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하루에 한 번씩 착한카드 사용 이게 바로 나눔이죠”

변정수의 ‘착한카드로 실천하는 하루 1가지 착한 일’ 대한민국 국민의 1%가 참여해 매일 커피 한 잔 착한카드 사용하면, 일년에 270억원이 기부되는 효과 “정말 포인트가 다 기부돼요? 신용카드를 정말 많이 쓰는데, 포인트를 써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하도 쓰지 않아서 소멸한 적도 많고요. 그런데 굳이 뭔가 비용이나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쉽고 편하게 기부할 수 있다니 너무 좋지 뭐예요. 제가 그래서 인터뷰하겠다고 한 거예요.” ‘착한카드를 발급만 해도 연회비와 포인트가 기부된다’는 설명에 배우 변정수(37)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변씨는 지난 2003년 3월, 국제구호개발NGO 굿네이버스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9년째 나눔 활동 중이다. 2년 전부터는 남편 류용운(44)씨와 두 딸 채원(14), 정원(4)과 함께 온 가족이 함께 국내외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온 가족이 함께 나눔 활동을 펼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평소 TV 드라마에서 봐왔던 대로 큰 목소리, 다소 빠른 말투, 시원시원한 성격의 변씨는 나눔 활동도 화끈했다. “6년 전부터 해외봉사를 꾸준히 해왔어요. 그때마다 때로는 마음이 아파서, 때로는 정이 들어서, 직접 밥을 해준 적도 있고, 함께 물을 나르기도, 벽돌을 나르기도 했죠. 그러면서 ‘이렇게 한 번 찾아가 도와주는 것 말고 계속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맘(Mom) 프로젝트’를 굿네이버스와 함께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이름인 ‘맘(Mom)’은 영어로 ‘엄마(mom)’를 뜻하기도 하고, 우리말의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두 아이의 엄마다 보니, 엄마의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조금씩 내 아이뿐만 아니라 남의

[Cover story] 세계 Top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⑩ ‘하갈(Hagar)’ 설립자 피에르 타미

“머리 아닌 가슴으로 운영”… 거리의 아이들을 ‘꿈꾸는 아이’로 미소년 소팟(Sophat)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바로 부엌이다. 채소를 다듬고 잘게 써는 일부터 고기를 알맞게 구워내는 일까지 다 그의 몫이다. 소팟과 함께 일하는 다른 요리사들은 “요리실력만 좋은 게 아니라, 성격도, 태도도 너무 좋은 친구”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자신에 대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소팟은 “너무 행복하다”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삶이었어요.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거리의 아이로 자랐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쓰레기를 뒤지며 간신히 굶어 죽지 않는 삶을 살았죠.” 꿈꾸는 일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던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07년 ‘하갈(Hagar)’을 만난 이후다. ‘하갈’은 아동 성매매, 가정폭력 등으로 상처 입고 버려진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쉼터다. 직업훈련, 사회훈련을 위해 출장요리 업체 ‘하갈 케이터링’ 같은 사회적 기업도 운영한다. ‘하갈’은 당시 소팟에게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거리의 아이였던 소팟에게는, 재료를 다듬는 즐거움도, 음식을 만드는 흥분도, 손님이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닦는 보람도 다 처음이었다. 직업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팟은 현재 다른 레스토랑에서 정식 요리사로 일한다. 프놈펜에 위치한 ‘하갈’은 이처럼 가장 사랑받아야 할 가정에서 버림받은, 또는 상처를 받은 이들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곳이다. 집에 감금되어 남편에게 매일 폭행을 당하다 구출된 젊은 여성, 가난 때문에 고작 300달러에 팔려가 아동 성매매에 수년간 희생되다 탈출한 소녀 등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하갈’을 찾는다. 지난 15년간

