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아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썸네일 가로형
[영리한 비영리] 우리는 왜 타인을 착취하며 관심을 구걸하게 되었나

2022년 11월,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심장질환을 앓는 소년을 위로하는 사진이 공개되며 이목을 끈 적이 있다. 대통령실은 ‘심장병 수술을 받은 아동들을 격려하기 위한 방문’이라고 설명했지만, 해당 사진은 ‘빈곤포르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빈곤포르노(Poverty porn)란 ‘신문 판매, 기부금의 증대 또는 필요한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을 착취하는 모든 유형의 미디어’를 뜻한다. 사진에서 시작된 논란은 빈곤포르노 vs 국위선양이라는 구도로 정당 간 논란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국제개발협력 청년활동가들의 커뮤니티인 ‘공적인 사적모임’은 김건희 여사와 대통령실을 규탄하는 서명을 추진했다. 2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하며 우리 사회에 빈곤포르노 이슈에 대해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 ◇ 착취를 통한 동정심의 문제 ‘빈곤포르노’ 개념이 대두된 1980년대는 국제적으로 아프리카 아동의 기아 실상을 알리는 캠페인이 많았다. 가슴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깡마른 아이 얼굴에 파리들이 달라붙은 장면이 등장했다. 그런 캠페인은 단번에 수천만~수억 달러를 모금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많은 국제개발협력의 현장에서 그런 이미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됐다. 내로라 하는 국제 비정부기구들은 앞다투어 처참한 빈곤 속에 놓인 아이들을 사진에 올렸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많은 모금기관도 덩달아 빈곤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진 속 아이들은 아프고, 슬프고, 배고팠으며, 불쌍했다. 그렇다면 왜 많은 비영리기관은 왜 빈곤포르노를 통해 모금을 했을까? 그 배경에는 모금기관의 ‘성장주의’가 숨어있다. 자선을 위해 많은 기부가 필요하다는 명분은 ‘모금 규모의 성장’이 가장 큰 미덕이 되도록 면죄부를 줬다. 또한 많은 대중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한 장의 사진에 더 크게 반응했다. 많은 모금기관이 독배를 마시듯 그렇게 성장해 왔다. 한국사회 기부규모 성장의 이면에는 착취의 역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많은 기부를 끌어낸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멀리 내다본다면 빈곤포르노의 위험성에 우리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빈곤포르노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감춘다는 것이다. 최근 다양한 사회문제들은 난제가 되고 있다. 사회구조가 고도화된 만큼 빈곤문제의 기저에는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구조적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빈곤포르노를 통해 ‘배고픔’으로 단순화된 빈곤은 문제를 단순화하며 대중들의 인식을 문제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한다. 병든 부모와 동생을 돌보며 일찌감치 가장이 되어야 했던 지방에 사는 한 아이에게는 빈곤을 넘어서는 무거운 사회문제가 숨어있다. 건강보험의

이호영 임팩트리서치랩 CRO·십시일방 대표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비영리조직들이 ‘비영리 대행사’로 남지 않으려면

