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
[월간 성수동] 14 센트면 충분한가요?

지난해 말 글로벌 벤처 투자업계에 대한 통계 자료를 살펴보던 중 수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1달러가 투자될 때마다 14센트가 기후테크 영역에 투자된다는 것이다. 투자금의 14%가 기후 부문에 투입된다는 의미는 뭘까? 우리가 마주한 기후위기 해소에 충분한 비율일까? 아니, 더 나아가 정말로 자본이 기후위기를 해소할 수 있을까? 질문이 머리속에서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친환경 테마를 중심으로 한 ESG·그린뉴딜 펀드, ETF는 이제 벤처 영역뿐만 아니라 전체 자산 시장 내에서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환경부에서도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를 발표하고, 녹색채권의 기준뿐만 아니라 세제혜택 등의 인센티브를 검토하고 있다.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비판도 있지만 시장에서의 환경 기준은 전 세계적으로 점점 강화되고 있으며 이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소풍벤처스 역시 100여 개의 투자 포트폴리오 중 20% 이상을 폐기물 수거, 재생에너지, 대체 단백질, 미생물, 수목 관리 등 기후 영역에 투자해왔다. 최근에는 농식품, 재생에너지, 그리고 순환경제 영역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대량 소비 사회에서 폐기물 이슈는 생산과 재순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플라스틱의 역습은 인류의 건강 문제를 위협하고 있다. 탄소가 가장 많이 절감될 영역으로 에너지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인류·산업의 근간이 에너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식탁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직접적으로 기후위기를 체감하고 또 문제 해결에 참여할 수 있는 장소다. 조금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기후위기의 해결이 우리 식탁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먹거리의 생산과 운송, 보관, 가공, 폐기에 이르는 농식품 밸류체인의

김경신 파울러스 대표
[메타버스와 사회혁신] 친절의 별점

대학 시절 1년간 갭이어(Gap-Year)를 가진 적이 있다. 3학년을 마친 직후였다. 30kg짜리 배낭을 둘러메고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거쳐 서유럽과 중남미 여행을 떠났다. 당시 고생도 했지만 값진 경험들도 많이 얻었었다. 애초 계획은 영국 어학연수였지만, 오랜 벗이자 선배인 영곤 형이 줬던 책 한 권이 방향을 틀게 했다. 2007년 출간된 ‘어학연수 때려치우고 세계를 품다’라는 책이다. 저자의 파란만장한 여행기에 큰 자극을 받은 나는, 또 다른 오랜 벗 월호 형과 함께 긴긴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중에 얻은 대부분은 거저 주어진 것들이었다. 굶주린 여행객을 위해 기꺼이 먹을 것을 내어주는 분들도 있었고, 하룻밤 묵을 자리를 제공한 분들도 있었다. 매번 값을 치르고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여행 시장’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의와 친절, 환대의 영역이다. 그것이야말로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짜 값진 경험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생의 진짜 소중한 것들은 비용을 내고 구입했던 것들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동네 어른들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관심,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놀이와 간식의 추억, 첫사랑과 함께 주고받았던 배려와 희생 그리고 다툼의 기억들. 모든 것이 불현듯 찾아왔다. 인류와 커뮤니티를 지탱해온 실체는 거래가 아닌 공유는 아닐까. 유럽에는 전통적인 환대의 문화가 있다. 집마다 방 한 칸은 꼭 손님방(Guest Room)으로 꾸며 놓고는 하는데, 손님이 찾아오면 방과 아침식사를 제공하고 쉬어가도록 한다. 반대로 누군가의 집에 손님으로 방문하면 그런 환대를 받게 된다. 손님방 문화를 여행 상품화한 것이 바로 ‘에어비엔비(Airbnb)’다. 재독(在獨)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선자에게도 커피가 필요하다

