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2일(일)

현대차정몽구재단, 국제기구 전문인력 키운다

국격 높이는 글로벌 인재육성

실무자급 전문직 ‘P2’ 인력풀 확대
아세안 사회문제 해결 전문가 육성

“청년들은 세계 최대의 미개발 자원입니다.”

제7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난(Kofi Annan·1938~2018)은 평소 청년들의 역량과 잠재력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어쩌면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미국으로 유학 간 스무 살 때 포드재단의 지원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를 국제기구로 이끌었다. 그는 1962년 24세 나이로 세계보건기구(WHO) 예산·행정 담당관으로 국제기구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유엔아프리카경제위원회(UNECA), 유엔난민기구(UNHCR) 고등판무관, 유엔본부 예산담당관과 유엔평화유지군(PKO) 담당 사무차장 등을 두루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그에게는 늘 최초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아프리카계 흑인 최초로 유엔을 이끌었고, 2001년 현직 유엔 사무총장으로 처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유엔 평직원 출신으로 수장 자리까지 오른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온드림 글로벌 아카데미’(OGA) 6기 장학생들이 미국 현장 학습으로 뉴욕의 유엔본부를 방문했다. /현대차정몽구재단
지난 2월 ‘온드림 글로벌 아카데미’(OGA) 6기 장학생들이 미국 현장 학습으로 뉴욕의 유엔본부를 방문했다. /현대차정몽구재단

60년 전 청년 코피 아난처럼 한국에도 국제기구 진출을 꿈꾸는 수많은 청년이 있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은 우리나라 청년들을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기 위한 여러 장학 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제기구 취업을 돕는 ‘온드림 글로벌 아카데미’(OGA)와 아세안 지역 전문가를 육성하는 ‘CMK 아세안 스쿨’(CSAS) 사업이 대표적이다. 특히 OGA는 국제 전문가 교육에 국제기구 ‘인턴십’ 기회까지 제공하는 국내 최초의 프로그램이다.

국제기구로 가는 사다리

외교부에 따르면 국제기구에 진출한 한국인 직원 수는 지난해 기준 1120명. 유엔 사무국의 152명을 포함해 세계보건기구(WHO), 유엔환경계획(UNEP), 세계은행(WB) 등 다양한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10년 전 480명과 비교하면 큰 폭의 성장세지만 국가 위상에 비하면 아쉬운 숫자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이 7년째 진행하고 있는 OGA 사업은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은 “국제기구 직원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 빈곤, 질병 등의 문제를 다루는 ‘국제 공무원’”이라며 “우리나라 청년들이 인권·환경·보건 등 국제사회의 다양한 분야로 진출해야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더 높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차정몽구재단, 국제기구 전문인력 키운다

유엔기구 직원들의 직급은 ▲D(Director·국장급 전문직) ▲P(Professional Staff·실무자급 전문직) ▲GS(General Service·일반직)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D급 인력은 경력 15년 이상의 관리직으로 본부 국장급이나 현지 사무소 대표급이다. P급 인력은 가장 아래 단계인 P1부터 P7까지 7단계로 나뉜다. P1에서 단계별 P7로 승진하는 구조다. GS는 비서나 운전기사, 건물관리사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직급이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의 목표는 외교관이 아닌 민간 전문 인력을 육성해 국제기구 고위직으로 한국인을 진출시키는 것이다. 국장급인 D급 인력을 늘리는 게 최종 목표지만, 첫 단계 목표로 삼은 건 실무자급 전문직인 ‘P2′ 인력 풀을 확대하는 것이다. P1은 무경력 전문직으로 일종의 수습사원이라 할 수 있다. 전문직 인정을 받게 되는 건 경력 2년 이상을 가진 P2부터다. P2에서 D1까지 올라가려면 보통 15년 정도 걸린다.

‘한국인 P2 육성’은 현대차정몽구재단의 국제협력 부문 장학사업인 OGA를 통해 이뤄진다. OGA 프로그램은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과 협력해 2017년에 시작됐다.

한국인 최초로 유엔 수장이 된 반기문 전 사무총장의 임기가 끝난 이듬해였다. 반 전 총장의 10년 임기 동안 국제기구 진출을 꿈꾸는 이른바 ‘반기문 키즈’들은 늘었지만 이들을 지원하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은 부족한 상황이었다.

재단은 OGA 사업을 통해 국제기구나 국제 NGO 진출을 꿈꾸는 청년들을 선발, 10개월간 전문 교육을 제공한다. 해외 진출 시 초기 정착을 위한 장학금도 최대 900만원까지 지급했다. 다른 장학금을 받고 있어도 중복으로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국제기구 본부가 모여 있는 미국 뉴욕이나 스위스 제네바는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높은 도시 가운데 하나다. 청년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일을 배우기 위해서는 장학금이 절실하다.

