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7일(화)
“대기시간만 5년… 장애아동 재활치료 시스템, 이제 바꿔야죠”

[인터뷰] 이지선 서울재활병원장

브라이언임팩트 재단, 병원에 50억원 기부
“아이들의 재활 돕는 관리 시스템 만들 것”

두세 살짜리 아이들이 ‘스탠더’에 의지해 몸을 세우고 있다. 장애나 질병으로 혼자 서 있기 어려운 아동의 기립 훈련을 돕는 보조 기구다. 물리치료실에 치료기구보다 장난감이 훨씬 많다. 신기하게 생긴 딸랑이, 노래가 나오는 책, 누르면 소리 나는 인형. 어린 환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활치료사들이 장난감을 번갈아 대령한다. “잘한다” “예쁘다” 칭찬해가며 아이들의 움직임을 살핀다.

“오늘도 선생님들의 ‘꼬시리제이션’이 한창이네요(웃음). 재활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을 잘 꼬드기고 달래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게 하는 기술(?)인데, 우리끼리는 꼬시리제이션이라고 불러요. 어찌보면 소아 재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죠. 재활치료라는 게 어른들도 쉽지 않잖아요.”

서울재활병원이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의 ‘임팩트 그라운드’ 사업에 선정돼 50억원을 기부받았다. 이지선 서울재활병원장은 “병원이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장애 청소년들이 병원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건강과 생활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주민욱 C영상미디어 기자
서울재활병원이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의 ‘임팩트 그라운드’ 사업에 선정돼 50억원을 기부받았다. 이지선 서울재활병원장은 “병원이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장애 청소년들이 병원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건강과 생활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주민욱 C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2월 30일. 이지선(55) 서울재활병원장과 함께 은평구에 있는 병원 본관 건물을 둘러봤다.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구성된 본관은 소아 재활환자들을 위한 입원 병동과 각종 치료실로 구성돼 있다. 학교 종이 울리듯 30분마다 음악이 울렸다. 환자와 보호자는 종소리에 맞춰 물리치료, 작업치료, 감각통합치료, 언어치료 등 필요한 치료를 받으러 이동한다. 설립된 지 25년 된 병원이다 보니 명성에 비해 공간이 좁다. 복도나 로비의 자투리 공간은 모조리 ‘유모차 주차장’으로 쓰이는 형편이다.

“짚신 장수 우산 장수 이야기 아시죠? 제가 그 엄마 같은 심정입니다.”

병원이 없어서 재활치료를 받지 못하는 장애아동이 너무 많다고 했다. 서울재활병원의 경우 소아는 평균 2년, 청소년은 평균 3년을 기다려야 외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오랜 대기시간을 거쳐 치료를 시작해도 최대 2년까지만 받을 수 있다. 기다리는 환자가 많다 보니 형평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무작정 대기하는 아이들도 걱정, 충분히 치료받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야 하는 아이들도 걱정이다.

짚신 장수 우산 장수 엄마의 걱정이 어쩌면 조금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재단법인 브라이언임팩트가 서울재활병원에 50억원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비영리단체를 선발해 ‘큰돈’을 기부하는 ‘임팩트 그라운드’ 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기부금 50억원은 유럽 등 선진국보다 한참 뒤처진 장애아동 재활치료 서비스를 개선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재활 난민’이라 불리는 아이들

―기부 소식을 전해 듣고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나요.

“기뻤죠. 기부금이 50억원이나 된다고 해서 너무 놀랐고요. 지금까지 병원이 단일 기부로 받은 가장 큰 액수가 1억원이에요. 무엇보다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이 장애아동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로 인식했다는 점이 기뻤어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병원 직원들은 뭐라던가요.

“너무나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 도전해 볼 수 있게 돼서 다들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책임감과 부담감도 들고요.”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라면?

“가장 큰 문제가 소아·청소년 재활 환자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없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이 스스로를 ‘난민’이라 부르고 있어요. 치료를 받으려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기다리는 ‘재활 난민’이요. 13세가 넘어가면 난민조차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재활을 시행하는 의료 기관은 우리 병원밖에 없어요. 난민이라도 좋으니 제발 불러만 달라고 하는 거죠. 의료 공백이 심각합니다.”

이지선 서울재활병원장이 재활치료 중인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아이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닌 즐겁고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주민욱 C영상미디어 기자
이지선 서울재활병원장이 재활치료 중인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아이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닌 즐겁고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주민욱 C영상미디어 기자

―청소년 재활이 이렇게 어려워진 이유가 뭔가요.

“과거에는 ‘청소년은 재활을 해도 효과가 없다’ ‘더 해줄 게 없다’는 잘못된 인식이 있어서 만 12세가 되면 치료를 종결했습니다. 청소년 재활을 하려면 체형에 맞는 장비를 전부 새로 갖춰야 하니 어느 병원도 선뜻 나서질 못하죠. 우리 병원이 2006년 ‘청소년 전담팀’을 만들어서 치료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턱없이 부족해요.”