비영리조직들이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설립 당시부터 많은 자본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 후원자를 모집하거나, 민간·정부의 공모 사업에 지원하여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창기부터 많은 수의 개인 후원자를 확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다수의 비영리조직들은 지원 사업의 도움을 받는다. 초기 자본이 없는 비영리조직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지원 사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원 사업들은 자금 사용 규정이 엄격하다. 직접적인 사업 운영비 외에는 자금을 지출할 수 없다. 모든 돈이 ‘사업 자체’를 위해서만 쓰였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사업을 운영하는 ‘조직 자체’를 위해서는 돈을 쓰거나 투자하기 어렵다. 사실 돈을 배분하는 주체가 애초에 돈의 사용 목적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금 제공자는 자신의 돈이 목적 사업에만 쓰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국 그 사업을 디자인하고 수행하는 것은 비영리조직이다. 비영리조직이 생존하거나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면 자금 제공자는 언젠가 ‘돈이 있어도 사업을 수행할 역량 있는 조직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대기업이 ESG 경영의 일환으로 협력업체들의 역량 강화에 투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대기업이 의뢰한 일감을 겨우겨우 쳐내는 환경 속에서 협력업체가 발전을 모색하기는 어렵다. 협력업체들이 서서히 사라지거나 경쟁력을 잃어가면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고 결국 대기업도 타격을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이 협력업체의 성장을 돕는 것은 상호 생존을 위한 경영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비영리 생태계에서도 이와 같은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지원 사업이 끝난 뒤 비영리조직에게 남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사업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직원들이 남는다. 이들은 비영리조직의 인적 자산이 된다. 하지만 지원 사업이 연장되지 않거나, 유사한 사업을 따내지 못하면 말이 달라진다. 사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충당하던 인건비(일반적으로 총 사업비의 10~15%) 또한 사라진다. 더이상 인건비를 줄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직원은 떠난다. 그렇게 조직에 잠시 쌓였던 인적 자산이 휘발된다. 얼마 뒤 새로운 지원 사업에 선정돼도 그 사업 또한 종료되기 때문에 상황은 반복된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비영리조직의 업력은 길지만 인적 자산과 노하우는 쌓이지 않고 리셋되는 답보 상태가 된다. 비영리조직에게 그나마 오래 남는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가끔은 직선으로 걷지 않아도 좋다

점과 점을 잇는 최단의 거리는 직선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직선에 가까운 커리어 패스를 원하고 최단 시간에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 최연소 합격, 최연소 졸업.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추앙하는 단어다. 그러나 왜 빨리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인가. 왜 커리어 패스가 꼭 직선이어야 하는가. 공익을 추구하고 문제와 사람을 우선하면 효율적인 커리어 패스를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문제를 풀고 사람을 돕기 위해 현장에 갔다가 배움에 갈증을 느껴 학교로 갈 수도 있다. 학교로 갔다가 현장이 그리워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한 직장에 갔다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공익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직업이나 직장은 커리어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궁극적 목표는 특정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직업과 직장은 그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목표는 일관되더라도 그 목표를 추구하는 효과적인 수단은 환경에 따라 바뀐다. 그러다 보면 커리어 패스가 직선을 이탈한다. 빈곤과 불평등을 줄인다는 내 목표는 바뀐 적이 없다. 그러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은 계속 달라졌다. 한때는 대학교수였고, 또 다른 때에는 데이터 과학자였다. 지금은 둘 다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나의 첫 직업은 한국의 대학교수였다. KDI 정책대학원에서 1년간 일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코드 포 아메리카의 데이터 과학자로 근무했다. 코드 포 아메리카는 미국의 대표적인 시민 기술(civic tech) 단체다. 미국 정부와 협력하여 기술, 디자인, 데이터를 통해 미국의 복지 시스템을 시민들이 더 쉽고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데이터 과학팀 소속으로 캘리포니아, 뉴욕, 콜로라도, 뉴멕시코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잘 다니던 코드 포 아메리카를 작년 하반기에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내가 정책 현장에서 데이터 과학자로서 쌓은 기술, 경험, 인맥을 더 큰 임팩트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무대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드 포 아메리카에서 경력을 쌓고 다른 직장으로 옮긴 동료는 많다. 이들 대부분은 백악관의 미국 디지털 서비스청(USDS) 같은 정부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도 USDS로부터 이직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퇴사 후 미국 정부나 다른 비영리단체로 옮기는 것 대신에 대학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코드 포 아메리카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사회와 공유한다는 면에서 연구 결과를 모두와 나누고

