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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가장 큰 이슈는 ‘다문화’ 건강한 사회 통합 프로그램 필요해”

한용외 인클로버재단 이사장 기업 사회 공헌과 사회복지 쪽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한용외’ 전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이었다. 삼성재단과 삼성그룹 전체의 사회 공헌을 총괄했던 사람. 될성부른 사람은 확실히 키워주고 보수적인 삼성 조직문화 속에서도 아니다 싶으면 ‘No’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하지만 인터뷰는 녹록하지 않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얘기할 때 사회 공헌은 ‘책임’이 아니라 ‘재량’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당을 위한 정치를 하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무엇보다 인터뷰를 위한 시간 확보가 쉽지 않았다. 사재(私財) 10억원을 기부해 만든 다문화지원재단 인클로버(www.inclover.or.kr) 활동과 사회복지를 주제로 한 박사 논문 집필, 최근 임명된 중앙국립박물관 이사장 역할까지 하느라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고 있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과천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다문화 캠프 현장과 9일 집무실에서 두 번에 걸쳐 진행됐다. 다문화는 인생 2막을 시작하는 한 이사장에게 큰 화두(話頭)로 보였다. ―다문화 지원재단을 만드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앞으로 5~10년 이후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일지를 고민해보니 다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조직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해결하려는 재단이 필요했지요.”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에서도 다문화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다문화 프로그램은 한글과 한국 문화를 중심으로 한 주입식 통합 프로그램입니다. ‘한국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고유성을 인정해줄 때 통합 속도가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국의 책을 읽고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통합 프로그램이

희망 굽는 냄새 솔솔~ “우리도 제빵왕 될래요”

지적 장애인 희망터 ‘빵집’ 2004년 ‘빵 굽는 친구들’서 시작 2008년 장애인 고용위해 ‘빵집’ 오픈 “주문하시겠어요?”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앞치마를 받쳐 입은 종업원은 주문서 너머로 메뉴를 고르는 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뭘 고를까 망설이며 커피를 달랬다가 주스는 뭐가 있느냐고 묻는 기자를 보고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인다. 부산 황룡산 자락의 조용한 카페 ‘빵집'(Ppangjip)에서 서빙을 맡은 방신영(32)씨는 3급 지적 장애인이다. 신영씨가 장애등급을 받은 것은 28살 겨울 무렵이다. 가족들이 신영씨에게 지적 장애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가급적이면 장애등급을 받지 않고 살았으면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받았던 따돌림, 간신히 구한 아르바이트에서의 해고를 통해 장애라는 낙인이 주는 아픔을 이미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빵집’에 다니면서부터는 신영씨의 얼굴 표정이나 마음이 달라졌다. 주문을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기자 역시 신영씨가 이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영씨와 함께 서빙을 하는 혜승(21)씨 역시 3급 지적 장애인이다. 아이큐가 50~70 사이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지능 수준이다. 사회에 적응하는 교육이 가능한 등급이다. 혜승씨가 ‘빵집’에서 번 돈과 비슷한 지적 장애가 있는 언니가 번 돈을 합쳐 장기 실직자인 아버지, 소아마비인 어머니 4인 가족의 생활을 꾸린다. 작은 체구에 귀염성이 있게 생긴 혜승씨는 직장을 좋아한다. 직장을 무척 좋아해서 같이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이 주말엔 나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장애인들에게 부당 노동을 시킨다고 혼날 일이라는 것이다. ‘빵집’은

“올 추석엔 이웃을 행복하게 만드는 ‘착한 선물’ 하세요”