애플TV+의 드라마 ‘파친코’가 화제다. 일제강점기 영민함과 자존심으로 스스로를 지켜내던 젊은 여인 선자는 갑작스런 임신으로 고향을 떠나게 된다. 무력으로 조국을 지배하는 제국의 심장에 던져지는 것도 어려운데, 남편은 병약하고 일자리 없는 가족은 자기 앞가림도 못한다. 그러나 선자는 온갖 역경을 이겨, 가정을 일으키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갑자기 고향을 떠나거나 급작스런 환경변화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업루티드 피플(Uprooted people)’이라고 한다. 뿌리가 뽑혀나간 사람이라는 뜻이다. 뿌리를 잘 내려도 흔들리며 갈등하는 것이 삶의 본질인데, 예상치 않았던 사건은 우리를 다른 곳에 데려다 놓곤 한다. 사람만을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따라 삶의 총체를 구성한 생활양식과 지식과 기술 등도 함께 이동한다. 업루티드 피플을 따라, 세계 각지를 이동하며 그들의 삶을 달래준 대표적인 상품이 커피다. 별빛을 따라 육로의 무역 길에 나선 아라비아 상인들과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목숨을 건 대항해의 끝에서 아프리카 노예의 손을 빌려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산업혁명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의 끼니가 되어 주고, 프랑스 혁명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전쟁만큼 커피의 확산을 촉진한 단일 사건은 없다. 커피는 미국 남북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할 정도로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필수적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남군 지역의 항구 봉쇄령을 내려 남군의 커피 보급을 끊어 사기를 저하시키려고 했다. 남북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간 군인들과 함께 커피의 아메리카 대륙 여행은 시작됐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원두 대신 인스턴트 커피가 병영에 투입되며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봄 여행은 농촌으로

봄이 왔습니다. 코로나도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전염병에 시달려 왔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왔듯이 사스와 메르스, 그리고 코로나를 지나 또 어떤 바이러스가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잘 이겨낼 것입니다. 이번에는 RNA 백신이라는 걸출한 과학기술 덕분에 글로벌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코로나도 전파력은 커지고 치명률은 떨어지는 경로에 접어들면서 그 끝이 보이는 듯합니다. 지난 두 해는 마스크와 거리두기로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이웃들은 알록달록하던 색을 잃고 점점 더 무채색으로 바뀌어 갔고, 이웃 간 거리만큼 사회는 생기를 잃어갔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이제 봄과 함께 다시 우리가 잃어버린 색을 찾아갈 때입니다. 남도로부터 시작된 꽃 소식은 이제 수도권에 다다라 절정을 치닫고 있습니다. 코로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수많은 사람이 산과 들을 찾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은 해외로 떠날 준비를 하는 듯합니다. 사회학자들은 보복 소비가 일어나면서 거리로 관광지로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럴 때 농촌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흰 매화가 지고 벚꽃이 만개하는 시절이 지나면 붉은 복숭아 꽃이 온 산을 물들이는 때가 옵니다. 지천으로 깔린 노란 민들레는 은빛 씨앗을 하늘로 흩뿌리고 영산홍이 길거리를 수놓을 때면 사과꽃이 수줍게 피기 시작합니다. 마늘과 양파밭에 녹음이 짙어지면 감나무에서는 연노란 잎이 녹색을 더해가면서 때늦은 감꽃이 있는 듯 없는 듯 잎사귀 사이에 자리를 잡습니다. 가끔 마을 입구나 산 어귀에서 마주치는 연보라색 오동나무 꽃을 볼 때면 그

[진실의 방] 어떻게 감히

‘학교 폭력’이라는 말이 공식 석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 반응은 냉랭했다. 교육 당국은 ‘폭력’이라는 부정적 단어를 ‘어떻게 감히’ 학교라는 숭고한 단어와 조합할 수 있느냐며 극렬하게 반발했다. 지금은 누구나 익숙하게 쓰는 학교 폭력이라는 말이 그때는 그렇게 저항을 받았다. 학교 폭력이라는 말을 세상에 끄집어낸 사람은 푸른나무재단 명예이사장 김종기씨다. 1995년 회사 업무차 떠난 중국 출장길에서 그는 열여섯 살 외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학교 폭력으로 고통받던 아이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죽음으로 그는 죄책감과 절망감 속에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다. 가해 학생들이 여전히 학교에 남아서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해자 부모들은 제 아이들의 진학과 앞날을 걱정하며 연락을 피했고, 학교는 폭력을 사춘기 아이들이 겪는 흔한 문제로 치부하며 덮으려 했다.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학교 폭력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게 됐다. 자신과 같은 비극을 겪는 아버지가 두 번 다시 없기를 바라며 청소년폭력예방재단(지금의 푸른나무재단)이라는 시민 단체를 설립했다. 정부는 그가 벌이는 일을 몹시 불편해했다. 단체 이름에도 ‘학교 폭력’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막았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는 게 이유였다.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가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숙제지만, 인내심과 열정을 가지고 끝까지 그 숙제를 해내는 사람은 대부분 당사자다. 당사자들의 분노와 절박함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된다. 어떻게 감히 흑인이 백인과