[임팩트로의 초대] 지방 도시 커뮤니티의 시작

성수동에서 지방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지방특별시 포럼’이라는 이름 아래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성수동의 임팩트 커뮤니티를 이끌어온 루트임팩트와 공동 주최한 이번 모임은 지방 도시 커뮤니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첫 지방특별시 포럼은 지난해 6월 대전에서 이틀 동안 진행됐다. 포럼은 ‘이해관계자 연결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전국 각지의 기업, 대학, 지방자치단체, 투자사, 창업 생태계 지원 기관, 언론 관계자 등 100여 명이 모였다. 이는 주제처럼 지방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시작점이 됐다. 이후 매달 진행된 스터디와 답사 등의 활동을 통해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커다란 지방 도시 커뮤니티로 발전해 왔다. 다음 포럼은 11월에 헤이그라운드 성수시작점에서 열렸다. 이번 모임의 주제는 ‘100개의 제안’이었다. 포럼 구성원들은 지방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각자의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실행과 협력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더불어 지방 도시 커뮤니티의 비전을 함께 그려보며, 서로 깊이 연결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지방소멸은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중요한 담론이지만, 그 해결 과정에서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워 어느새 지루한 주제가 되어가는 듯했다. 문제의 규모와 복잡성 때문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함께 논의하고 협력해야 하지만, 이를 실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청년과 중장년이 함께하지 못했고, 지방 도시 간의 연결도 부족했다. 또한 산업, 대학, 금융, 언론, 행정 등 지방 도시 지속가능성에 필수적인 핵심 분야들이 하나의 장으로 모여 협력하는 일도 드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방특별시 포럼은 새로운 가능성과 에너지가 모이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지방특별시 포럼에는 지방 도시의 지속가능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다양한 세대와 지역,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다.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핵심 주체들이 한자리에 함께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우리는 앞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방 도시 커뮤니티’를 구축해 나가기로 뜻을 모았다. 지난여름, 포럼 구성원들과 함께 포항을 다녀왔다. 포항은 다음 세대가 이곳에서 살며 꿈을 펼칠 수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멋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특히 포항 기업혁신파크는 양질의 일자리, 교육, 정주 여건이 한데 어우러진 클러스터로, 도시가 지향하는 통합적 발전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통합적 발전의 배경에는 지자체,

[사회혁신발언대] 임팩트 생태계의 텃밭에서 싹을 틔우다

한국 공교육 과정을 밟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익숙한 것이 있다. 바로 생활기록부의 ‘진로희망사항’ 칸이다. 희망 직업과 희망 사유를 매 학기 작성해야 하는 이 항목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이어진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늘 머뭇거렸다.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의 불평등과 분쟁을 바라보며 막연히 “더 나은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을 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나는 ‘취준생’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게 되었다. 구직 활동 중이던 나에게 한 지인은 임팩트투자사이자 액셀러레이터인 MYSC(엠와이소셜컴퍼니)를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지난 9월, 나는 임팩트 생태계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 ‘사내기업가’로서 싹을 틔우다 MYSC는 ‘미래내일’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3개월간의 인턴십에서 나는 MYSC가 구성원들을 단순히 직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내기업가’로 정의하며 자율성과 책임감을 부여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곳은 개인의 성장, 성숙, 성과를 전 과정에서 조화롭게 추구하도록 독려했다. 지난 3개월 동안의 경험은 바로 그 ‘3성’에 진심인 조직이었음을 증명했다. 워크숍, 독서 모임, 티타임 등 자발적으로 진행된 활동 속에서 배움과 나눔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디자인씽킹 워크숍이 인상적이었다. 하루의 루틴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해 문제를 정의하고, 최적의 하루를 설계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성향을 파악하고 일상을 주도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아침형 루틴과 저녁형 루틴을 번갈아 시도하며 독서, 운동, 일기 등 다양한 활동으로 하루를 채워 나갔다. 그렇게 3주를 보내며 나는 ‘몰입’의 가치를 발견했다. 하루를 바쁘게 채우는 것보다 의미 있는 활동 하나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만족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경험은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만의 루틴을 찾아내고,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한 이 과정은 단순한 인턴십 이상의 시간이 되었다. ◇ 임팩트 생태계의 일부로 살아간다는 것 MYSC에 합류하기 전, 나는 악화되고 있는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친환경 마케팅 사례와 그린워싱 논란을 탐구하며, 기업의 목소리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경영 전략이 사회문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 지속가능경영을 꿈꾸던 나는 MYSC와 임팩트 생태계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비즈니스를 통해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흉내만 내는 ESG 보고서는 이제 그만

