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들이 “투표소에서 투표 보조인의 도움을 받지 못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다”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했다.
4일 부산지방법원 민사9부는 “공직선거법 규정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며 발달장애인 A씨 등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청구소송’ 청구를 기각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6항에 따르면 시각·신체장애로 혼자 기표할 수 없는 사람은 가족이나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할 수 있다. 하지만 발달장애인은 이동이나 손 사용에 어려움이 없다는 이유로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발달장애인이 후보자란에 정확히 날인하기 어려워도, 걸음걸이나 시력에 문제가 없으면 투표소 관계자들이 “시각·신체 장애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투표 보조를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2014년부터 ‘발달장애인도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지침을 별도로 마련해 발달장애인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제21대 총선을 앞둔 2020년 4월, 선관위는 선거지침에서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항목을 삭제했다. 총선 투표 현장에서는 발달장애인 투표를 돕기 위해 동행한 보조인들이 현장 투표관리인 판단에 따라 입장을 거부당하는 등 사태가 발생했다.
지난해 3월 대선 사전투표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이하 장추련)에 따르면, 부산지역에 거주하는 20여명의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이 침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추련은 “(현장관리자가)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투표 보조 요구를 거부했고 ‘가족이면 1인, 가족이 아니면 2인이 투표를 지원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 내용을 어긴 채 투표사무원 1명이 기표소에 같이 들어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장추련은 지난해 5월 발달장애인 3명을 원고로 부산지방법원에 임시조치 신청 및 차별구제·손해배상청구 소송장을 제출했다.
부산지법 재판부는 소송을 기각하면서 “투표 보조인 허용 여부를 결정하려면 원고들 상태를 반드시 현장에서 파악해야 한다”며 “원고들에게 무조건적인 편의를 제공해야 할 의무나 대한민국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주문 내용은 기각이지만 원고들이 주장하는 법리나 청구에 관한 기본적인 법리에 관한 내용은 상당히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판결 직후 부산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의 선거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마땅한 책임과 의무”라며 “발달장애인의 장애를 이유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행위이며 법 위반 행위”라고 주장했다.
소송대리인단은 “공직선거법이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오히려 침해하도록 해석되고 있다”며 위헌법률심판제청도 신청한 상태다. 대리인단은 이번 판결로 공직선거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도 기각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한상원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발달장애인은 장애를 근거로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법원은 여전히 법조문을 엄격하게 해석해 발달장애인을 투표 보조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문제로 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원고와 협의해 이번 판결 항소 여부와 공직선거법에 대한 헌법소원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