#Case 1. 근로복지공단은 추석을 앞두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착한 선물’을 준비했다. 연해주 현지에서 재배한 유기농 콩으로 만든 청국장 환 ‘청시’ 세트다. 청시 세트를 만드는 ‘바리의 꿈’은 소련 붕괴 후 연해주로 귀환한 고려인 동포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국내 소비자에게 건강한 상품을 제공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기업이다. 근로복지공단 총무부 백세현(44) 차장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이익을 환원하는 사회적 기업의 취지가 좋아 늘 돕고 싶었는데, 마침 추석용 선물로 적합한 제품이 있어 구입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Case 2. 리조트그룹 PIC코리아도 ‘아름다운 가게’에서 구입한 공정무역 커피와 머그잔을 VIP 고객과 협력사에 선물할 계획이다. PIC코리아 이혜령(29) 이사는 “PIC 창립자인 척피니는 20년 동안 40억달러(약 4조8000억원)를 기부한 나눔 실천가”라며 “이런 뜻을 바탕으로 착한 제품을 선물하면 받는 사람의 부담도 적고 기분도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착한 선물’은 사는 사람의 기분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받는 사람, 만들고 유통하는 사람 모두를 풍요롭게 만든다. 제품 하나가 팔릴 때마다 어려운 이웃들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기 때문이다. 착한 소비 또는 윤리적 소비는 당장의 경제적 이득보다 장기적으로 이웃과 환경, 사회를 고려하는 소비를 말한다. 친환경 제품, 사회적 기업 제품, 공정무역 제품, 기부 연계 제품 소비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생협연대 신복수(53) 대표는 “추석에 착한 선물을 받으면 우리 주변뿐만 아니라 지구촌 이웃에 대한 생각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나은미래’팀은 이번 추석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착한 상품’을 찾아봤다. 추석에 가장 많이 팔리는 선물은 제수용품으로

“모바일 상담 등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공헌에 힘쓸 것”

SK텔레콤 남영찬 부사장 인터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사회공헌을 하는 것과,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일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이 기업의 업무와 연계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지만, 실제 성과가 잘 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SK텔레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비즈니스의 ‘본질’인 IT 기술을 활용해 사회에 기여하는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하다. 특히 최근 온라인을 통한 기업 사회공헌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SK텔레콤의 모바일 사회공헌 프로그램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SK텔레콤의 CSR 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남영찬(52·사진) 부사장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 나눔 문화 확산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편집자 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모바일 상담이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한 해 문자 상담이 10만건을 넘었습니다. 가출한 청소년이 전문 상담사와의 문자 대화를 통해 집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삶을 다시 산 경우도 있습니다. 가출한 청소년들은 처음 하루 이틀이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들을 위한 안전망이 없습니다. 저희가 하는 사회공헌 활동이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전보다 사회 문제가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단순히 돈을 주거나 물품을 주는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기업 사회공헌 역시 전략적이고 효율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필요로 하고,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뉴스 읽어주는 휴대폰 덕에어디서든 신문을 듣지요”

ICT를 통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서 경기도 고양시 화정까지 가는 지하철 안. 아침·저녁으로 2시간씩 노광호(60)씨는 조선일보를 ‘듣는다’. 일간지, 도서, 복지재활정보 등의 콘텐츠를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애플리케이션인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 덕분이다. SK텔레콤은 지난 7월, 이 애플리케이션을 탑재한 시각장애인 전용 단말기 5000대를 저소득층 시각장애인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시각장애인 전용 단말기는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 애플리케이션 외에도 문자 메시지를 읽어주는 TTS(Text To Speech) 기능, GPS 위급알림 기능 등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화 기능을 갖추고 있다. 노광호씨는 이 단말기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노광호씨는 다섯살 때 천연두를 앓다가 시력을 잃었다.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1급 중증 시각 장애인이다. 어린 시절 공부하기도, 책을 읽기도 만만치 않았지만 ‘지식에 대한 열정’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어쩌면 배움이 쉽지 않았기에 더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50세가 넘어 국제법무 전공 석사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 새로운 이슈나 트렌드에 늘 관심이 많았다. “예전에는 유선전화로 제공되는 신문 읽기 서비스를 들었습니다. 매일 두 시간씩 꼬박 집에 앉아 무거운 전화기를 들고 신문을 들었지요. 한번 듣고 나면 어깨와 팔이 저려오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고 오가는 길 어디에서나 쉽게 신문을 듣는다. “회사 동료들이 놀라워해요. 불빛조차 안 보이는 제가 오히려 요즘 뉴스를 다 꿰고 있으니까요.” 큰 소리로 웃는 노광호씨에게서 뿌듯함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최근 정보통신기술(ICT :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을 이용한 사회공헌 활동이