온실가스를 줄이라는 압력을 받는 한 회사는 내연기관 자동차를 전기자동차로 전환하여 탄소 발자국을 낮추고 이를 ESG 보고서에 주요 ESG 성과로 담았다. 한 기업은 직장내 사고 발생률이 높다는 비판을 받고 자동화와 외주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 후 직장내 안전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였다고 ESG 보고서에 공시했다. 또 다른 기업은 조직의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가 중요해지면서 남성으로만 구성되어있던 이사회에 여성 사외이사(사내이사가 아닌)를 선임하고 다양성을 실천하는 기업이라고 홍보했다. 위와 같은 내용은 ESG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이들 기업은 제대로 ESG 경영을 하고, 제대로 공시하고 있는 것일까. 올해 ESG 분야에서 가장 화두가 된 주제 중 하나는 ‘ESG 공시’ 였다. 지난 3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기후 관련 공시 최종안을 발표했고, 앞서 유럽연합(EU)은 기업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을 확정하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2026년 이후로 ESG 공시 의무화 일정을 연기했지만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 입장에서 ESG 공시는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ESG 경영 활동을 공시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와 ESG 보고서가 활용된다. 지난 8월 더나은미래는 국내 주요 30대 기업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분석하고 주요 현황을 공개했는데, 기업별로 공시 데이터의 질이 들쑥날쑥 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다른 매체 역시 어느 기업이 발간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가 오류투성이임을 밝히고,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보여줘야 하는 ESG 보고서가 회사의 치적을 알리는 사보와 홍보물로 전락하고 있음을 우려하기도 했다. “기업이 만드는 ESG 보고서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아요.” 투자기관에서 일하던 후배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기업이 발간하는 ESG 보고서의 주 독자가 취업준비생과 ESG 컨설팅 업체라는 말이 공공연한 사실이 된지도 꽤 된듯하다. ESG 보고서의 품질과 신뢰에 대한 우려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하버드대학 로버트 카플란 교수와 옥스포드대학 카르티크 라만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현재 ESG는 기업이 요구 받고 있는 이슈에 대한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유행어에 가깝습니다”. 두 교수는 E, S, G가 각각 단절되어있는 단일 개념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E, S, G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통합(integration)해야 한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 ESG를 통합해서 경영에 적용하고, 통합해서 성과를 측정하고, 통합해서 공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의

[기후 유니버스] 7가지 기후 이슈로 보는 2024년

국가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도, 2024년도 이제는 끝을 향해 가고 있다. 필자는 기후환경을 전공했지만, 전문가 보다는 제너럴리스트를 지향한다. 정책이나 제도에 대해서는 전문성이 부족하지만, 다양한 이슈를 접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은 남들에 비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말정산 차원에서 올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졌던 기후 이슈를 몇 가지 골라보려 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에서 선정했으니 내가 관심있는 주제가 여기에 없더라도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보고서 읽듯이 진지하게 공부한다는 생각보다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까먹는 귤처럼 평범하게 다가가면 좋겠다. 1. 기후동행카드 시행, ‘대중교통 패스 시대’의 시작 1월 23일 서울시는 기후동행카드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이용요금 할인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한다는 취지다. 서울시 온실가스 배출량 중 수송부문은 약 757백만 톤으로 이 중 96%는 운행하는 차량에서 발생한다. 현재 서울뿐 아니라 인접한 김포, 남양주, 의정부, 고양, 과천, 성남에서도 이용이 가능하고, 후불형도 출시한 상황이다. 기후동행카드로 촉발된 정부∙지자체 단위 대중교통비 지원사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언론 기사와 유튜브에는 어떤 것이 나에게 더 맞는 ‘대중교통 패스’일지 비교하는 컨텐츠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시행 1년이 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낮은 이용률 문제, 지자체의 1000억 단위의 막대한 예산 투입 등 개선해야 할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내연기관차 운행을 언제까지 중단할 것인지, 자가용 수요를 대중교통 수요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정책 목표가 필요한 시점이다. 2. ‘기후유권자’가 요구하는 기후공약과 기후국회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후정치바람’은 전국 17개 시∙도 17000명을 대상으로 기후위기 국민인식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전체 유권자 중 33.5%가 기후위기 이슈에 관심이 높고, 기후위기 의제에 반응하는 ‘기후유권자’였다. 주요 정당에서도 기후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인재를 영입했고 앞다퉈 기후 공약을 제시했다. 선거에서 기후위기 의제의 위상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이번에는 기후 국회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커졌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국회의장과 모든 원내정당이 합의한 기후위기 특위 출범은 여전히 안갯속에 있다. 지난 11일 나라살림연구소, LAB2050, 플랜1.5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내년 기후변화 대응 사업 예산은 3조7528억원으로 2022년 4조8115억 원에 비해 22% 줄어들었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전력계통