[Cover story]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꿈꾸는 소녀 은진이

“생활비 때문에 전단 돌리지만 괜찮아요, 제겐 꿈이 있으니까요” 굳세어라, 은진아 가야금 열두 줄 위로 오른손이 춤을 췄다. 왼손은 천천히 현을 짚었다. 구성진 가야금 가락에 맞춰 열다섯 소녀 은진(가명)이는 가야금병창곡 ‘고고천변’을 불렀다. ‘고고천변’은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곡 중 하나로, 자라가 용왕의 약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나왔을 때 처음 본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곡이다. 맺고, 풀고, 꺾는 판소리 가락 속에 은진이는 어느새 자라가 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뭍에 오른 자라처럼 목소리에 어떤 경이로움이 묻어났다. “무대가 너무 좋아요. ‘우리 것’인 전통 음악과 한복도 좋고요.” 은진이는 잇달아 네 곡을 부르고서야 무대에서 내려왔다. 숨이 차오를 법도 하건만,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은진이가 ‘가야금병창’을 처음 배운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방과후교실’에서였다. 일주일에 두 번 1시간씩 배우는 게 전부였지만 처음부터 가야금병창에 푹 빠져들었다. 소질도 빼어나 1년 4개월 만에 전남도지회 주최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개인 일등을 차지했다. “대회에서 입상한 후에 가야금병창을 평생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는 내내 ‘더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요.” 당시 어려운 집안형편을 몰랐던 은진이는 ‘레슨받고 싶다’며 엄마를 졸랐다. 은진이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부모님에게 “은진이는 정말 소질이 있다”며 “레슨비를 조금만 받아도 좋으니 꼭 가르쳐보고 싶다”고 말했다. 은진이는 결국 1시간에 5만원을 내고 다른 친구들보다 저렴하게 개인 레슨을 받게 됐다. 친구들이 방과 후에 분식집에 들러 수다를 떨며 놀 때 은진이는 밥도 거르며 연습을 했다. 개인 레슨에서

[Cover story] “돈 한줌 쥐여주기보다, 자신의 지역 지켜낼 ‘사람’에 집중”

이성민·김창숙 캄보디아 기아봉사단 요즘이 캄보디아의 1년 중 가장 시원한 때라고 했는데,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넘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3시간여를 포장도 안 된 붉은 흙길을 달렸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햇빛 속에 꼼짝없이 앉아 있다 보니, 온몸은 땀으로 젖고 속은 메슥거렸다. 수도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쭘끼리’군(郡)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쭘끼리’라는 이름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산악지대와 밀림지대가 많은 이곳은 캄보디아에서도 특히 눈물과 상처가 많은 지역이다. 게릴라전을 펼치기 좋은 지형 탓에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킬링필드’로 대변되는 학살과 내전을 1998년까지 겪었다. 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무너지면서 일부 군대가이 지역 산악지대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모든 집이 가족을 잃거나 장애인이 된 식구를 끌어안고 산다. 이 땅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부터 이 먼 거리를 쉼 없이 왔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기아대책에서 15년 전 캄보디아 기아봉사단으로 파견한 이성민(53)·김창숙(48) 부부다. “당시만 해도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인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6살·3살의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캄보디아에 왔습니다. 긴급구호 활동을 펼치느라 항상 위험한 곳에 있으면서 많이 용감해졌죠, 뭐.” 이성민 씨는 국내에서 긴급구호, 국제개발 활동 자체가 없었던 1989년, 해외 원조를 목적으로 세운 기아대책의 1호 간사이자 긴급구호 활동가다. 대한민국표(表) 1세대 해외 긴급구호 활동가인 셈이다. “그 시절 이 지역은 외부와의 왕래도 거의 없었어요. 먹을 것도 부족한 형편이니

[Cover story] 인터뷰―월드비전 한국 박종삼 회장 “우리의 나눔은 개미군단의 승리이자 생명 나눔”

아동 결연사업 규모 세계 4번째짧은 역사 속 ‘기적’의 성적모금이 가장 잘된 시기는 IMF 때”우리는 충분히 스스로를자랑스러워할 자격 있어” 전쟁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극한의 굶주림과 공포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이뤄졌던 때가 1950년, 6·25전쟁 이후다. 당시 한국 거리에는 굶고 병든 아이들이 넘쳤다. 전쟁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시절. 커다란 트럭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아이들의 시체를 보고, ‘어린 생명을 돕자’는 구호단체가 생겨났다. ‘한국 월드비전 60년, 세계 월드비전 60년’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했다.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월드비전 박종삼(75) 회장도 1950년 그 추운 겨울을 ‘거리의 소년’으로 지독하게 났다. “길에서 잠자며 며칠 굶주리고 나니, 지나가는 사람 주머니에서 동전이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고 했다.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도와줄 수 있으려면,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깨달았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았고, 그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람들에게 보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와 진료 봉사에 나섰고, 무의탁 청소년들을 위한 마을을 세웠다. 20년 넘게 교수로도 봉직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쉼 없이 달려온 시간들. 그는 “학교 정년 퇴임식 날, 비로소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월드비전 이사들이 찾아왔다. 그간 쌓은 모든 지식과 네트워크를 월드비전의 성장을 위해 쏟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완고하게 거절하는 저에게 한 분이, 얼마 안 있으면