정일선 굿네이버스 탄자니아 대표
[사회혁신발언대] ‘우리의 지구, 우리의 건강’은 지켜질 수 있을까

아프리카 최대의 담수호인 빅토리아 호수는 ‘신이 내린 선물’로 불렸다.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꼽힐 정도로 생물 다양성을 자랑했고, 지역 주민에게는 생계를 유지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호수는 재앙으로 변해갔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수온 상승이 주요 원인이었다. 최근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조사 결과, 고유종의 76%가 멸종위기에 처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획량이 많이 감소하면서 호수에 의존해 생활하던 주민들의 삶도 더욱 고단해졌다. 기후변화로 빅토리아 호수는 기생충 번식에 좋은 환경이 됐다. 오염된 식수는 설사, 구토 등의 수인성 질병을 유발했다. 보건의료, 식수위생 인프라가 부족한 탓에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했다. 특히 토양매개성 기생충, 주혈흡충, 사상충증 등의 소외열대질환(Neglected Tropical Diseases, NTDs) 감염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장애나 사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탄자니아에 속한 빅토리아호수 남부의 코메(Kome) 섬도 소외열대질환으로 고통받는 곳 중 하나다. 굿네이버스는 2009년부터 코메 섬의 아이들과 지역주민들의 의료 지원을 위한 소외열대질환 관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에는 보다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위해 소외열대질환 클리닉을 개소했다. 지난 2020년부터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지원을 받아 민관협력사업의 하나로, 한국건강관리협회와 3년간 20억원 규모의 ‘탄자니아 코메 섬 보건환경 개선을 통한 초등학생 건강증진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코메 섬 내 초등학교 12곳의 아동을 대상으로 영양실조와 빈혈 유병률을 낮추기 위한 급식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구충약, 복합 미량 영양소를 지원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기생충 감염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보건인식개선 교육도 병행했다. 학교와 지역사회의 우물과 화장실을 신축 또는 개보수해 안전한 식수위생시설 인프라 구축에도 힘썼다.

김민석 경기도사회적경제원 사업본부장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쓰레기를 되가져갑니다

얼마 전 국립공원에 들렀다가 한 문구를 보았다. ‘쓰레기를 되가져갑니다. 자연을 지킵니다.’ 그린포인트 제도를 소개하는 내용과 함께 적힌 문구였다. 그린포인트 제도는 2010년 국립공원 내 쓰레기 저감 및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처리하는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시행됐다. 국립공원에 방문한 탐방객이 자기 쓰레기 등을 되가져오는 경우, 쓰레기 1g당 2포인트(2원)를 제공해 온라인 쇼핑몰 또는 공원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10년 넘은 이 제도가 곧 종료되고, 올해 7월부터는 포인트 지급이 중단된다고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쓰레기 회수 문화가 정착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공원에서 수거한 쓰레기를 결국 가정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국가의 총 쓰레기 발생량 감소에는 기여하지 못한다는 한계 때문이다. 그래도 ‘쓰레기 되가져가기’ 문화가 정착되었다니 다행이기는 하다. 2019년 3월, 미국 CNN에서 우리나라 경북 의성군에 있는 거대한 쓰레기 산을 집중 보도한 적이 있었다. 한 폐기물 재활용 업체가 수거한 폐기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방치하면서 허용량의 80배가 넘는 양의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쓰레기가 분해되며 발생한 가스로 인해 화재가 일어났고, 주민의 건강과 지역 미관을 해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쓰레기 문제는 한국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린피스 영국사무소가 지난해 5월 발표한 ‘트래시드(Trashed)’ 보고서는 터키 아다나주 주변에 영국과 독일에서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적치되어 있거나 불타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플라스틱 포장재의 절반 가까이가 재활용된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재활용을 위해 수거된 수천 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은 소각로에서 소각되고, 일부는 다른 나라에 수출한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장서정 자란다 대표
[오늘도 자란다] 부모의 삶이 ‘테크’와 만났을 때