―청소년 대기자가 얼마나 되죠.

“수백 명입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대기를 시작하면 고 3이 돼야 치료를 받을 수 있어요. 소아와 청소년을 다 합하면 대기자가 1300명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거예요. 중증인 아이들의 경우 제때 재활치료를 못 받으면 키가 자라면서 고관절이 빠지고 허리가 휘어요. 이것저것 해봐도 우리 안에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더라고요.”

―안타깝네요. 해결책이 있을까요.

“재활 전문 병원이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모든 장애아동·청소년이 평생에 걸쳐서 재활치료를 받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그래서 IT의 힘을 빌려볼까 합니다. 모든 아이가 병원에 올 순 없으니까 지역사회와 학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의 재활을 돕는 관리 시스템, 플랫폼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아이들의 생애 주기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건강 문제와 생활 문제를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측해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해요. 이번에 기부받은 돈으로 이것부터 해볼 생각이에요.”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진심’

서울재활병원은 1998년 설립됐다. 이후 재활에 관한 거의 모든 ‘최초’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1999년 재활심리치료, 스노즐렌치료, 감각통합치료 등을 국내 재활병원 중 처음으로 시작했다. 2002년에는 최초로 ‘소아낮병동’을 만들어 소아 재활치료 풍경을 완전히 바꿔놨다.

―’소아낮병동’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세요.

“장애 아동이 낮에 6시간 정도 입원해서 집중 치료를 받고 갈 수 있는 병동이에요. 원래는 이런 게 없어서 집중 치료를 받으려면 무조건 장기간 입원을 해야 했어요. 집에 남겨진 가족, 특히 장애 아동의 다른 형제자매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죠. 낮병동 생기고 부모님들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우리가 시작한 낮병동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아온 병원만 100곳이 넘어요.”

―최초가 많았다는 건 그만큼 길이 험난했다는 뜻이겠죠.

“우리 병원직원들이 좀 특이해요(웃음). 누군가는 이걸 개척 정신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고생 유전자라고 하더군요.고생을 사서 한다고요. 환자에게 필요하다 싶은 게 있으면 끝까지 방법을 찾아내요. 이 시스템은 왜 없는 거지? 어떻게 해결할까? 같이 모여서 연구하고 디자인했던 시간이 이제 우리의 조직문화가 됐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가 환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요.

“태어나자마자 뇌성마비로 몸 한쪽이 마비된 여자아이가 있었죠. 돌 지나서부터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어요. 병원 근처 살아서 초등학교 왔다 갔다 하면서 병원에 들러 인사도 하고 가곤 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병원 와서 봉사 활동도 했어요. 한쪽 손을 잘 못 쓰는데도요. 지금은 대학에 갔죠. 장애아동을 돕는 언어치료사가 되겠대요. 그 애 꿈이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는 거라고 합니다. 기저귀 찰 때 봤는데 언제 그렇게 컸나 싶어 기특해요. 그리고 한 사람 더 있어요.”

―누구인가요.

“레지던트 1년 차 때 만난 아이가 있는데 내가 봤던 아이들 중에 최중증인 환자예요. 하루 종일 몸을 뻗치고 있어서 엄마가 계속 품에 안고 있어야 했어요. 가래도 혼자 못 뱉고 경련도 계속 있어요. ‘엄마’라는 말조차 해본 적 없는 그 아이가 서른 살이 됐어요. 엄마는 아이를 서른 살까지 업고 다녔어요. 얼마 전에 뵀는데 ‘이제는 체력이 안 돼요’하시더군요.”

―여러 돌봄 체계가 생겨났지만 여전히 가족이 감당해야 할 몫이 큰 것 같아요.

“언젠가 장애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지구라는 행성에 혼자 살고 있는 느낌’이라고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정서적으로도 외롭고 힘든 일이죠. 장애 아동이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가족에 대한 지원체계가 더 많아져야 해요. 우리 병원은 2019년 재활병원 최초로 ‘가족지원센터’를 만들어 보호자 멘토링과 심리치료, 비장애 형제자매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어요.”

서울재활병원은 현재 ‘새 병원’ 건립을 준비 중이다. 민간의 기부도 시작되고 있다. 브라이언임팩트 재단의 기부금이 그 마중물이 됐다.

“새 병원의 핵심은 ‘IT’와 ‘커뮤니티’입니다. 병원이 생기면 더 넓고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아이들이 치료받게 될 거예요. 병원과 지역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장애 아동을 함께 돌보는 혁신적인 모델이죠. 장애 아이도 엄마도, 행성에 혼자 남는 일은 없을 겁니다.”

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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