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희망 굽는 냄새 솔솔~ “우리도 제빵왕 될래요”

지적 장애인 희망터 ‘빵집’
2004년 ‘빵 굽는 친구들’서 시작 2008년 장애인 고용위해 ‘빵집’ 오픈

“주문하시겠어요?”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앞치마를 받쳐 입은 종업원은 주문서 너머로 메뉴를 고르는 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뭘 고를까 망설이며 커피를 달랬다가 주스는 뭐가 있느냐고 묻는 기자를 보고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인다. 부산 황룡산 자락의 조용한 카페 ‘빵집'(Ppangjip)에서 서빙을 맡은 방신영(32)씨는 3급 지적 장애인이다. 신영씨가 장애등급을 받은 것은 28살 겨울 무렵이다. 가족들이 신영씨에게 지적 장애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가급적이면 장애등급을 받지 않고 살았으면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받았던 따돌림, 간신히 구한 아르바이트에서의 해고를 통해 장애라는 낙인이 주는 아픔을 이미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빵집’에 다니면서부터는 신영씨의 얼굴 표정이나 마음이 달라졌다. 주문을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기자 역시 신영씨가 이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빵집3의 빵은 맛있고 깔끔했다. 반죽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 기울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부산진구 전포종합사회복지관 안에 둥지를 튼 '빵집'은 즐거운 직장이며 훌륭한 카페다.
빵집3의 빵은 맛있고 깔끔했다. 반죽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 기울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부산진구 전포종합사회복지관 안에 둥지를 튼 ‘빵집’은 즐거운 직장이며 훌륭한 카페다.

신영씨와 함께 서빙을 하는 혜승(21)씨 역시 3급 지적 장애인이다. 아이큐가 50~70 사이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지능 수준이다. 사회에 적응하는 교육이 가능한 등급이다. 혜승씨가 ‘빵집’에서 번 돈과 비슷한 지적 장애가 있는 언니가 번 돈을 합쳐 장기 실직자인 아버지, 소아마비인 어머니 4인 가족의 생활을 꾸린다. 작은 체구에 귀염성이 있게 생긴 혜승씨는 직장을 좋아한다. 직장을 무척 좋아해서 같이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이 주말엔 나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장애인들에게 부당 노동을 시킨다고 혼날 일이라는 것이다.

‘빵집’은 신영씨나 혜승씨 같은 지적 장애인들을 고용한 카페이면서 부산의 예비 사회적 기업이다.

2004년 전포종합사회복지관이 지적 장애인들에게 제과제빵 수업 ‘빵 굽는 친구들’을 제공하며 그 싹이 텄다. 아이들은 재미있어 하며 집중했지만, 정작 과정을 수료해도 제과점이나 제빵 회사로 가기는 어려웠다. 학교라는 보호시스템에 있던 장애인들이 학교를 벗어난 순간 겪게 되는 혼란과 어려움이 반복된 것이다.

전포종합사회복지관장인 권승(46) 동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장애인이 성인이 되는 순간 그들은 자립을 준비해야 합니다. 영원히 학교나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성인 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아요. 그걸 절감했습니다.” 고민 끝에 나온 아이디어가 ‘빵집’이라는 제과점이었다.

“어떻게든 일자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직장에서 끊임없이 교육이 이루어져야 했고요. 또 비장애인과의 적당한 교류도 있어야 했습니다.”

지적 장애인 8명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준 빵집은 이렇게 해서 2008년 9월 문을 열었다. 앙금빵이 500원, 피자빵이 700원인 제과점이다. 과연 잘 될까 하는 염려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시설이라고 하면 혐오시설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생이나 청결문제에 더욱 신경을 썼다. 밖에 나갔다가 오면 무조건 손을 씻도록 교육을 했고, 누구든 빵 공장의 위생 환경을 보고 싶다고 하면 공개해서 보여줬다. 음식의 맛과 질도 소홀히 생각하지 않아서 빵 제작을 도와줄 비장애인 2명을 채용해 제품의 질이 유지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그런 노력의 덕인지 ‘빵집’이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보험업에 종사하시는 아주머니 5인조가 차 한 대를 타고 와서 커피를 마시며 한참을 얘기하다 가기도 하고 복지관에서 수업을 듣는 아이들의 엄마들이 모여 아이들 교육을 주제로 수다 판을 벌이기도 했다. 한 달 매출 450만원에 200만원 정도의 수익이 나서 직원들에게 20만원에서 30만원씩 노동의 대가를 줄 수 있었다. 2009년 7월엔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등록해서 8명의 지적 장애인과 3명의 비장애인 모두에게 4대보험과 퇴직금을 빼고도 85만8990원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다. 감동을 주는 순간이었다. “근로기준법은 지적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는 최저임금제도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줄 수 있게 되었지요.”

이러는 사이 진짜 변화가 일어났다. ‘빵집’에서 일하던 지적 장애인 중 2등급 판정을 받았던 4명이 3등급으로 재판정을 받았다. 처음엔 부모들이 집에서 데려다 주고 데리러 와야 했던 직원들이 이제는 자기들끼리 출퇴근을 하고 주말엔 영화를 보러 가거나 소풍도 나간다.

“지적 장애인들이라고 영원히 같은 상태에 있는 게 아닙니다. 서빙이나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사회성을 기르다 보면 호전되는 겁니다.”

‘빵집’의 태동기부터 이들과 함께 했던 이수정(33) 가족복지팀장은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자립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빵집’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돕겠다는 사람도 나서고 있다. 병원 매점에 빵을 납품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가끔은 단체 주문도 들어온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직원들의 기술이 수요에 맞춰서 빵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지 않은 까닭이다.

“현재의 숙련도로는 하루 평균 250개 정도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체 주문이 들어오면 100개 정도 추가 제작도 가능하죠. 마케팅이 더 되려면 직원들의 기술력이 향상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사회적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끝난 후의 대책을 세우는 것도 고민이다.

권승 교수는 “고생스럽더라도 방법을 찾겠다”고 말했다. “더 많은 성인 지적 장애인들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벤치마킹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혹시 장애인들의 삶이나 장애인시설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것인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나 권승 교수는 딱 잘라 말했다.

“여긴 장애인시설이 아닙니다. 빵집이에요. 맛좋고 싼 빵을 예쁜 카페에서 부담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고대권 기자

신보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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