[조직문화 pH6.5] 사무실 문화가 ‘파티션’에서 ‘집중빡빡타임’으로 변하기까지

“그런데 책상을 붙여 굳이 서로 마주 보고 일하는 이유가 뭐에요?” 조직에 새롭게 합류해 일한 지 3개월을 넘긴 구성원이 나에게 물었다. 아차, 우리가 왜 이렇게 일하는지를 한 번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아… 그게요. 홈페이지에 있는데요.”라는 말로 입을 뗐다. 생각해 보니 조금 우스운 말이다. 홈페이지에 조직문화가 문장으로 정리된 것과 지금 내 옆에 있는 동료가 그 문화를 아는 것의 격차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만큼이나 크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조직의 문화를 충분히 공유하지 않은 것이 문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명문화된 조직문화와 실제 우리가 보내는 일상 사이의 격차가 보였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우리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 단어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누구라도 빠지기 쉬운 협곡이 있다. 바로 ‘존재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협곡이다. 그 협곡은 습관적 관행이라는 안개로 뒤덮여 있기에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책 ‘어댑티브 리더십’에서는 조직의 현재 상태는 나름의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일상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조직의 구조, 문화, 관행은 조직을 규정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끈질기게 느껴질 정도로 잘 변하지 않는 이유는 장시간에 걸쳐 서서히 쌓여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각 조직이 보내는 오늘의 질서는 과거의 위기를 넘게 하고 필요했던 변화가 일어나게 했던 일종의 성공 방식으로서, 현재도 매끄럽고 우아하게 작동되며 과거의 수많은 결정의 패턴을 통해 완고하게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책상을 붙이고 칸막이도 없이 일하는 ‘보이게 일한다’라는 오늘의 문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초창기 시절 재택근무와 유연 근무가 기본 값일 때 서로의 업무 흐름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투명함을 합의한 소통 방식이었고, 오픈 된 공간의 코워킹 스페이스의 책상을 나눠 쓰다 보니 발현된 자연스런 구조였다. 새로운 지식을 만들기 위해선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대화가 중요하다는 우리만의 집단 규범은 이 형태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일하는 형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오픈되지 않은 우리만의 사무실을 쓰고 있으며, 유연 근무도 가능하지만 새로 입사한 사회 초년생 구성원들과의 협업을 위해 사무실에 모이기를 힘쓰고 있다. 일의 특성상 집중해서 보고서나 글을 써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마주 보고 있기에 언제든

[우리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국제 보건의 숨은 자랑거리 K-백신 이야기

국제기구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으니, 한 국가의 외교는 그 나라의 문화를 많이 따라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겸손이 미덕이고, 침묵이 금이라고 배운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잘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알리고 포지셔닝 하는 데 여전히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것이 많은데도 깨닫지 못하거나 알아도 남들이 알아주기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자랑스러워해 봄 직한 K-vaccine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또 K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국제사회는 잘 알고 있는 이야기, 바로 콜레라 예방의 숨은 영웅 한국 백신의 이야기입니다. 콜레라는 사실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질병입니다. 깨끗한 물과 위생 시설에 접근하기 어려운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발생해 흔히 ‘후진국 병’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콜레라는 비브리오 콜레라균에 오염된 음식이나 물을 통해 전파되는 급성 설사병입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몇 시간 내로 탈수로 사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특히 5세 미만 아동이 가장 큰 희생자입니다. 게다가 증상이 없는 감염자가 배출한 콜레라균이 환경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습니다. 특히 화장실 같은 위생 시설이 부족한 지역에서 콜레라는 더욱 빠르게 확산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3년 약 54만 건의 콜레라 사례가 보고됐으며 이에 따라 4000명이 넘게 사망했습니다. 주로 아프가니스탄, 콩고민주공화국(DRC), 소말리아 등 분쟁 취약국에서 발생했습니다. 콜레라 감염이 증가하는 이유에는 기후 변화와 국제적 분쟁, 대규모 난민 이동 등의 환경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로 홍수와 가뭄이 잦아지면서 수질 오염 문제가 악화하고, 분쟁 지역에서는 위생 시설과 보건 시스템이 붕괴해 감염의 위험이 커집니다. 예를 들어, 예멘과 같은 분쟁 지역에서는 깨끗한 물과 기본적인 위생 서비스를 전혀 제공받지 못하며 콜레라 창궐은 전쟁의 총탄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콜레라를 예방하고 확산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콜레라 백신입니다. 경구용 백신, 즉 입으로 삼켜 먹는 콜레라 백신이 발병 위험이 지역에 필수적인 예방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콜레라 백신을 전 세계에 독점 공급하고 있는 기업이 한국에 있다면. 콜레라로 죽어가는 개발도상국 아동들을 살릴 수 있는 예방책이 한국에 있다면. 한국이 생산을 멈추면 매년 수천 명의