국내에 국제기구 지원 프로그램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대부분 대학이나 학과 차원에서 이뤄지는 프로그램이라 한 학기 수준의 단기 교육에 그친다. 정부 차원에서 국제기구 초급 전문가(JPO·Junior Professional Officer) 과정을 개설해 국제기구에 수습 직원을 파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학위, 어학, 경력까지 갖춰야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취업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OGA는 경력이 전혀 없는 시작 단계의 청년들을 위한 초기 교육부터 현장 실습, 장학금 지원, 네트워크 구축 등 생애주기별 통합 관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프로그램과 차별된다.

국격 높이는 글로벌 맨파워

올해부터는 OGA의 심화 과정인 ‘APOHS(아포스)’가 추가됐다. 기본 OGA 과정을 수료한 장학생과 현대차정몽구글 글로벌 장학생 중에서 10명을 뽑아 제네바 소재 유엔 사무국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위해 현대차정몽구재단은 지난달 28일 국내 최초로 유엔사회개발연구소(UNRISD)와 협약을 맺고 한국의 청년들을 제네바 국제기구로 파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아포스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현지에서 열흘간 유엔 직원에게 교육을 받고, 3개월 인턴 업무를 수행한다. 재단은 장학생들에게 각각 해외 정착금으로 월 350만원(약 2450스위스프랑)씩을 3개월간 지원한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이 글로벌 인재 육성에 집중하는 건 재단 설립자인 정몽구 명예회장의 철학과도 맞닿아있다. 평소 정 명예회장은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면서 “스스로 꽃과 강이라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단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미래 세대에 투자하는 이유다.

현대차정몽구재단, 국제기구 전문인력 키운다

지난 6년간 OGA 과정을 밟은 수료생은 200명이다. 이 가운데 71명이 국제기구로 진출했다. 이들은 세계 38국 45개 기관에서 국제 문제를 다루고 있다. OGA 2기 출신인 박혜린(35)씨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세계보건기구(WHO) 아메리카 지역 사무소에서 프로그램 관리, 파트너십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생명정보학을 전공한 그는 2018년 현대차정몽구재단의 장학 지원을 받아 그해 10월부터 WHO 모리타니아 지역 사무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이듬해 WHO 볼리비아 지역 사무소로 자리를 옮겨 컨설턴트로 근무했고 지난해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아동기금(UNICEF) 본부에서 1년간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백신 정보를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박씨는 “관련 분야를 전공하긴 했지만 정보가 부족해서 국제기구 취업을 멀게 느꼈었다”면서 “전문가 강의를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OGA 프로그램이 국제기구 진출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네스코(UNESCO) 인턴으로 근무 중인 이우영(28)씨는 OGA 6기 출신이다. 그는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의회에서 첫 인턴십을 했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OGA를 통해 만났던 현직 선배들의 조언으로 해결했다”고 말했다.

한-아세안 협력 이끌 리더 키운다

재단의 글로벌 인재 양성의 또 하나의 큰 축은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지역 전문가 육성이다. 아세안 회원 10국의 국가총생산(GDP)은 3조6580억달러다. 인구는 6억7200만명으로 유럽연합(EU) 인구 4억4700만명보다 2억명 이상 많고, 인구 구성에서 35세 미만이 약 60%를 차지할 정도로 젊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은 한국과 아세안의 협력을 주도할 차세대 리더를 키운다는 목표로 지난 4월 ‘CMK 아세안 스쿨’(CSAS) 사업을 시작했다. 아세안 지역 문제를 연구하고 현지에서 직접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국내 최초의 ‘현장 밀착형’ 교육 과정이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장을 맡은 신재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러 대학에서 아세안 관련 교육을 진행하지만 대부분 언어 중심으로 구성됐다”며 “아세안에 대한 통합적인 교육을 제공해 정치·학문·비즈니스 분야에서 활약할 인재를 키우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CSAS는 동남아 국가에 진출할 청년을 대상으로 전문가 강의, 해외 현지 탐방, 연구 프로젝트 수행 등 크게 세 단계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글로벌 인재 육성에 투입되는 강사진도 화려하다. 김창범 전 주인도네시아 대사와 서정인 전 주아세안대표부 대사를 비롯해 정치·경제·국제관계 전공 학자 19명이 포진됐다.

현재 1기 15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고 있다. 연구 프로젝트는 ▲정치외교 ▲사회문화 ▲경제경영 ▲역사 ▲도시개발 등 다섯 개의 큰 주제 중에 골라 자율적으로 진행된다. 아세안 국가들이 당면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정책 설루션을 제공하는 게 목표다. 재단은 오는 11월 프로젝트 결과를 발표하는 지식공유포럼을 개최할 계획이다. 신재혁 교수는 “재단과 아세아문제연구원은 아세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석·박사 과정을 2026년 개설할 계획”이라며 “향후 한국과 아세안의 정치·문화·비즈니스 교류와 국가 간 협력을 추진할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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