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사회적기업가’ 김태원

악기 만드는 사회적기업 ‘폴제페토’ 운영… 기타리스트 김태원“노래 만들면 마음도 순수해져… 재능 기부는 나 자신 위한 것” 사회적기업 취지 듣자마자 결정수익금은 강원도 아이들 위한 공연·악기 지원 등에 사용… 음원·자서전 수익 기부도 활발아직 대중에겐 생소… 연예인 사회적기업가 많아지길 내 또다른 꿈은… 아들처럼 발달장애 겪는 사람들 평생 기댈 수 있는 학교 짓는 것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 중 한 사람,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 ‘네버 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 등 수많은 명곡을 낳은 록밴드 ‘부활’의 리더,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웃음을 선사하는 ‘국민 할매’. 대중이 기억하는 김태원(51)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10여곡의 노래를 선물한 재능 기부자이자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평생학교를 세우고 싶은 자선가, 동양인에게 꼭 맞게 제작된 악기를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사회적기업 ‘폴제페토’의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 1월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김태원을 만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에게 기회 주고파… 사회적기업 ‘폴제페토’ 설립 “‘꿈의 기타’를 만들고 싶었어요. 작은 공방을 세워서 2년쯤 운영했는데, 주변에서 ‘차라리 사회적기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이라기에 나는 수익의 1%도 필요 없으니까 좋다고 했죠.”   2011년 김태원은 ‘폴제페토’라는 사회적기업을 만들었다. 자신의 세례명인 ‘폴’과 피노키오를 만든 할아버지인 ‘제페토’를 합친 이름이다. 제페토의 마음으로 동양인 체형에 맞는 기타를 제작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 고령으로 현업에서 은퇴한 현악기 장인 2명과 관악기 수리를 담당하는 장애인 근로자 1명을 포함해 총 5명이 근무하고 있는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올해

소심한 서울대생 기자회견 나선 까닭

지체장애인 이화영씨 대중교통은 그녀에게도 ‘숙제’ “장애인뿐 아니라 노약자도 아기 가진 부모도 누구나 교통 약자 될 수 있어… 저상버스 프로젝트 사례로 약자에게 ‘희망의 불씨’ 됐으면” “죄송한데 장소를 바꿔도 될까요? 그 카페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요.” 이화영(27·사진)씨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장소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그녀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오후, 서울대입구역 근처 카페를 물색했다. 휠체어가 들어가기 쉬운 1층에는 카페가 별로 없었고, 2·3층에 위치한 카페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빌딩 하나가 통째로 카페인 유명 커피숍에도 이씨가 앉을 만한 자리는 없었다. 빈자리는 노트북 부대가 선호하는 높은 테이블뿐. 몇 번이고 실패를 거듭하다, 1층 빵집 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차 한 잔 하기 참 어려웠다. 서울대 통계학과(09학번) 출신 취업준비생 이씨를 만난 건 ‘서울대 저상버스 5516번을 되살린’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서울대에 도입된 5516번 저상버스는 1년 만에 폐지됐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내부에는 버스 노선 3개가 다녀요. 그중 한 노선이 2012년에 처음으로 저상버스를 도입하기로 했어요. 장애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죠. 반가움도 잠시, 2013년 저상버스가 전면 폐지됐어요. 교내에 과속방지턱이 너무 많고 높아서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어요. 학교 측에서는 교내 과속방지턱을 모두 공사하기는 어렵다고 말했죠. 1년 만에 없던 일이 됐어요.”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본부까지는 2.58㎞로, 도보로 40분이 걸리는 언덕길이다. 저상버스가 사라지자 휠체어를 타는 학생들이 지하철역까지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콜택시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 장애인 콜택시는 474대, 평균 대기 시간은 약 30분이다. 이용객은