[지역의 미래] 담당 공무원이 또 바뀌었다고요?

정부나 지자체 공무원들과 일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일이다. 이제 말 좀 통하나 싶으면 담당 공무원이 바뀌어서 새로 호흡을 맞추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 말이 잘 통하면 다행인데 가끔 자신의 고집을 앞세우는 공무원을 만나면 정말 난감하다. 갑자기 사업의 방향이 바뀌고 그동안 쌓은 경험자산이 한순간에 쓸모 없어지기도 한다. 순환근무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부정부패 방지다. 한 부서에서 오래 일하면 유착이 생기기도 하고 제도의 맹점을 이용하기도 쉬워진다. 반대로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한 가지 업무만 하던 사람보다는 여러 업무를 해본 사람의 시야가 넓을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경우가 많아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관점과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행정은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여러 업무를 두루 거친 사람이 조금 더 나은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 인구 감소는 출산, 육아, 교육, 일자리, 주거, 교통, 여가 등 모든 문제가 얽혀 있다. 모든 분야를 근무했던 사람이 이 업무를 맡는다고 해서 모범 답안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 업무만 했던 사람보다는 좀 더 넓은 시야로 정책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부서를 두루 거친 사람도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순환보직으로 몇 년 후면 떠나야 한다. 순환보직이 아니라도 문제다. 어떤 사람도 매번 성공할 수는 없다. 메이저리그의 3번 타자도 열 번 중에 여서 일곱 번은 출루하지 못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순환보직이 아니라 경험자산이 사람에게 축적되는 것이다. 1년이든 10년이든 정책을 실행하면 경험이 쌓인다.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거나 핵심 이해관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어떤 사업이 효과적이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잘 알게 된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떠나면 그동안 쌓은 경험자산도 함께 떠난다. 후임자를 위해 그간의 문서를 잘 정리해서 전달하지만 그것은 기록일뿐 경험자산은 아니다. ◇ 맥킨지의 핵심 자산 ‘지식 DB’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맥킨지 앤 컴퍼니도 유사한 문제를 갖고 있다. 컨설팅 회사의 핵심 자산은 사람이다. 그런데 맥킨지를 비롯한 컨설팅 회사들의 근속연수는 2년에서 4년으로 매우 짧다고 한다.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며 정기적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회사를 나가야 하는 암묵적인 룰도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맥킨지 출신이라면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공익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정책학자이자 데이터 과학자다. 존스홉킨스대 SNF 아고라 연구소에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활용해 미국 시민사회의 현황을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코드 포 아메리카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시빅 테크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했으며, 지금도 미국 정부와 협력해 공공 서비스를 개선하는 다양한 현장 실험(field experiment)을 설계하고 실행한다. 핀테크는 간편 결제와 같은 각종 금융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 기반 서비스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시빅 테크는 이용자가 공공 서비스를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 기반 서비스를 개발한다. 미국에서는 핀테크처럼 시빅 테크도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으며, 관련된 많은 서비스와 단체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코드 포 아메리카는 캘리포니아 저소득층이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정부에 작성해야 했던 온라인 신청서를 근본적으로 개선했다. 이 디지털 정책 신청 보조 도구(GetCalFresh)는 기존에 한 시간 걸리던 식품 할인권(food stamp) 신청서 작성 시간을 평균 10분으로 단축했다. 코드 포 아메리카는 약 200명이 일하는 일종의 대규모 시민 단체로, 미국의 국세청(IRS) 같은 연방정부와 15개 주정부와 협력한다. 필자는 코드 포 아메리카의 캘리포니아, 뉴욕, 콜로라도, 뉴멕시코 담당 데이터 과학자로 활동했다. 지금도 코드 포 아메리카와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긴밀히 연구 협력 중이다. 코드 포 아메리카 외에도 미국 정부 내에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시빅 테크 기관으로는 백악관의 디지털 서비스청(USDS)이 있다. 이 기관은 코드 포 아메리카를 창립한 제니퍼 폴카가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과학기술정책 부문 CTO(차관급)으로 재직하며 설립했다. 디지털 서비스청에는 약 230명이 근무하며, 2014년 설립 이후 지난 10년간 31개 이상의 연방 기관과 협력했다. 필자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2022년에는 한국의 KDI 국제정책대학원 데이터 과학 담당 교수로 1년간 일하며 한국 사회를 관찰하고 경험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을 쓴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데이터 기반 공공 정책을 통해 차별은 줄이고 기회를 늘리는 방법에 대한 이론과 실행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는 공익을 위해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논의가 정부, 학계, 시민사회, 심지어 기업에서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데이터를 논하기에 앞서 ‘공익’이라는 개념 자체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데이터는 도구다. 이 도구를 잘

