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목)

[Cover story] 르포―공정무역 현장을 가다

불가촉천민(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 탄다는 최하층 신분), 홍차밭에서 꿈과 희망을 키운다
칸첸장하홍차농원 불가촉천민 등 소외계층 고용…자녀 등록금 등 복지 지원도
‘아름다운 가게’서도 홍차 판매… 공정무역 차 많이 마실수록 더 많은 일자리 줄 수 있어

해발 1600미터, 히말라야 칸첸중가 기슭에서는 산 아래 마을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풀숲 사이로 난 좁은 비탈길을 따라 15분을 걸어 오르자 작은 흙집 10여 채가 언덕길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지어져 있었다. ‘네팔리’족의 마을이다. ‘네팔리’족은 신분제도인 카스트에서 ‘스치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불가촉천민이다. 법률상으로는 1963년 신분 제도가 폐지됐지만, 이들과 말을 섞거나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 꼭대기 집에 사는 남 마야(32)씨도 평야 지방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해 7년 전 이곳으로 왔다. 병원에 가지 못해 갓 낳은 아이를 셋이나 잃은 뒤였다. 소작농으로 일하던 남 마야 씨의 남편은 결국 2년 전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남 마야씨는 “5살 아들이 아빠를 찾을 때면 눈물이 난다”면서도 “한 달에 250루피(3500원)인 아이 교육비를 대려면 남편이 타지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네팔에서는 한 해 30만명이 이주 노동자가 되어 고국을 떠난다.

히말라야 칸첸장하홍차농원에서 한 네팔 여성이 공정무역으로 거래되는 유기농 차의 여린 잎을 수확하고 있다. /아름다운 가게 제공
히말라야 칸첸장하홍차농원에서 한 네팔 여성이 공정무역으로 거래되는 유기농 차의 여린 잎을 수확하고 있다. /아름다운 가게 제공

남 마야씨에게 가장 부러운 사람은 이웃 주민인 발 마두르(37)씨다. 그 역시 아무 가진 것 없이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공정무역단체인 칸첸장하홍차농원(KTE)에서 일하게 된 뒤로 집과 땅이 생겼다. 안정적인 수입 덕분이다. 경비원으로 일을 시작한 발 마두르씨는 어깨너머로 일을 배워 지금은 차 덖는 기계 관리를 한다. 홍차농원 관리소장인 딜리 바스코타(56)씨는 “불가촉천민이지만 눈썰미가 뛰어나고 일을 잘해 초고속으로 승진했다”고 말했다.

현재 칸첸장하홍차농원은 발 마두르씨 같은 낮은 카스트 출신의 사람(24%)과 직업을 구하기 힘든 여성(70%)을 주로 고용하고 있다. 취약 계층에게 우선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해 가난을 벗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정무역의 주요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은 저개발국가의 소외된 생산자들이 가난을 극복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무역거래를 말한다. 생산자에게 일반 거래가보다 높은 정당한 가치를 지급함으로써, 지역공동체까지 발전시킨다. 지난 10년간 일반 홍차는 1kg에 최대 2.9달러(3200원) 정도에 거래됐지만, 칸첸장하홍차농원의 홍차는 1만5000원 정도에 거래됐다. 이 돈으로 농원은 고용된 모든 사람의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마을 도로를 포장한다. 발 마두르씨는 “자녀 셋의 등록금 지원이 칸첸장하홍차농원의 가장 큰 장점”이라며 “한국 사람들이 공정무역 차를 많이 마시면 더 많은 사람이 칸첸장하홍차농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되고 더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농원은 또 고용된 모든 사람에게 소를 빌려준다. 소에서 나온 우유를 팔아 추가 수입을 얻고 소의 배설물은 유기농 비료로 활용한다. 소가 새끼를 낳으면 이는 다시 농원의 몫이 된다. 지역주민들의 종자돈 마련을 농원이 해주는 셈이다.

공정무역으로 거래되는 이곳의 홍차가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100% 유기농이라는 점이다. 이곳 차밭에는 어른 허리 정도의 홍차 나무가 비탈면에 듬성듬성 심어져 있고 사이사이에 다른 나무들도 있어 ‘밭’으로 보이지 않는다. ‘차밭’ 하면 떠오르는 ‘줄지어 서 있는 차나무들이 능선을 따라 펼쳐진 넓은 공간’은 이곳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공정무역 홍차로 얻은 수익은, 네팔리족 마을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힘이 된다. /아름다운 가게 제공
공정무역 홍차로 얻은 수익은, 네팔리족 마을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힘이 된다. /아름다운 가게 제공

딜리 소장은 “차나무가 줄지어 선 넓은 밭은 농약을 뿌려 대규모로 관리되는 곳”이라며 “여기서는 질소 성분이 많은 콩과식물들과 소·닭 등의 배설물만 자연퇴비로 이용하고, 중간중간 바카이노 같은 방충식물을 심어 병충해를 예방한다”고 말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른 손가락 두 개만 한 메뚜기가 개구리처럼 뛰어다니는 풍경은 차밭에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한창 수확기간인 요즘, 차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연방 찻잎을 잘근잘근 씹으며 찻잎을 따 바구니에 넣었다. 인드라 쿠마리(27)씨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아서 바로 입에 넣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캐나다와 한국, 일본으로 주로 수출되는 이곳의 홍차는 EU 기준에 따른 호주 유기농마크 NASAA와 일본 JAS 마크를 획득했다. 농원 설립자 디팍 바스코타(63)씨는 “공정무역을 통해 유럽과 미국, 한국 사람들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며 “전 세계 사람들이 유기농 공정무역 제품으로 예쁘고 건강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곳의 홍차는 우리나라 ‘아름다운 가게’에서도 ‘칸첸중가의 홍차’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아름다운 가게 홍명희(64) 대표는 “험한 산이 많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차 재배가 자립을 위한 중요한 방법”이라며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정무역 상품을 많이 구매해 저개발국 생산자들의 삶이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정무역으로 한 마을을 살리겠다는 마음은 칼리카 학교 증축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운 가게 명예점장 박은자(64)씨가 학교 증축비를 기부한 것. 박씨는 “20년 전 네팔에 왔을 때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언젠가 아이들을 돕는 사회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꿨었다”며 “칼리카 학교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길러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칼리카 학교에 다니는 움 쿠마리(12)는 “새로 도서관이 생겨 동화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됐다”며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며 웃었다.

한국에서 우리들이 마시는 공정무역 차 한 잔이, 네팔의 어린이와 농부들의 꿈을 이뤄주고 있다.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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