‘장애’를 ‘기회’로… “꿈꾸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장애인 CEO 3人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송오용 대표 “우리 제품 덕에 시각장애인 사시 합격도” 김진현 대표 “드론으로 장애인에게 ‘희망의 날개’ 달아” 박원진 이사장 “청각장애인, 자막 있으면 배움 쉬워요” “내가 태어난 건 팔다리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이다.” 유명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씨의 말이다. ‘장애’를 자신만의 ‘기회’로 삼은 장애인 CEO들이 있다. 한국 시각장애인계의 ‘빌게이츠’라는 송오용 ㈜엑스비전테크놀로지 대표, 드론으로 방송계를 평정한 김진현 스카이블루버드 대표(1급 지체장애), 청각장애인으로 교육 환경을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선 박원진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30년 독학, 시각장애인용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제 컴퓨터는 30년째 꺼진 날이 없습니다. 컴퓨터만큼 재밌는 건 없으니까요(웃음). 앞이 안 보이는 저에게 컴퓨터는 세상 ‘전부’입니다.” 시각장애인용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회사 ‘㈜엑스비전테크놀로지’를 14년째 운영 중인 송오용(44·시각장애 1급) 대표의 말이다. 지난 15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사무실을 찾았을 때 송 대표는 인기척도 알아채지 못한 채 컴퓨터에 몰두하고 있었다. 모니터는 까만 상태. 그는 헤드폰을 쓰고 스크린 리더(화면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프로그램) 설명에 집중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이런 신세계가 있나’ 싶더라고요.” 송 대표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 건 1986년 서울맹학교 중학부 때였다. ‘새로운 눈’을 뜬 것 같았다고 한다. “아홉 살 때 그네에서 떨어져 시력을 잃었죠. 다니던 학교, 놀던 친구들과 더 이상 어울릴 수 없게 됐어요. 서울맹학교로 전학 오고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는데, 컴퓨터는 가장 친한 친구가 돼주었죠.”

런던 대표 슬럼가였던 ‘해크니’… 10년간 가장 낮은 범죄율 유지한 비결은?

영국 ‘해크니개발협동조합’ 도미니크 엘리슨 대표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런던의 대표적 슬럼가로 손꼽혔던 해크니(Hackney) 지역. 마약과 강도 등 범죄의 온상이었던 이곳은 지난 10년간 역사상 가장 낮은 범죄율(1만1800여 건)을 유지하고 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과학, 기술, 전문 지식 및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산업이 급성장해 현재 해크니 지역 산업의 48%를 차지하고 있으며, 의료 산업과 소매 기업도 41%나 성장했다. 그 비결은 바로 사회 혁신가와 지역 소상공인에게 빈 사무실과 매장을 빌려주고, 버려졌던 주자창을 지역 최고 랜드마크로 탈바꿈시키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해크니개발협동조합(Hackney Co-operative Developments·이하 HCD)’의 도미닉 엘리슨(Dominic Ellison·사진) 대표가 그 노하우를 알리기 위해 내한했다. 안산시와 경기테크노파크가 공동 주최한 ‘사회적 경제를 통한 도시 재생’에 강연자로 나선 엘리슨 대표를 지난 13일 만났다. ―원래 주거협동조합이었다가 지역 주민들에게 공간을 빌려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계기는 무엇인가. “구청에서 우리에게 버려진 건물을 활용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쟁 때 폭격을 맞은 후 방치된 3층 건물이었는데 예산이 없어 보수도 철거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구청에 100년짜리 ‘후추알 임대(중세 시대 영주가 농민들에게 후추 한 알을 받고 논밭을 빌려주었던 것에서 비롯된 용어)’를 해달라고 했다. 임대를 받은 후에는 커뮤니티를 활성화한다는 내용의 사업 기획서를 작성해 ‘트리오도스은행(Triodos bank)’ 을 찾아갔다. 융자금을 얻어 1층에는 상가, 2~3층에는 사무 공간을 꾸미고 지역 소상공인, 사회혁신가,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이 건물을 시작으로 전체 80여 사업자가 입주해있는 ‘달스턴 워크스페이스(Dalston Workspace)’을 만들었다.” ―공간을 임대할 때

딱딱한 자선파티? 공연 즐기는 이색 자선파티!

청년 펀드레이저 마이크 김 “왜 부자들만 자선 파티에 참여할 수 있는 걸까.” 한인 2세인 마이크 김(32·작은 사진)씨가 의문을 가진 건 8년 전. 당시 미국의 유명한 자선 파티는 돈 많은 자산가의 전유물이었다. 젊은이들이 즐길 수 있는 펀드레이징(모금) 파티는 없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김씨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새로운 형식의 자선 파티를 기획했다. 이름하여 ‘레거시 커미티(legacy committee)’.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유산’을 물려주자는 뜻이다. 의미는 좋았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처음 행사는 완전 망했어요(웃음). 57명을 초대했는데 10명만 왔으니까요. 혼자서는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힘들더라고요. 다음해에는 팀을 꾸렸어요.” 금융 전문가, 마케팅 전문가, 사회적기업가 등 청년 6명이 모였다.’젊은이들에게 최고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에 중점을 뒀다. “파티에서 중요한 건 흐름(flow)입니다. 음악이 나오다가, 마이크 들고 말을 하면 분위기가 다운되잖아요. 바다에서 물고기 잡을 땐 그물을 던져서 최대한 많이 건져야죠. 우선 물고기를 모아야 회를 뜰 수 있지 않겠어요? 먼저 우리의 뜻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많이, 많이 모아야 해요.” 턱시도나 드레스를 입고 참여하는 여느 자선 파티와 비슷해 보이지만, 딱딱한 순서는 없앴다. DJ와 공연, 댄스까지 참가자들이 즐기도록 했다. 입장료(85~150달러 가량)를 내는 것만으로 기부자가 되도록 프로그램을 짠 것이다. 전략은 제대로 통했다. 250명, 400명, 500명. 해를 거듭할수록 참가자는 늘었고, 이제는 매년 1000명이 참여하는 젊은이들의 축제가 됐다. 술, 음식 등 물품 협찬을 하고 싶다는 기업들의 요청도 늘었다. 개인 입장료, 기업 기부금 등으로 모인 수익금은 샌프란시스코의 글라이드 재단(glide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깝죠, 나누는 기쁨