[Cover story] 르포―공정무역 현장을 가다<네팔>

불가촉천민(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 탄다는 최하층 신분), 홍차밭에서 꿈과 희망을 키운다 칸첸장하홍차농원 불가촉천민 등 소외계층 고용…자녀 등록금 등 복지 지원도 ‘아름다운 가게’서도 홍차 판매… 공정무역 차 많이 마실수록 더 많은 일자리 줄 수 있어 해발 1600미터, 히말라야 칸첸중가 기슭에서는 산 아래 마을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풀숲 사이로 난 좁은 비탈길을 따라 15분을 걸어 오르자 작은 흙집 10여 채가 언덕길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지어져 있었다. ‘네팔리’족의 마을이다. ‘네팔리’족은 신분제도인 카스트에서 ‘스치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불가촉천민이다. 법률상으로는 1963년 신분 제도가 폐지됐지만, 이들과 말을 섞거나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 꼭대기 집에 사는 남 마야(32)씨도 평야 지방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해 7년 전 이곳으로 왔다. 병원에 가지 못해 갓 낳은 아이를 셋이나 잃은 뒤였다. 소작농으로 일하던 남 마야 씨의 남편은 결국 2년 전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남 마야씨는 “5살 아들이 아빠를 찾을 때면 눈물이 난다”면서도 “한 달에 250루피(3500원)인 아이 교육비를 대려면 남편이 타지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네팔에서는 한 해 30만명이 이주 노동자가 되어 고국을 떠난다. 남 마야씨에게 가장 부러운 사람은 이웃 주민인 발 마두르(37)씨다. 그 역시 아무 가진 것 없이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공정무역단체인 칸첸장하홍차농원(KTE)에서 일하게 된 뒤로 집과 땅이 생겼다. 안정적인 수입 덕분이다. 경비원으로 일을 시작한 발 마두르씨는 어깨너머로 일을 배워 지금은 차 덖는 기계 관리를 한다. 홍차농원 관리소장인 딜리 바스코타(56)씨는 “불가촉천민이지만 눈썰미가 뛰어나고 일을 잘해

[Cover story] [아동 학대 현장 동행 르포] “아빠가 칼로 찌르려…집에 다시 가기 싫어요”

“아빠가 밥통으로 동생 때리고 절 안고 칼로 찌르려고 했어요 보호 시설로 가고 싶어요” ‘네 자식이나 잘 키워라…’온전히 민간에게만 맡겨져 권한·존중은 찾아볼 수 없어 공권력에 의해 조사·보호되는 선진국과는 큰 차이 보여 “출동합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긴급 구호차량에 올라타면서 경기도아동보호전문기관의 김경희(33) 상담팀장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 학대와 신체 학대 두 건의 신고가 들어온 참이다. “동네 사람이 12살 여자 아이를 성추행했다는 신고예요. 가해자에 대해선 이미 조치했지만 아이가 너무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어서 서둘러 아이를 데려오려고 합니다. 다른 한 건은 아버지가 남매를 자주 때린다는 신고입니다. 우선 성 학대 신고가 들어온 곳부터 가겠습니다.” 경기도아동보호전문기관이 위치한 수원에서 두 시간여를 달려 한 작은 동네에 도착했다. 사건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을은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집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내부는 깜깜했다. 손전등으로 곳곳을 비추었지만 청소나 설거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교과서와 공책이 곳곳에 뒹굴고 있었다. 집 안 전체가 큰 쓰레기장 같다. 아이 혼자 이 어두운 집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밥 먹었느냐’고 물어보니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먹을 만한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샀는지 알 수 없는 수박만 통째로 썩어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 냄비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아이의 보호자인 아버지는 옆 동네 친구 집에 있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은 것도 모르는