재미있는 한국 구호단체 60년 小史

털모자·염소·빵 저금통…다양한 아이디어로 빈국 도와 다큐멘터리 : 한국의 NGO들은 후원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원 국가의 실상을 알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한국 구호 개발의 초기, 한국을 위해 모금했던 NGO들도 우리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다. 1959년 ‘세이브더칠드런’과 ‘옥스팜’은 ‘먼 곳에서의 울음(A Far Cry)’을 제작했다. 스테판 피트씨가 메가폰을 잡은 이 흑백 다큐멘터리는 39분52초 동안 고수자·한창수 등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대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먼 곳에서의 울음’은 1959년 영국 BBC 방송국을 통해 부활절 일요일에 방영됐다. 털모자 뜨기 : 세계적으로 폐렴이나 말라리아, 설사 등 예방이 가능하고 쉽게 치료가 되는 병으로 사망하는 5세 미만 영유아는 500만명이다. 모자 뜨기 캠페인은 폐렴이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인 저체온증을 막아줄 수 있는 털모자를 떠서 보내주는 캠페인이다. 모자 뜨기의 시초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한 지역 신문사로 “세이브더칠드런 기금을 위해 담요와 아동의 옷을 떠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가 배달됐고, 그 이후 며칠 만에 100여명의 사람들이 지역 교회와 학교의 도움으로 털실을 얻어 모자와 담요를 뜨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1993년 12월에 영국으로부터 직접 손으로 뜬 담요 450상자를 기증받아 부산 시내에 있는 육아시설과 양로시설 등 40여개 시설에 분배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염소 보내기 사업 : 저개발 지역에 염소나 암소를 보내는 것은 지역 빈곤문제 해결에 효과적이다. 염소는 새끼를 낳고 그 새끼는 다시 새끼를 낳기 때문이다. 일종의 종잣돈이 마련되는 셈이다. 염소가

70년대까진 도움 없인 못 사는 나라… 88올림픽 이후 도움 주는 나라로

6·25전쟁 후 국제 NGO에서 아동구호 손길, 60~70년대엔 지역·가정 개선사업으로 전환, 90년대, 원조 ‘홀로서기’… 토종 NGO 생겨나… ‘탯줄도 잘리지 않은 아기들이 밤새 항구에 버려져 있어요.’ 6·25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대 초반.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사무소 직원이었던 박미자씨가 세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쓴 글이다. 전쟁 기간 중 남쪽 사망자만 50만명을 넘었고, 행방불명된 사람을 합하면 그 숫자는 80만명을 넘어선다. 주택 61만채가 폐허가 됐고, 76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한국전쟁피해통계집). 해방 직후 어렵게 지켜온 산업 기반시설은 모두 붕괴돼 재건이 불가능해 보였다. 공업시설의 43%, 발전시설의 41%, 철도 312km가 파괴됐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 하지만 가장 힘든 이는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아동의 피해가 컸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가족과 헤어진 아이만 10만명에 달했다. 남북한 전체 인구가 3000만명 남짓했던 시절이다. 이런 처참한 현실 속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재건의 씨앗을 마련한 이들이 바로 국제 구호단체들이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한국의 상황을 해외에 알리고 적절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의 거리에서 만난 거지 소년이 들고 있던 깡통과 한국에서 찍은 영상을 시애틀의 교회에서 보여주며 한국 돕기를 제안했던 에버렛 스완슨 목사 같은 이도 있었고, 부산 용주동에 방 2개짜리 사무실을 구하기 전까지 길거리에서 잠을 잤던 로버트 세이지씨 같은 이도 있었다. 구호사업의 초기인 1950~60년대에는 아동 구호사업이 구호 NGO의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세이브더칠드런’ 영국·미국 지부는 매년 3500명의 한국 아동들을 후원했고, ‘플랜’의 후원자들은 한국의 아동들에게 쌀·밀가루와 서양 의복 등을 보내왔다. 당시 문서에는 “아이들이 처음에 서양식 옷을