2015 아너 소사이어티 5人 인터뷰 지난 한 해 1억원 이상 기부한 아너소사이어티(이하 아너) 회원은 총 299명이다. 더나은미래와 공동모금회가 이 회원들을 분석한 결과 ▲서민층 ▲고인(故人) 기념 ▲지인 추천 ▲3040 ▲여성 기부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유가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가입한 아너 회원은 지난해에만 9명으로, 전체 고인 기부(19명)의 절반에 가까웠다. 2015 아너를 대표하는 5명을 만나 고액 기부 스토리를 들어봤다. 이들은 하나같이 “내가 느낀 나눔의 기쁨을 더 많은 이에게 나누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편집자 주 잘 쓸줄 알아야 진짜 부자 아니겠어요? 20년 모은 1억원 기부 허위덕씨 “아들 가족과 함께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 처음 ‘기부’ 이야기를 꺼냈어요. 혹시 반대하면 어쩌나 싶어서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그런데 며느리가 제 손을 꽉 쥐고 말하더군요. ‘어머니, 어떻게 그런 훌륭한 결심을 하셨어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어요.” 지난 14일, 경기도 군포시 자택에서 만난 허위덕(78) 아너는 “밤에 자려고 누우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라며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허씨는 지난달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77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했다. 20년간 모은 돈을 쾌척한 그의 이야기는 동네에서도 단연 최고의 이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척, 중학교 동창회 친구, 스포츠센터 아주머니들까지 연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며 축하의 말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허씨는 자신을 그저 ‘평범한 할머니’ 라고 말한다. 그가 기부한 1억원도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며 틈틈이 저축한 쌈짓돈이다. “큰아들의 결혼

8년간 길거리 배회하던 아이, 못다 한 배움 이어가다

교육 소외 아동·청소년 돕는 금천교육복지센터 집 안엔 박스와 잡동사니가 가득해 발 디딜 공간이 없었다. 돌돌 말린 달력 뭉치를 하나씩 펼쳐보니, 덧셈과 뺄셈이 틀린 숫자들로 빼곡했다. 지난 10여년간 정신분열증을 앓던 어머니가 수입과 지출을 계산한 흔적이었다. 2년 전 3월, 송현주 금천교육복지센터 개인성장지원팀장이 만난 정한(가명·22)씨의 집 안 풍경이다. ◇8년 동안 거리를 배회하던 아이, 대학에 합격하다 정한씨가 기억하는 학교의 모습은 2005년 가을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의 정신분열 증세가 심해지면서 그는 학교 대신 거리로 나섰다. “팥죽, 나물 등 같은 음식을 몇 개월 동안 계속 먹어야 했어요. 매일 같은 옷만 입다보니 친구들이 놀려서 학교 생활이 힘들었어요. 엄마에게 학교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산으로, 골목으로 돌아다녔죠.” 그러기를 8년. 의미 없이 흐르던 무채색 정한씨의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13년 열아홉 살이 되어서였다. 우연히 아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가 초등학교를 찾아가 항의하면서 아무도 몰랐던 그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학교와 구청 복지정책과가 머리를 맞대고 인근 대안학교를 알아봤지만, ‘초등학교에서 책임지고 3년 안에 고등학교 과정까지 끝내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가로막혔다. 부모의 동의 없이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는 탓에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당시 학교 교감 선생님이 금천교육복지센터에 SOS를 쳤다. “한시가 급하고 심각한 상황이라서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아이의 상태가 제일 중요했죠.” 송현주 팀장이 당시를 회상했다. 정한씨가 마음을 열 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센터를 통해 정한씨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그들에게 필요한 건… ‘한 고비’ 넘기는 힘

