제로 만들어낸 몫은 얼마인지 식별하는 과정이다. 임팩트 측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관찰된 변화 가이운데 우리 조직이 아니었어도 발생했을 변화(What would have happened anyway)를 제외하고, 조직이 기여한 몫을 구분해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SROI 역시 ‘과대주장 금지(Do not overclaim)’ 원칙을 통해 이를 강조한다. 조직이 만들지 않은 성과까지 자신의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재무적 대용치를 보수적으로 설정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따라서 SROI의

허재형 썸네일
[발코니에 올라] 함께 일했지만, 함께 달라졌는가

지난 글에서 나는 한 문장을 미완으로 남겨두었다. 협력의 접점은 늘었는데, 협력의 문법은 그대로라는 말이었다. 그 문법이 무엇인지 이번에는 나의 경험으로 답해보려 한다. 루트임팩트는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임팩트커리어W’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결혼과 출산, 돌봄으로 커리어의 흐름이 끊겼던 여성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경력단절여성’이 아니라 ‘경력보유여성’으로 불렀다. 그 기간에도 갈등을 조율하고, 한정된 시간을 쪼개 문제를 풀고,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을 내려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채용 플랫폼과 아이돌봄 서비스, 교육 기관과 글로벌 재단, 그리고 이들을 실제로 채용한 기업들이 함께했다. 7년 동안 백 명 가까운 여성이 과정을 마쳤다. 그중 절반 이상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함께한 조직 중 일부는 유연근무제나 출산 보호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숫자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다음이다. 2021년 성동구가 전국 최초로 경력보유여성 조례를 만들었고, 그 뒤 서른 곳 넘는 지자체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국회는 법률 용어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꾸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08년 법에 처음 새겨진 말이 열일곱 해 만에 교체된 것이다. 우리가 함께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 법률의 언어가 되었다. 그런데 발코니에 올라 이 여정을 다시 내려다보면,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 이 성과 중 우리가 사전에 의도를 갖고 함께 계획한 것은 얼마나 될까. 사실 조례의 확산과 법 개정은 우리가 미리 설계한 경로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다. 우리는 파트너들과 함께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호명했고, 새로운 이름이 현실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성동구에서 증명했다.

[사회혁신발언대] 청년미래센터가 본 위기아동·청년지원의 필요성 및 중요성

“센터장님, 제 꿈이 뭔지 아세요? 대기업 취업도, 세계 여행도 아니에요. 그저 당장 내일 병원비와 생활비 걱정 없이, 알람을 끄고 하루만 푹 자보는 거예요. 저의 20대는 이미 엄마의 병간호에 저당 잡힌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라 불리는 울산의 화려한 불빛 이면에는, 이처럼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홀로 숨죽여 우는 청춘들이 있다. 한창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 할 10대와 20대, 길게는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시계는 아픈 가족의 투병 생활과 생계의 굴레에 맞춰진 지 오래다. 질병, 장애, 정신질환 등을 겪는 가족을 홀로 돌보며 가사 노동과 생계까지 책임지는 이들을 우리는 ‘영케어러(Young Carer, 가족돌봄아동·청년)’라 부른다. 국내 규모만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이들은 오랫동안 완벽한 ‘투명 인간’이었다. 과거 대가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나눠 맡던 돌봄의 짐이 핵가족화와 1인 가구 증가 등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준비되지 않은 어린 자녀에게 독박 돌봄으로 전가됐고, 이를 ‘효행’이나 ‘가족의 도리’로만 포장해 왔기 때문이다. 영케어러가 겪는 위기는 다중적이고 파괴적이다. 간병과 가사에 시달려 지각과 결석이 잦아지고 결국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또래들이 취업 스펙을 쌓을 때 당장 병원비를 벌기 위해 단기 알바를 전전하고, 질 좋은 일자리 진입 시기를 놓쳐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사회적 고립 속에서 겪는 우울감과 무기력은 벼랑 끝에 선 청년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기도 한다. 영케어러 문제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연이 아닌, 심각한 사회적 손실을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다. ◇ ‘기다리는 복지’에서 ‘찾아가는 연대’로

[사회혁신발언대] 영케어러를 기다려선 찾을 수 없다

2021년, 아픈 아버지를 홀로 돌보다 무너진 대구의 한 청년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필자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우리 동네에도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서구에서 공약이 되고, 조례가 되고, 전국에서 처음 지급된 가족돌봄청년수당으로 이어졌다. 이제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전국의 시·군·구가 같은 출발선에 섰다. 그래서 한 지역의 성과보다는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을 나누고 싶다. 조례와 수당은 시작일 뿐이었다. 정작 어려운 일은 그다음에 있었다. ◇ 영케어러는 스스로 창구에 오지 않는다 서구는 세 차례 전수조사를 했다. 복지 행정 데이터에서 아픈 가족과 청년이 함께 사는 가구 수천 세대를 추린 뒤, 동 행정복지센터 공무원이 일일이 방문하거나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확인된 대상은 매번 백 명 안팎이었다. 수천 가구를 살펴 백 명을 찾는 일이다. 해마다 숫자가 조금씩 늘어난 것은 대상 자체가 늘어서라기보다, 숨어 있던 가족돌봄청년들이 뒤늦게 발견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데이터로는 잡히지 않는 유형도 계속 나왔다. 13세 미만 아동, 학교 밖 청소년, 소득기준을 조금 넘는 가구, 돌봄 사실을 숨기는 가정, 정신질환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이다. 올해는 다문화가정 자녀가 부모의 통역과 병원 동행, 행정 처리를 도맡는 경우도 ‘사실상의 돌봄’으로 보고 따로 살폈다. 질병·장애 코드만으로 접근했다면 영영 보이지 않았을 가족돌봄청년들이다. 이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담임교사, 복지관 사회복지사, 병원의 의료사회복지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원, 그리고 이웃이다. 그래서 학교의 추천과 가족센터·복지관의 협약 연계를 조사의 공식 절차에 포함했다. 발굴은 행정 데이터와 민간의 눈이