‘한강의 기적’ 뒤엔 ‘국제 원조’ 디딤돌 있었다

과거 한국의 복지를 책임졌던 부서는 보건사회부다. 보건위생이나 방역, 구호, 아동, 가족계획과 관련한 사무를 맡던 보건사회부는 1955년에 설치되어 1994년에 보건복지부로 개칭됐다. 전쟁 직후 보건사회부만의 힘으로 국내의 가난과 질병을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국제구호NGO는 든든한 파트너였다. NGO의 활동이 아동결연사업에서 가정개발사업이나 지역개발사업으로 확장되던 시기인 1960년대에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1961년 보건사회부 예산은 9억5000만원인 데 비해 같은 해 해외에 기반을 둔 원조단체의 전체후원금(외원전체액)은 20억5500만원으로 보건사회부 예산의 두 배를 웃돈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은 1만원. 국가도 개인도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엔 버거웠다. 60년대가 저물어가는 순간까지 외원전체액과 보사부예산은 한국의 빈곤을 해결하는 데 비슷하게 힘을 모았다. 1960년부터 1969년까지 보사부 예산의 합계는 416억8200만원, 같은 기간 외원전체액은 384억8800만원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사이 1970년 1인당 국민소득은 9만원, 1960년에 비해 9배가 늘었다. 보건사회부 예산이 외원전체액을 크게 넘어선 것은 1970년부터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보건사회부 예산은 426억8900만원으로, 외원전체액 148억5500만원에 비해 3배가량 많은 액수다. 한국의 경제력이 성장하면서 해외의 원조도 줄거나 중단되었고, 그 사이 국민 개개인도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1980년 1인당 국민소득은 100만원, 10년 전인 70년대에 비해 다시 10배가 뛰었다. 1990년 1인당 국민소득은 435만원, 세계가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정부가 힘들 때 그 뒤를 지켜준 원조단체의 노력이 있었다. 오늘날 국내의 구호단체들은 과거의 우리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9년 한국구호단체 중 상위 5개 단체가 확보한 정기기부 회원 수는 88만명, 모금액은 2400억원이다. 한국의 모금과

성공한 1인 기업가 선배가 성공 노하우를 알려 드립니다

선배 1인 창조기업가의 재능 기부 클래스 자신의 지식·경험·기술 등을 보다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비즈니스 성과를 창출하는 ‘1인 창조기업’의 수가 지난해 20만 개를 넘어섰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경제인구의 1%를 차지하는 숫자입니다. 중소기업청은 1990년대 벤처기업이 그러했듯이, 1인 창조기업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자 합니다. 김동선 중소기업청장은 “1인 창조기업 육성법을 제정해 1인 창조기업을 차세대 성장동력의 원천으로 키우겠다”며 적극적 의지를 비치기도 했습니다. 이에 중소기업청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성공한 선배 1인 창조기업가들이 그들의 아이디어와 성공 노하우를 예비 창업가에게 나누어주는 ‘나눔의 장’을 마련합니다. ‘성공한 선배 1인 창조기업가들의 재능기부’클래스입니다.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을 제작지원하였던 주빈커피의 송주빈 대표, 홍대 명물국수 요기 배태진 대표, 슈가크라프터 이민선 대표, 출판디자이너 임경아 대표 등 성공한 선배들이 재능과 노하우를 나누기 위해 나섭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가진 대학생과 창업을 준비하는 예비 1인 창조기업가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호응 부탁드립니다. ●날짜: 9월 19일·20일 ●장소: 선배 1인 창조기업가들의 사업 장소 등 생생한 현장 ●신청기간: 9월 14~17일 ●신청방법: 이메일 csmedia@chosun.com (참여의사와 간단한 사연,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추첨을 통해 개별적으로 연락 드립니다) ●참가비: 무료 ●문의: (02)6272-3027