정신질환자 사회 복귀 지원… 구로구공동희망학교 송경옥 시설장 텃밭 가꾸기·역사·작문 등 일상 생활 관련 프로그램 활용… 2년 전부터 직업 체험도 운영 전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수학자 존 내시, 배우 캐서린 제타 존스, 시인 최승자. 각자의 분야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정신질환자라는 공통점을 갖고있다. 링컨 대통령은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고, 수학자 존 내시와 시인 최승자는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고통 받았다. 배우 캐서린 제타 존스는 조울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국내 18세 이상 74세 이하 성인의 정신질환 유병률은 27.6%(보건복지부·2011년). 성인 4명 중 1명 이상이 평생에 한 번쯤은 정신질환을 앓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14년까지 정신장애인에 등록된 이들은 불과 9만7000명. 장애 등록조차 하지 못한 채 변방에 남아 있는 정신질환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수치다. 지난 10여년의 세월을 정신장애인 사회 복귀 활동 최전선에서 달려온 사람이 있다. 송경옥(51) ‘구로구공동희망학교'(이하 ‘희망학교’) 시설장이 그 주인공이다. 희망학교는 정신의료기관에서 정기진료를 받고 있는 만 19세 이상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사회 적응 훈련과 취업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신장애인 사회 복귀 시설이다. ◇그들의 눈에서 희망을 보다 “지금도 정우(가명)를 잊지 못해요. 술도 끊고 ‘새 삶을 살아보겠다’며 다짐했던 친구였는데, 너무나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정우 어머니와 장례를 치르면서 이 사람들을 제대로 도우려면, 알코올중독 치료나 상담보다 더 복합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1년간 수련을 거치면 정신보건 전문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기에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인천에서

“내가 그린 그림 ‘해피앤딩’처럼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길”

월드비전 ‘해피앤딩’ 캠페인에 재능 기부한 배우 유준상 “지난 2015년은 제 인생에서 참 특별한 해였어요. 데뷔 20주년을 맞기도 했고, 처음으로 우간다 긴급구호 현장도 방문했죠. 매일 아침 탈골된 팔로 사금(砂金)을 캐던 필립이 생각납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대신해 너무 일찍 어른이 돼버린 필립과 함께 열흘간 울고 웃으면서, 작은 관심과 사랑이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번에 기부한 그림들은 그때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이에요.” 배우 유준상이 시리아 난민 어린이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월드비전 ‘해피앤딩(Happy Anding)’ 캠페인에 직접 그린 그림을 재능 기부한 것. ‘꿈’ ‘나의 천사’ ‘마음과 마음’ ‘해피앤딩<그림>’ 등 그가 그린 그림 4점은 나눔 카드로 제작됐다. 카드의 판매 수익금은 긴급 구호 현장에 방한용품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유씨는 “그림 4점 중에서도 ‘해피앤딩’에 가장 애착이 간다”면서 “온 세상 어린이가 그림처럼 건강한 마을에서 자랄 수 있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고 말했다. 해피앤딩은 남을 위해 나누고 남은 케이크 조각의 단면을, 나눔이 만들어낸 ‘기회의 문’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이번 ‘해피앤딩’ 캠페인의 메인 이미지로도 활용됐다. “어렸을 때 옆집에 누가 이사를 오면 꼭 떡을 돌리곤 했던 기억이 나요. 또 어머니가 김장을 담그시면 한두 포기는 꼭 동네에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가져다 드리고 그랬거든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웃 간의 오가는 정이 있었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에서 시작하는 게 진정한 나눔이 아닐까요?” 해피앤딩 카드 1세트(그림 카드 4장, 봉투 4장,