서울대학교와 한국갤럽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엄마의 52.4%, 아빠의 33.4%가 육아에 대한 부담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육아에 대한 부모들의 고민은 더 커지고 있다. 예전에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부모가 되면 ‘나’로서의 삶과 ‘부모’로서의 삶 중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양 측면의 삶을 균형 있게 살 수 있는 솔루션을 찾기보다 부모 중 누군가가 ‘나’로서의 삶에서 한발 물러나 ‘부모’로서 아이에게만 충실히 살 것을 사회에서 강요하기도 한다. “아이는 부모가 돌봐야지”와 같은 말들이 대표적이다. 요즘에는 부모들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스스로를 발전시키면서도 부모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가가는 방법을 찾고 있다. 육아에 몰입하는 시간을 본인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면서, 일에 몰입할 때는 그에 맞는 아웃소싱과 테크 솔루션을 영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커리어가 단절돼 나 자신은 사회에서 없어진 듯한 상실감을 느끼거나, 반대로 일하느라 아이에게 늘 부족한 부모라는 부채감을 느끼는 이런 양가감정 없이 부모와 아이의 삶이 모두 만족스러울 때 비로소 가정이 편안하고 아이도 부모도 행복해진다. 이미 해외에서는 부모의 부담을 덜고 육아에 필요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페어런트 테크(Parent Tech)’에 대한 투자가 늘고 있다. 온라인 기반의 유아용품 쇼핑 플랫폼인 ‘베이비리스트’ 와 아이를 위한 금융 플랫폼 ‘그린라이트’에 각각 약 710억원, 약 3100억원의 투자가 이뤄졌다. 지난해 미국 내 페어런트 테크 스타트업 투자 규모는 약 1조6500억 원(14억 달러)에 이른다. 글로벌 육아시장 규모는 1300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국내에도 아이의 기질과 부모의 기질을

최재호 현대차정몽구재단 사무총장
[최재호의 소셜 임팩트]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선택

“아빠 우리 집에 자가진단 키트 하나 있죠? 그거 제 친구 주면 안 돼요?” 중학교 3학년 아들이 내게 말했다. 친구의 동생이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았는데, 자기 친구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자가진단 키트 양성이 나와야 PCR 검사를 받을 수 있는데, 친구의 부모님이 동네 약국을 다 돌아다녀도 키트를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들을 포함한 여러 아이가 그 친구와 같이 축구를 했던 상황이라 걱정이 됐다. “자가진단 키트가 하나밖에 없는데 만약 그 친구가 확진이면 너도 자가진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더니 아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대며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기적인 선택에 후회가 밀려왔고 왠지 아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가족부터 지켜야 한다는 종족 보존의 유전자가 발동했던 걸까. 호모 사피엔스는 지난 수십만년 동안 진화하며 ‘최적의 선택’을 하도록 학습 되어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는 진화와 인류의 선택에 대한 내용이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설명돼 있다. 자연선택은 주어진 환경 조건에서 유리한 유전인자를 가진 개체가 그렇지 않은 개체보다 생존(선택)율이 높아지는 것이며, 적자생존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개체가 자연 살아남는다는 개념이다. 여러 개체 중에서 이기적 선택을 한 종족들이 더 많이 자연 선택되고 숫자가 많아지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종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개체 수가 줄어든다. 이때 이타적 선택을 통해 협력하는 종족들이 등장하여 경쟁력을 가지게

[진실의 방] 상상 부고

비영리단체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단체에 매달 소액을 기부하던 젊은 기부자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였다. 기부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품을 정리하던 부모는 딸이 수년간 후원하던 단체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고, 딸이 하던 기부를 계속 이어서 하고 싶다며 단체에 문의를 했다. 착실하고 따뜻하게 살다 세상을 떠난 평범한 기부자의 이야기는 그 어떤 유력가의 오비추어리(Obituary·부고 기사)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감동이 너무 컸던 탓일까. 그 후로 괴상한 버릇이 생겼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미래의 어느 날 쓰일 그의 부고를 미리 상상해보는 버릇이다. 일종의 ‘상상 부고’라고 해두자. 사업하는 사람, 모금하는 사람, 투자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 쌩쌩하게 웃고 말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죽은 뒤에 그가 어떻게 기록되고 추모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몰래 적어본다는 게 상대에게는 어쩐지 미안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의외의 장점이 있다. 개인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사 쓰는 과정과 비슷하다.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끌어모아 리드(첫) 문장과 본문에 들어갈 핵심 내용을 정하고 대략적인 마지막 문장까지 떠올려 본다. 제목도 달아본다. 각자의 삶에서 최대한 주제(기자들이 흔히 ‘야마’라고 부르는 그것)를 뽑아내는 작업이다. 직접 취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는 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상상 부고가 써질 때도 있다. 사회로부터 받은 것보다 ‘준 것’이 더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가 그렇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해준 게 없는데 그는 우리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준 것이 꽤 많다는 걸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냉면 한 그릇