[Cover story] 산모 생존 戰場, 잠비아를 가다

양수 터져도 자전거로 이동… 세 쌍둥이 모두 잃어… 산모 10만명당 830명 사망 우리나라 59배에 달해 구급차 요청 이틀 후에 도착 이동 중 산모·아이 숨져 2009년 9월 후원 시작돼 올 3월 다섯번째 보건소 지어 건기의 끝자락에 다다른 잠비아에서는 조금만 걸어도 흙먼지가 날렸다. 수도 루사카(Lusaka)에서 서쪽으로 165㎞ 떨어진 뭄브와(Mumbwa) 음푸수(Mpusu) 보건소 근처에서 만난 조세핀(53)은 흙구덩이 속에 앉아 딸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말했다. 22세였던 그녀의 딸 루스는 세 번째 아이를 낳다 지난 7월 말라리아로 배속 태아와 함께 숨졌다. “죽기 이틀 전에 머리가 아프다고 근처의 보건소를 갔어요. 말라리아 진단을 받고 더 큰 병원으로 가기 위해 구급차를 요청했는데 오지 않았죠.” 보건소보다 한 단계 높은 의료기관인 뭄브와 지역병원(district hospital)에는 두 대의 구급차가 있다. 하지만 조세핀이 구급차를 불렀을 때 한 대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아동보건주간’ 캠페인 때문에 수도 루사카로 차출됐고, 나머지 한 대는 의료 물품을 실어 나르느라 자리를 비웠다. 루스는 그 다음 날 구급차가 오는 도중 숨을 거뒀다. 조세핀은 “내 딸과 손녀를 앗아간 말라리아가 두렵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뭄브와의 또 다른 카인두(Kaindu) 보건소에서 만난 로다(50)씨는 2006년 함께 살던 조카 손녀를 잃었다. 16세의 나이로 임신해 첫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직계가족이 모두 죽어 10년 넘게 친손녀처럼 길렀던 아이였다. 그녀는 “잠비아에 에이즈 환자가 많아 일반 보건소에서는 피 보관이 안 되는 걸 몰랐다”며 “더 큰 병원에 갔어야 했다”고

[NGO 소식] 파키스탄 홍수 피해 모금 캠페인 외

파키스탄 홍수 피해 모금 캠페인 지난달 29일, 파키스탄에서는 하루 반나절 만에 300㎜ 이상 최악의 열대성 호우가 쏟아지며 4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번 대홍수로 전기와 수도, 가스공급, 통신 등 사회기반 시설이 모두 마비됐으며 집이 파괴되고 생계 수단이 사라졌다. 굿네이버스는 긴급 지원을 시작하며, 홍수 피해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돕기 위한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홈페이지(www.gni.kr) 온라인 모금 혹은 전화 모금(1599-0300)으로 참여할 수 있다. 유니세프 후원하는 ‘사랑의 마라톤’ 유니세프를 후원하는 경기평화통일마라톤대회가 9월 12일(일) 오전 9시 임진각 및 평화누리에서 열린다. 이 대회는 참가자들이 1㎞를 달릴 때마다 100원의 후원금이 유니세프에 전달되는 ‘사랑의 마라톤’으로, 모인 기금은 지구촌 어려운 어린이들을 위해 쓰인다. 공식 홈페이지(www.peacemarathon.org)와 경기관광공사 포털사이트(www.ethankyou.co.kr)에서 선착순으로 참가 접수를 한다.

평화·화해에 대해 토론… ‘대화’로 허문 불신의 벽

케냐 평화 주도한 자반 아푸두 2007년 12월 27일 열린 케냐의 대통령 선거는 온 나라를 유혈사태의 소용돌이로 밀어넣었다. 개표 과정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이 일며, 두달에 걸쳐 1500명이 죽고 30만명이 집을 잃었다. 폭력과 증오의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피를 흘렸던 도심 한가운데서 평화를 위한 재건의 외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반 아푸두(30)씨가 2009년 주도한 케냐청년평화회의(Kenya Youth Peace Summit)가 48개 부족의 200명과 함께 포럼을 열고 평화와 화해에 대해 토론하며 갈등이 해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분쟁 해결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아푸두씨를 지난 18일 부산 인디고 유스북페어 현장에서 만났다.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친구가 친구를 죽이는 상황들이 펼쳐졌습니다. 아무도 대화를 하려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들만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불과 2년 전에 지켜보았던 참상들을 떠올리는 자반씨는 힘든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좀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2007년 12월 30일부터 폭동이 있었습니다. 이 폭동이 격화되던 2008년 초, 주변 친구들과 연속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우리가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지금 수많은 폭력이 일어나고 있지만, 매우 많은 사람들이 폭력이 멈추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자반씨와 친구들은 케냐청년평화회의(Kenya Youth Peace Summit)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폭력사태가 정점에 달했던 2008년 1월과 2월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평화를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자반씨와 함께 토론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청년들이 주축이 된 이 모임은 자반이 활동하고 있던 SOS-Childrens Villages라는 NGO는 물론, SOS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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