이호영 십시일방 대표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임팩트 오마카세

오마카세의 사전적 정의는 손님이 주문할 음식을 가게의 주방장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주방장은 손님의 취향, 알레르기, 포만감 등을 고려하여 알맞은 음식을 내어준다. 정해진 메뉴를 제공하는 일반 음식점과 비교했을 때 오마카세는 손님에게 맞춤형 다이닝 경험을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임팩트를 창출하는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것을 이에 대입해 보았다. 먼저 일반 음식점처럼 사전에 정해진 제품·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이 방식은 균질한 제품과 서비스를 많은 사람들에게 스케일업(scale-up)하여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른 방식은 오마카세처럼 상대방의 상황에 적합한 제품/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개인 맞춤형 제품과 서비스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케일딥(scale-deep)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필자는 각각의 특성을 띤 서로 다른 2개의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해 본 경험이 있다. 하나는 ‘십시일밥’이고 다른 하나는 ‘십시일방’이다. ◇ 십시일밥, 사전에 정해진 것을 제공하는 ‘일반 음식점형’ 십시일밥은 취약계층 대학생들에게 식권을 무료로 제공하는 일을 한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취약계층 대학생 1명당 약 20~30장의 식권을 전달한다. 필자가 대표로 있던 기간 동안 약 10만 장의 식권을 전달했으니, 중복 인원을 제외하더라도 2000여 명의 취약계층 대학생에게 도움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십시일밥 식권을 받는 사람들의 삶이 변했나요?’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식권을 신청하신 분들께 식권을 보내드렸을 뿐, 그분들의 삶에 깊이 있는 변화를 일으켰다’고 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 사람의 고된 삶이 식권 몇장으로 인해 나아질 수 없다. 한 끼 식사 걱정을 더는 것 외에 그가 겪을 수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식권을 통해 만들 수 있는 변화의 깊이에 한계를 느끼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것이 십시일밥 사업의 특징이자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단체의 대표로서 필자는 사업에 참여하는 대학교의 숫자를 늘려나가는 일에 다시 집중했다. 십시일밥은 확장을 위한 규격화가 쉬운 사업이었다. 대부분의 대학교와 학생식당이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이었다. 2014년 1개 대학으로 시작한 십시일밥은 3년 뒤 전국 29개 대학에 지부를 두고 퍼져나갔다. 이를 통해 많은 수의 취약계층 대학생들에게 식권을 전달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깊이 다가가지 못한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 십시일방, 상황에 맞는 것을 제공하는 ‘오마카세형’ 필자가 십시일밥을 떠나고 설립한 또 다른 비영리단체인 십시일방은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주거지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