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루스 샤피로 캡스(CAPS) 대표
수학시험의 주관식 문제는 답을 틀려도 풀이 과정이 맞으면 부분 점수를 받는다. 결과만큼 결과를 끌어낸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기부도 마찬가지다. 매년 한국의 기부 순위가 발표되고 기부가 저조하다는 말들이 오가지만, 정작 그 이유는 알쏭달쏭하다.
아시아 필란트로피 소사이어티 센터(Center for Asian Philanthropy and Society, 이하 캡스)가 기부 환경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왜’에 집중하며, 기부 통계 이면의 ‘맥락’을 짚어내는 이유다. 범위도 아시아로 좁혔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구 사회와는 기부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캡스는 2018년부터 공익활동평가지수인 Doing Good Index(이하 DGI)를 통해 아시아의 기부 여건을 분석하고 있다. 어떤 아시아 국가가 기부를 비롯한 공익 활동을 하기 얼마나 좋은지, 인프라와 제도가 부족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캡스의 루스 샤피로(Ruth A. Shapiro) 대표는 아시아 내 주요 기업인들의 모임인 ‘아시아 비즈니스 위원회’에서 10여 년간 사무총장을 역임한 인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전문가다. ‘기업은 왜 더 많이 기부하지 않는가’라는 고민은 아시아의 전반적인 기부 환경에 대한 연구까지 이어졌다. 낮은 신뢰 문제를 해결해야, 더 많은 민간의 자산이 투입될 수 있다고 봤다.
지난달 28일,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는 용산구 아메리칸디플로머시하우스에서 세미나를 열고 캡스의 2024년도 DGI 결과를 공유했다. 이번이 네 번째 조사 결과 발표다.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찾은 샤피로 대표에게 현시점에 진단하는 한국 기부 환경과 미래에 대해 물었다.
꾸준한 사회적 기업의 성장, 여전히 답답한 규제
샤피로 대표는 2017년, 2018년 더나은미래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사회적 기업을 필두로 기부 환경이 눈에 띄게 성장한 국가’라고 표현했다. 기부나 기업 CSR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활발하다. 다만 한계점도 분명하다고 짚었다. 정부·기업·SDO(사회공익단체) 간 신뢰도가 낮고, 기부단체 관련 법률 체계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더나은미래와 인터뷰를 한 지 6년이 지났다. 그때 한국 기부환경에 대해 내렸던 진단은 지금도 비슷한가.
“기자 입장에서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황은 비슷하다. 호황기에 있던 사회적 기업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올해 조사에서 ‘기부자들이 이전보다 사회적 기업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응답은 84%인데, 아시아 평균인 82%보다 높은 수치다. 동시에 복잡한 SDO 규제 시스템도 여전하다. 한국은 최대 43개의 규제 기관과 소통해야 할 정도로, 감독기관이 가장 많은 나라다.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양식도 서로 다르다. SDO 직원들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코로나19는 최근 몇 년간 사회를 뒤흔든 커다란 사건이다. 코로나19가 아시아 기부 문화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 있는가.
“코로나19가 준 교훈 중 하나는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예시로 싱가포르는 이주민 공동체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빠르게 번졌다. 싱가포르 정부의 코로나 대응이 이주민 집단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민의 백신 접종률은 낮았다. 모두 섞여 살아가는 사회에서 한 공동체의 위기는 집단 전체의 위기다. 약한 고리를 확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코로나19를 통해 취약계층의 건강 관리 시스템이 충분했는지, 또 의료격차가 일어난 곳은 어디인지 확인했을 것이다. 이때 정부와 SDO는 함께 협력해서 문제 지점을 살피고 예방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더 나은 기부 환경의 핵심은 ‘신뢰’
캡스는 NGO나 NPO 대신 ‘사회공익단체(Social Delivery Organization)’라는 뜻의 SDO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시아의 많은 NGO가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회적 기업처럼 영리적 특징을 가진 단체도 아우르기 위해서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특징은 정부가 기부 환경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다. 상당수 기업은 정부 정책 방향에 맞춰서 기부한다. 정부가 ‘지정기부금단체’를 선정하고, 직접 보조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기부단체와 정부가 보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서구권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은 정부와 SDO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정부와 SDO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한다’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파트너다. 특히 SDO가 사회 시스템을 바꾸고자 할 때, 정부와의 협력은 더욱 중요하다. 정부는 풍부한 자금을 가진 만큼 권한도 많고, 국민의 복지를 향상시킬 의무도 가진다. 신뢰 관계에서 쟁점은 바로 규제다. 연례 보고서 제출 의무와 같은 규제는 정부가 SDO를 신뢰하게 만드는 수단이 돼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SDO를 믿지 않고, 정작 SDO가 많은 규제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문제다. 규제가 목적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그 수준이 적절해야 한다.”
