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4일(수)

창업 오디션 대명사 ‘H-온드림’… 이제 기업가 키운다

현대차정몽구재단 ‘H-온드림’

생태계 조성에만 10년
이제는 기업가 육성에 집중

경영 컨설팅 강화
투자 연계 기회도 확대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구 몬드리안서울에서 열린 '2023 H-온드림 데이'에 올해 지원팀으로 선정된 11기 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현대차정몽구재단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구 몬드리안서울에서 열린 ‘2023 H-온드림 데이’에 올해 지원팀으로 선정된 11기 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현대차정몽구재단

‘테스트웍스’는 인공지능(AI) 데이터 구축 산업을 선도하는 스타트업이다. 발달장애인 직원들과 함께 AI 학습용 데이터를 가공해 지난해 매출 97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예상 매출액은 약 150억원 수준이다. 최근에는 50억원 규모의 시리즈B 브릿지 투자를 유치하면서 누적 투자액 110억원을 돌파했다.

위기도 있었다. 2015년 설립 초기에는 ‘취약 계층 고용’이라는 소셜 미션을 고집하다가 낮은 품질 때문에 고객사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기도 했다. 윤석원 테스트웍스 대표는 창업 3년 차인 2017년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장애인 직원과 비장애인 직원이 유기적으로 일하는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R&D(연구·개발)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장애인 직원이 업무에 적응하려면 이들의 생활 루틴을 확인하고 필요에 따라 이들의 보호자와도 소통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윤 대표는 “R&D 자금이 절실했던 바로 그 시기에 현대차정몽구재단의 ‘H-온드림’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지원금 50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윤석원 테스트웍스 대표. /현대차정몽구재단
윤석원 테스트웍스 대표. /현대차정몽구재단

“지원금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작업치료사와 사회복지사들로 팀을 꾸렸습니다. 덕분에 장애인이 편견이나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포용적 고용(inclusive employment)’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어요. 직무 매뉴얼이 마련된 뒤 장애인 직원들의 업무 효율이 크게 올라 품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윤석원 대표는 지난달 30일 현대차정몽구재단이 주최한 ‘2023 H-온드림 데이’에서 최고의 사회 혁신 기업가에게 수여하는 ‘H-온드림 어워드’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됐다. H-온드림 어워드는 재단의 스타트업 지원 사업인 H-온드림의 펠로 기업가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올해 신설됐다. 윤 대표는 “창업 초기 지원이 없었더라면 취약 계층 고용이라는 소셜 미션에 기반한 비즈니스 확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가는 미래를 만드는 동반자” 설립자의 철학 담긴 사업

H-온드림은 재단 설립자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에서 출발한 사업이다. 정 명예회장은 평소 “기업가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립자의 이런 철학이 사업으로 실현된 게 2012년 시작된 ‘H-온드림 사회적기업 창업 오디션’이다. 소셜 미션을 가진 기업들을 선발해 지원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이후 H-온드림은 ‘사회 혁신가들의 등용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창업 오디션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동건 마이리얼트립 대표. /조선DB
이동건 마이리얼트립 대표. /조선DB

H-온드림 1기 선정 기업인 ‘마이리얼트립’의 이동건 대표는 “10년 전만 해도 사회 혁신 기업을 대상으로 한 지원 사업이 드물었다”면서 “생존 자체가 과제인 초기 기업들에 H-온드림은 이 바닥에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척도로 여겨졌다”고 했다. 마이리얼트립은 공정 여행을 테마로 여행자와 현지 가이드를 직접 연결하는 맞춤형 여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 기업이 줄폐업하던 시기를 이겨내고 지난해 매출 220억원을 기록했다. H-온드림 펠로 선정 이후 누적 매출액은 1147억원에 이른다. 이동건 대표는 “창업 초기에 경영 전략 수립부터 인적 네트워크 구축까지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던 프로그램”이라며 “펠로 기업들의 성장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같은 펠로 기업으로 큰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자극도 받는다”고 말했다.

노순호 동구밭 대표. /조선DB
노순호 동구밭 대표. /조선DB

6기 펠로인 노순호 동구밭 대표는 H-온드림 재수생이다. 창업 첫해인 2015년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농장을 운영하는 사업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노순호 대표는 “사업 모델을 비누 제조업으로 완전히 바꾸고 재도전 끝에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며 “단일 기업에 5000만원이나 지원하는 사업은 지금도 잘 없을 정도니 당시로서는 정말 크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사업 지원금을 마중물로 첫 해외 수출에 성공했다. 발달장애인이 만든 제품을 미국 시장에 직수출하게 되면서 품질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매출은 124억원으로 공장 직원 70명 가운데 35명이 발달장애인이다.