[Cover story] 산모 생존 戰場, 잠비아를 가다

양수 터져도 자전거로 이동… 세 쌍둥이 모두 잃어… 산모 10만명당 830명 사망 우리나라 59배에 달해 구급차 요청 이틀 후에 도착 이동 중 산모·아이 숨져 2009년 9월 후원 시작돼 올 3월 다섯번째 보건소 지어 건기의 끝자락에 다다른 잠비아에서는 조금만 걸어도 흙먼지가 날렸다. 수도 루사카(Lusaka)에서 서쪽으로 165㎞ 떨어진 뭄브와(Mumbwa) 음푸수(Mpusu) 보건소 근처에서 만난 조세핀(53)은 흙구덩이 속에 앉아 딸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말했다. 22세였던 그녀의 딸 루스는 세 번째 아이를 낳다 지난 7월 말라리아로 배속 태아와 함께 숨졌다. “죽기 이틀 전에 머리가 아프다고 근처의 보건소를 갔어요. 말라리아 진단을 받고 더 큰 병원으로 가기 위해 구급차를 요청했는데 오지 않았죠.” 보건소보다 한 단계 높은 의료기관인 뭄브와 지역병원(district hospital)에는 두 대의 구급차가 있다. 하지만 조세핀이 구급차를 불렀을 때 한 대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아동보건주간’ 캠페인 때문에 수도 루사카로 차출됐고, 나머지 한 대는 의료 물품을 실어 나르느라 자리를 비웠다. 루스는 그 다음 날 구급차가 오는 도중 숨을 거뒀다. 조세핀은 “내 딸과 손녀를 앗아간 말라리아가 두렵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뭄브와의 또 다른 카인두(Kaindu) 보건소에서 만난 로다(50)씨는 2006년 함께 살던 조카 손녀를 잃었다. 16세의 나이로 임신해 첫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직계가족이 모두 죽어 10년 넘게 친손녀처럼 길렀던 아이였다. 그녀는 “잠비아에 에이즈 환자가 많아 일반 보건소에서는 피 보관이 안 되는 걸 몰랐다”며 “더 큰 병원에 갔어야 했다”고

[Cover story] 빈곤퇴치 戰場 방글라데시를 가다

공부는 사치… 가난 탈출의 기회조차 없다 하루 15시간 쓰레기 주우면 간신히 하루 세끼 밥값 벌어 병원비가 두달치 생활비… 열병 걸려도 병원 근처도 못가 지난 18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뒷골목에서 만난 아이 라존(10)은 자기 몸집만한 쓰레기 자루를 메고 있었다. 시장과 주택가 사이에 놓인 쓰레기장은 40도에 가까운 방글라데시의 날씨와 맞물려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악취를 뿜어냈다. 아침 6시부터 라존은 썩어가는 음식과 폐기물 사이에서 종이와 플라스틱을 찾아내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밤 9시 반. 해가 지고 도시에 어둠이 몰려와 더 이상 물체를 구별할 수 없을 때까지 이곳을 헤맨다. 이날 모은 종이와 플라스틱, 다 쓴 형광등 6개로 라존은 고물상에서 50타카(850원)를 받았다. 라존은 “오늘처럼 형광등을 주운 날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라며 “세끼 밥값을 벌었다”고 웃었다. 시장의 소음과 경적 소리 속에서 라존은 매일의 삶을 굶주림과 노동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콜포나(10)는 모자를 만드는 공장에 다닌다. 다카에서 380㎞ 떨어진 묵타가차(muktagacha)에 살던 콜포나의 가족은 인력거 운전사였던 아버지가 병으로 일할 수 없게 되자, 어린 여자아이들을 고용하는 공장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아침부터 쪼그리고 앉아 재봉질을 해서 받는 돈은 한달에 3000타카(5만1000원). 얼마 전까지 평균 1800타카(3만원)였던 공장 임금은 최근 노동자들의 시위로 2배 정도 올랐다. 가장 역할을 하는 콜포나는 “집에 도움이 돼서 참 다행”이라고 했다. 어둡고 낡은 공장에서 천을 염색하며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콜포나는 파업을 얘기하며 벌써 어른이 됐다. 방글라데시의 5~14세 아동 노동 비율은 13%로 아시아에서

[Cover story] 김만갑 교수·굿네이버스 개발… 대한민국 적정기술제품 1호 ‘G-Saver’