-DGI 2024에 따르면 한국 SDO가 뽑은 기부가 저조한 이유 1위는 바로 ‘사람들이 SDO를 신뢰하지 않아서’였다. SDO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SDO는 단체의 활동을 대중에게 알릴 책임이 있다. 홈페이지에 ‘누구’를 ‘어떻게’ 돕고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많은 기부자가 운영비 지출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만큼, 운영비가 필요한 이유를 설득해야 한다. 모든 단체는 인건비부터 사무용품, 사이버 보안에 이르기까지 많은 운영비를 쓴다. 특히 회계는 신뢰와 직결된 부분인데, 직원에게 회계 역량을 교육하는 것에도 운영비가 사용된다. 물론, 기부자가 운영비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려면 단체가 ‘기부금을 투명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촉진하는 기부의 미래
올해 캡스가 발표한 2024 DGI의 특별 조사 항목은 ‘디지털 기술의 활용’이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시아 SDO의 95%가 수혜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디지털 기술을 쓰고 있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디지털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고 응답한 SDO는 전체의 41% 수준에 그쳤다.
–이번 DGI 2024에서는 디지털 기술 활용에 대해 조명했다. SDO에게 디지털 기술은 왜 중요한 이슈인가.
“디지털 기술은 기부금 모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중국 기업 텐센트가 모인 기부금만큼 더 기부하는 모금 캠페인 ’99 Giving Day’가 있다. 모바일 메신저 앱을 통해 이용자들은 간단하게 기부할 수 있고, 캠페인은 SNS를 통해 퍼진다. 2023년 한 해에만 38억위안(한화 약 7303억원)이 모였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기부는 우리 사회에 이미 자리 잡았다. 기술의 또 다른 역할은 데이터베이스 관리다. 기부자를 추적하고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동시에 디지털 기술은 위협이기도 하다. 올해 조사에서 58%의 SDO가 ‘사이버 보안 계획이 없다’고 했다. 사이버 공격이 진화하는 오늘날, 디지털 기술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부 환경 또한 달라졌다. 또 다른 변화 지점도 있나.
“섹터 간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SDO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졌다. 대표적으로 기업의 경우 ESG와 지속가능성이 점차 중요해지면서, 대부분의 기업이 CSR에 참여하고 있다. 기업들은 예전보다 지역사회 공헌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기업재단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그렇다 보니 SDO의 전통적인 파트너는 정부였는데 기업 또한 중요한 파트너가 됐다. 제3섹터는 기업과 더 많은 협력 경험을 통해 신뢰를 쌓아야 한다.”
-최근 아시아 공익활동에서의 혁신적인 흐름을 짚어본다면.
“금융상품과 사회공헌을 결합한 방법들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들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사회성과연계채권(이하 SIB)’과 ‘혼합금융(Blended Finance)’이 있다. SIB는 SDO나 민간이 공공사업을 추진해 성과를 달성하면 인센티브를 준다. 혼합금융은 공공기관이 공적개발과 공공사업에 참여해 위험을 분담한다. 모두 민간과 SDO가 공익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후루사토(ふるさと) 납세를 본떠 고향사랑기부제를 만들었다. 기업 주도의 혁신도 눈에 띈다. 기업이 SDO에 돈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기부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카카오같이가치와 SK행복나눔재단의 곧장기부가 있다.”
다음날 만난 발표회에서 샤피로 대표는 DGI 조사의 목적은 ‘아시아의 기부 환경을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장점은 뾰족하게, 단점은 뭉툭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서구처럼 정부와 SDO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구조로 가야 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옳고 그른 방향은 없으며, 방법이 어떻든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시아에는 아시아만의 기부 환경과 문법이 있다. 우리 사회의 기부 환경을 먼저 파악하는 것, 기부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의 시작이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yevi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