H-온드림의 지원을 받은 기업 수는 지난해까지 총 294곳. 재단이 사업 지원비로 투입한 금액은 192억원이다. 재단의 지원을 받은 펠로 기업들이 유치한 누적 투자액은 2588억원에 이른다. 사업 지원비의 10배가 넘는 규모의 투자를 이끌어낸 셈이다. 펠로 기업의 누적 매출액은 8950억원이며 일자리 창출 규모는 5293개에 이른다. 기업 생존율은 84% 수준이다.

창업 오디션 대명사 'H-온드림'... 이제 기업가 키운다
창업 오디션 대명사 'H-온드림'... 이제 기업가 키운다

기업가 발굴해 아낌없이 지원한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은 ‘사업’ 중심으로 선발하고 지원해온 H-온드림 운영 방식을 ‘사람’ 중심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사회 혁신 생태계 조성에 지난 10년을 보냈으니 앞으로의 10년은 ‘임팩트 유니콘’을 만들 기업가를 키운다는 게 재단의 설명이다. 최재호 현대차정몽구재단 사무총장은 “H-온드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생태계가 척박했지만 연간 20억원 정도의 지원금을 10년간 투입한 결과 생태계 조성이 어느 정도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제는 재단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인재를 키우는 일을 시작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박찬재 두핸즈 대표는 H-온드림 펠로 기업가들 중에서도 특별한 케이스다. 중간에 사업 모델을 완전히 피버팅(Pivoting)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2012년 두손컴퍼니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박 대표는 노숙인을 고용해 종이 옷걸이를 제작,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옷걸이 판매로는 매출이 늘지 않았고 노숙인을 더 이상 고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결국 창업 4년 차인 2015년, 소셜벤처 물류 대행 서비스로 과감히 사업을 전환했다. 이후 회사는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해 지난해 연매출 255억원을 기록했다. 또 전체 직원의 30%를 취업 취약 계층으로 고용하는 등 ‘일자리의 기회를 넓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초창기의 미션을 지켜나가고 있다.

두핸즈는 피버팅 전과 후 각각 H-온드림 2기와 6기로 선발돼 현대차정몽구재단의 지원을 총 두 번 받았다. 박찬재 대표는 “사업을 전환한 이듬해에 H-온드림 지원을 한번 더 받게 됐는데 그때 정말 큰 도움이 됐다”면서 “투자자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고 대외적으로도 우리가 하는 일이 더 많이 알려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 초기에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에 창업가가 관여하기 때문에 창업가의 역량에 기업의 존망이 달렸다고 볼 수 있다”면서 “사업 단계가 낮을수록 비즈니스 모델보다는 창업가 개인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종규 식스티헤르츠 대표. /현대차정몽구재단
김종규 식스티헤르츠 대표. /현대차정몽구재단

김종규 식스티헤르츠 대표는 지난해 선정된 10기 펠로다. 그는 “초기 기업은 망망대해에 떠있는 돛단배와 같아서 작은 파도에도 출렁이게 된다”며 “처음 세운 계획을 너무 고집하면 오히려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에 기업가 개인 역량을 키워 융통성 있게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스티헤르츠는 AI를 활용해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통합 관리하는 가상발전소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 공공데이터 활용 창업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 소셜벤처 경진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에서 에너지 분야 혁신상을 받았다. 1년 새 직원은 6명에서 30명으로 늘었고 올해 매출액은 전년보다 3배 성장한 20억원으로 예상된다.

김 대표는 “원래 연구·개발 일을 했기 때문에 경영이나 회계, 조직 관리에 대해 잘 몰랐는데 H-온드림 펠로가 된 뒤에 이런 부분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면서 “지난해 7월에는 재단의 지원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 임팩트 투자자 네크워크 행사인 ‘AVPN(Asian Venture Philanthropy Network)’에 참여해 비즈니스 모델을 세계 무대에 소개하고 해외 기업과 협력 방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단은 기업가의 역량 강화를 위해 경영 컨설팅을 강화하고 투자 연계 기회도 확대할 방침이다. 올 10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국제 임팩트 투자 콘퍼런스인 ‘SOCAP(Social Capital Markets)’에 펠로 기업 연수단을 꾸려 참여한다. 연수단은 10월 23일(현지 시각)부터 사흘간 현지에 머물며 해외 임팩트 투자 기관의 노하우를 전수받고 글로벌 네트워크 기회도 얻는다. 권오규 현대차정몽구재단 이사장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미래 가치’에 대한 투자로 출발한 H-온드림이 이제는 사회문제 해결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며 “앞으로 소셜 미션을 추구하면서 경제적 가치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업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재단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