눈을 떼지 마세요, 아이들이 희망입니다

요르단 난민 캠프 찾은 강도욱 월드비전 국제구호팀장 배수시설 없어 위생 문제 심각 女兒 학대는 신고조차 안 돼 단순 생계 지원을 넘어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돕고 싶어 “흔히 중동 국가라고 하면 사시사철 따뜻할 거라는 오해가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한겨울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눈이 오기도 합니다. 시리아 난민들은 지금, 이 추운 겨울을 기본적인 방한복조차 없이 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요르단의 자타리(Zaatari)·아즈락(Azraq) 난민 캠프를 방문하고 온 강도욱<작은 사진> 월드비전 국제구호팀장의 말이다. 2011년 3월 발발한 시리아 내전으로 439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6년째 계속되는 전쟁으로 약 23만명 이상의 시리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 6%(1만2000명)는 삶을 채 꽃피워보지도 못한 아이들이다. 고향을 잃고 맞게 된 또 한 번의 새해, 시리아 난민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강도욱 팀장에게 난민들의 고된 겨울나기를 들었다. -캠프의 난민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나. “한 달 생활비 20JD(약 3만원)와 매일 똑같은 빵 네 덩이 정도를 지원받아 살고 있다. 오죽하면 다시 시리아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 가장 심각한 인프라 문제 중 하나는 위생이다. 자타리 캠프는 배수시설이 없어 비가 내리거나 눈이 녹으면 그 물이 길바닥에 고여 썩는다. 딛고 선 바닥이 해충과 수인성 질병의 원인인 셈이다. 식수도 수십, 수백 가구가 하나의 고무 탱크를 공유하는 형식으로 조달하고 있었다. 월드비전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4년간 꾸준히 식수 위생 사업을 진행해왔다. 아즈락 난민 캠프 내에 정화조 674개,

나눔은 ‘나’를 위해… 혼자 행복한 건 외롭고 재미없죠

‘봉사하는 청춘’을 만나다 탈북 대학생 엄에스더… ‘신개념 꽃거지’ 한영준 ‘수저론’이 한창인 대한민국, 그러나 어떤 곳에선 수저조차 못 물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다. 가장 가까운 곳 ‘북한’과 지구 반대편 남미 볼리비아의 빈민촌 ‘뽀꼬뽀꼬’다. 그들에게 ‘나눔’을 보여주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있다. 바로 대학생 통일 봉사단을 만든 탈북자 엄에스더(33)씨, 7년째 ‘100원의 후원금 구걸’을 하는 ‘꽃거지’ 한영준(32)씨 이야기다. ◇봉사를 통해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한 탈북자, 엄에스더 2010년, 엄에스더(33·한국외대 중어중문학과 4)씨는 두 번 탈북한 끝에 남한 땅을 밟았다. 봉사를 시작한 건 정착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장애인 시설,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노숙인 무료 급식 봉사 등을 빼놓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엄씨는 중국 옌지(延吉)에서 도피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다 울먹였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눈앞에서 공안에 잡혀가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어 삶을 포기하다시피 했어요. 그때 길에서 사지(四肢) 없는 노인이 입에 붓을 물고 글을 써서 파는 걸 보면서, 제 모습이 부끄러워 용기를 냈어요.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에 장애인 시설로 무작정 가 돕고 싶다니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더군요. ‘숨어 사는 사람은 좋은 일도 못 하는구나’ 싶어 서러웠죠.” 엄씨는 남한에 도착한 후, 지인에게 소개받은 장애인 시설 ‘엔젤스헤이븐(구 은평천사원)’부터 찾았다. 봉사의 시작이었다. 토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장애인들을 씻기고, 시설 곳곳을 쓸고 닦았다. 주6일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하루 4시간도 못 자는 고된 일상 속에서도 토요일 봉사는 빼먹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봉사는 남한

우리가 몰랐던 그들 마음속 숨겨둔 이야기

편견… 우리가 몰랐던 사람들 우리는 편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익숙치 않은 모습을 보면 손가락질 하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곤 합니다. 에이즈 환자, 고령지 예술인, 아마추어 작가, 여성 택시기사 등 우리가 접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못 읽는다고?’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할 뿐, 글 읽는 건 문제없을 거야’….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일반적 생각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청년 기자들이 만난 우리 이웃 중에는 편견과 통념을 깨는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가 많았다. 편집자 주 #1 “안마사 말고 교육자 되고 싶어” -중도 시각장애인 김태연씨 김태연(43)씨가 시각장애 1급 진단을 받은 것은 28세 때. 설상가상으로 백내장도 진행됐다. 형광등 불빛이 숟가락에 반사되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부모님과 같이 살 수가 없었다. 창문에 선탠지를 바르고, 암막 커튼을 치고 혼자 4년을 살았다. 실로암 복지관의 문을 두드린 것은 ‘할 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시각장애인도 대학에 갈 수 있어요.” 복지관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동료의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김씨는 사범대에 진학해 영어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시각장애인이 되기 전, 학습지 선생님으로 활동했었던 경력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씨는 불혹(不惑)의 나이에 이화여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교재’ 문제였다. 학기 초가 되면 비상이다. 김씨는 “점자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거나 볼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시각장애가 발생한 경우에는 점자를 읽을 수 있는 분들이 정말 적다”고 했다. 실제 점자를 읽고 해독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은 전체 시각장애인의 5% 정도(2014년 기준).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