추위는 물론 가족의 삶까지 데워주는 ‘적정기술’ 다섯 아이의 아버지, 푸릅돌찌(43)씨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몽골 울란바토르시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하일라스트 지역.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그의 집까지 가는 길 내내 몇 번이고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주민의 60% 이상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매일 이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으러 다닌다. 언덕, 언덕마다 몽골 전통 가옥인 ‘게르’와 판잣집이 가득한 모습은 1970년대 우리나라의 달동네를 떠올리게 했다. 푸릅돌찌씨는 초등학교 경비 일을 하며, 노모와 다섯 아이를 부양하고 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들뜬 푸릅돌찌씨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G-Saver 덕에 올해 아빠 노릇을 제대로 했다”며 고마워했다. ‘G-Saver’는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이 1년 중 8~9개월이나 이어지는 몽골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축열 난방 장치다. 열원(熱源) 보존시간을 연장해줄 뿐만 아니라, 매연 또한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매년 겨울 들어가는 연료비 때문에 1년 내내 허리가 휘었어요. 연료를 안 때면 얼어 죽으니, 나무와 석탄은 어떻게든 마련해야 하죠. 그래서 빚을 질 때도 많고, 연료비 때문에 가족들 먹을 것도 장만 못 할 때가 다반사죠. 그런데 새 난방장치 덕분에 연료비가 절반으로 줄어 제가 우리 아들딸들 공책·연필·신발까지 사줬다니까요.” 푸릅돌찌씨는 그동안 아빠 노릇 제대로 못 했다며 목이 멨다. 어느새 아빠 곁으로 온 둘째 딸 체르마(14)는 “아빠가 이번에 학용품을 사 주셔서 학교 가는 게 더 좋아졌다”며 배시시 웃는다. “난로에 나무를

[Cover story]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④’안데스 식료품점’ 설립자 기욤 밥스트

빈곤층에 꿈을… 일자리·저렴한 식료품에 독립심까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드리스 벤메라(Idris Benmerah·52)씨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프랑스에 왔다. ‘프랑스 드림(France Dream)’을 품고 이민 온 수많은 알제리인 중 하나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13살 때 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일을 그만두신 후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농사며 공사장 일이며 손에 닿는 일은 다 했다. “어른이 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가정을 이루었지만, 도무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오히려 부양해야 할 가족만 늘어난 셈이죠. 우리 아이들에게 이 가난을 물려줄 수는 없었습니다.” 벤메라씨는 그렇게 프랑스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2005년 홀로 지중해를 건넜다. 큰 꿈을 품고 프랑스에 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한 명 없으니 일자리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직장도 집도 구하지 못한 벤메라씨는 고향의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것조차 마음이 불편했다. 수개월 그렇게 방황하던 중, 그는 구직상담소의 도움으로 안데스(ANDES:Association Nationale De Développement des Epiceries Solidaires)라는 곳을 알게 됐다. 빈곤층 대상의 식료품점인 이곳에서 가난한 ‘고객’들은 시중가의 10~20%에 해당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구매한다. 벤메라씨는 총 14개월 동안 이 회사의 인턴으로 일하며, 채소와 과일을 나르고 손으로 불량품을 골라내고 각 식료품점으로 갈 상품을 포장하고 배송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그는 안데스 중앙물류센터에서 배달과 인턴 교육을 담당하는 정규 직원이 됐다. 알제리에 남아 있던 가족도 드디어 프랑스로 데려올 수 있었다. “두 딸, 두 아들에게 제 어린 시절과는 다른

[Cover story] 아프리카서 희망농사 짓는 이상훈·이송희 부부

지치지 않는 아프리카 봉사”말라리아도 우릴 못 막아요” 이상훈(43), 이송희(37) 부부는 결혼생활 15년 중 9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세 아이 중 두 딸도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났다.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시달리며 16년째 긴급 구호와 지역 사회 개발에 헌신하고 있는 이 부부는, 이달 말 아이 셋을 데리고 다시 아프리카 르완다로 떠난다. ‘청년’ 이상훈과 ‘젊은 아가씨’ 이송희의 첫 만남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 200만명이 넘는 르완다 난민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그곳에서 ‘희망 농사’를 지을 예정이다. 운명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이상훈씨가 르완다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94년이다. 종족 분쟁으로 대학살을 피해 수백만 명의 르완다 국민들이 난민이 된 상태였다. 극심한 식량부족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신문에 난 ‘기아대책 봉사단’ 광고를 보고 지원한 상훈씨는, 겨우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르완다에 파견됐다. 의사 2명, 간호사 5명으로 이뤄진 팀과 함께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밀어닥치는 난민들로 의료팀은 하루 종일 치료와 수술로 전쟁을 치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천막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먹는’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모두 힘들고 피곤하니 밥 당번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누가 밥을 할거냐, 김치는 왜 없냐며 매일 큰소리가 났지요.” 상훈씨는 젊고 철없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지 싱긋 웃었다. “이대로는 의료 봉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근 국가들의 봉사단원들에게 SOS를 보냈지요. 다행히 케냐 나이로비에서 도와주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반가운 마음에 상훈씨는 공항까지 달려나갔다. 당연히 40~50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