[사회혁신발언대] 베네수엘라에서 만난 ‘일상’의 의미 

긴급구호 현장에서는 재난 이후 회복의 목표를 설명할 때 ‘Back to Normal’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무너진 삶을 가능한 한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리는 것을 뜻한다. 지난 6월,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한 지진은 주택과 기반시설을 무너뜨리고 많은 주민들의 일상을 한순간에 바꿔 놓았다. 재난 직후 긴급구호가 이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장의 상황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지난 8월 13일부터 8월 27일까지 희망친구 기아대책 긴급구호 3차팀의 일원으로 베네수엘라 현장을 찾았다. 재난 직후와 비교해 피해 지역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주민들은 지금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베네수엘라에 도착해 피해 지역을 둘러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의외로 빠르게 정리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무너진 집은 철거돼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도 있었고, 도로와 마을 곳곳에서도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난 직후의 혼란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리되고 있다’는 것과 주민들의 삶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다.  재난 현장에 남아 있는 이재민들은 쉽게 말해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경제적 여유가 있거 의지할 가족과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피해 지역을 떠났다. 남겨진 이들은 무너진 집과 불안정한 생활환경 속에서 다시 일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들이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이번 재난 이전부터 오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온 곳이다. 현장에서 직접 체감한 식비와 이동비, 구호물품 가격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주민들이 가장 많이 요청했던 것이 임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쉘터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비용도 다른 긴급구호

[박훈의 나눔과 세금] 세상을 바꾸는 기부와 세금

“내 돈이 어디로 갔나요?” 기부하는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연말에 모금함에 봉투를 넣고 잊어버리는 것이 미덕이었다면, 요즘 기부자는 묻는다. 내가 낸 돈이 무엇을 바꾸었느냐고. 공익법인들도 이 물음에 답하려 애쓴다. 사업의 성과를 측정하고, 수혜자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 주는 연구가 하나둘 나오고 있다. 기부가 ‘착한 일’에서 ‘투자’로 옮겨 가는 중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 세금은 왜 기부를 거들어야 하나 세법도 기부를 거든다. 봉급생활자가 기부하면 세액공제를 받고, 개인사업자나 법인은 기부금을 일정 한도 안에서 경비로 인정받아 소득세나 법인세가 줄어든다. 공익법인에 출연한 재산은 일정 요건을 갖추면 상속세나 증여세 과세가액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지원을 늘리자고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온다. 좋은 일 하겠다는 사람에게 왜 나라가 세금까지 깎아 주느냐, 공익법인은 결국 절세 창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무조건 편견이라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없지 않았고,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 공익법인에 한 회사의 주식을 일정 비율 넘게 출연하면 세금을 매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제 혜택은 결국 국가가 받을 세금을 덜 받는 것이다. 그러니 혜택을 유지하고 넓히려면 정부와 국회를 설득해야 한다. 말로 하는 설득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가 못 하거나 서툰 일을 공익법인이 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근거다. ◇ 5년짜리 정부, 1년짜리 예산 국가가 서툰 일이 무엇인지는 구조를 보면 보인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예산은 1년 단위로 짜인다. 복지예산은 한번 늘리면 줄이기 어렵고, 줄이면

[사회혁신발언대] 전 국민의 손길이 ‘약손’이 되기를 바라며

“어르신, 약 드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2026 유일한 아카데미 6조가 활동 기간 내내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다. 강남종합사회복지관과 대방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난 50여 명의 어르신과 두 차례의 발표까지 더하면 적어도 52번은 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르신들이 약을 챙겨 제때 복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장은 예상과 달랐다. 대부분 처방받은 약을 잘 복용하고 있었고, 시중에 나온 복약 관리 앱도 여덟 개가 넘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우리가 준비한 질문이 아니라 어르신들의 이야기 속에 있었다. “병원에서 말해야 하는 건 알지만, 막상 가면 몇 개씩 까먹고 오지. 무엇을 빠뜨렸는지도 몰라 다시 처방받거나, 아예 안 먹기도 해.” 한 어르신의 말씀이었다. 문제는 약을 먹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가 제대로 기록되고 공유되지 않는 데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우리는 ‘약을 먹었는가’보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누가 알고 있는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르신의 복약 정보가 한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의료진과 가족의 돌봄으로 이어지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고령층의 복약 정보를 기록하고 의료진과 가족에게 전달하는 플랫폼 ‘약손’이 탄생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았다면 우리 조의 결과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의 시선은 출발점에 그대로 머물렀을 것이고, 솔루션 역시 청년들의 상상 안에서 끝났을 것이다. 사회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당사자의 목소리였다. 특강 첫날 “잘 아는 것보다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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