냉면은 메밀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어 적당히 쫄깃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슴슴한 국물에 올곧음을 잃지 않고 질긴 듯 무심하게 끊어지는 면발은 ‘내가 뭘 씹은 거지?’ 하는 의문이 들 때쯤 까칠한 식감이 혀를 감싸고 쌉쌀한 향이 입안에 퍼진다. 더러 순 밀로 만들어 허무하게 끊어져 동치미 육수와 함께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냉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억 속의 냉면은 대체로 그러하다. 한국인의 냉면부심은 끝이 어딜지 모르게 치솟는다. 실향민의 음식에서 서민의 외식으로 그리고 청년의 부심으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냉면 가격은 품위를 논할 수 있을 만큼 올랐다. 2016년 이미 전체 냉면 시장 규모는 1000억 원을 넘어섰고, 간편식 냉면 시장도 700억원에 달했다. 이와 함께 냉면계도 장인의 숨결이 넘실대던 낭만의 시대가 저물고 비정한 브랜드의 각축장으로 바뀌어 갔다. 오랜 세월 부모님과 함께했던 손맛과 가문의 비법은 자식 대에 이르러 레시피와 품질관리로 옷을 갈아입었다. 스타 셰프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요리의 수준은 결국 식재료로 수렴한다.’ 평양냉면은 돌아서도 잊히지 않는 슴슴한 국물 맛으로 기억되지만, 가장 중요한 식재료는 메밀이다. 면발이 별볼일없으면 엠에스지 국물에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게 이 세계의 냉정함이다. 냉면계도 오른 가격에 걸맞게 식재료 경쟁에 돌입한다. 그런데 주재료인 메밀은 국내 생산량이 소비량의 절반에 불과하다. 2800톤의 수입 메밀 중 중국산이 70%를 넘어간다. 육수 경쟁이 막을 내릴 때쯤 냉면 업계에서는 ‘이야기가 있는’ 국산 메밀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펼쳐진다. 그러나 왜소한 메밀 시장은 종자, 농기계, 가공시설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여성 농부들, 커피 산업의 주인이 되다

2013년 네팔. 커피 수확이 한창인 3월 초. 깊은 산 속 커피 농장 새벽 한기는 뼈가 시릴 정도다. ‘커피를 따러 가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침대 속 따뜻함을 물리치기란 쉽지 않다. 커피를 사러 농가를 방문한 나의 게으름 저편으로 산중 그녀들의 아침은 분주하다. 마당에 건 솥단지에선 집안의 큰일을 해내는 검둥소에게 먹일 여물이 끓고 부엌에서는 장작이 타는 소리, 달그락 그릇 소리가 요란하다. 일단 커피 농장으로 나가면 다시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아침은 든든히 먹고 농장에서 먹을 도시락도 싸야 한다. 학교에 가는 자녀들 등교 준비를 돕고, 젖먹이를 들쳐 업고 저녁에 쓸 물도 미리미리 길어다 둬야 한다. 텃밭의 야채를 거두어 집안에 챙겨두면 비로소 그녀들은 커피농장으로 향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부자가 된다면 내가 네팔에서, 르완다에서, 페루에서 만난 커피 농가의 여성들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15년 페루. 여성들의 노동은 장소와 시간을 바꿔 계속된다. 커피나무 가지치기, 가뭄에 견딜 수 있도록 흙 덮어주기, 묘목을 심어 미래의 수확을 준비하기, 적정한 비료 주기, 잡초 뽑기.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면 드디어 수확의 기쁨이 찾아온다. 빨간 체리를 골라 따고 세척장에 이동할 수 있게 포장하는 일까지, 커피 농장의 일은 끝이 없다. 국제여성커피연맹(IWCA)의 통계에 따르면, 커피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100이라면, 이 중 75가 여성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75의 일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부분 가족 농장에서 이루어지는 부가가치가 낮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