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인터뷰] 조명환 월드비전 회장 “후원은 누군가의 인생 바꾸는 기적 같은 일, 내 이야기처럼”

구호기관 도움 받았던 아이가
월드비전 맡게 된 건 ‘운명’ 같아

꾸준히 기부금 보내온 美 어머니
이젠 네가 ‘기적’ 선물하라는 것

화살은 혼자서 날아갈 수 없다. 화살을 힘껏 쏘아 올려줄 활이 필요하다. 지난달 24일 만난 조명환(65) 월드비전 회장은 칼릴 지브란의 시집 ‘예언자’에 나오는 활과 화살 이야기를 했다. “세상의 모든 어른을 향해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활, 아이들은 화살. 그대들의 아이가 살아있는 화살이 되어 미래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하라. 저도 그런 활이 되려 합니다.”

어린 시절 조명환 회장은 가냘프고 초라한 화살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서울에서 가장 빈민촌이던 금호동 달동네 판잣집에서 태어났다. 젊은 실향민 부부의 아이로 태어난 그가 딱해 보였는지 주변에서 도움받을 곳을 알아봐 줬다. 구호기관 직원이 집으로 찾아와 갓 태어난 그를 확인하고 미국인 후원자를 연결해줬다. 후원자는 매달 한국어로 번역된 편지 한 통과 15달러를 보내왔다. 가난한 가족의 한 달 생활비였다.

구호기관의 도움으로 자란 아이가 한국 월드비전의 수장(首長)이 됐다. 조명환 회장은 “운명이 이끈 자리”라고 했다. “올해 1월 취임하고 6개월이 흘렀어요.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제가 여기에 온 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난하고 공부도 못했던 제가 꿈을 꿀 수 있었던 건 후원 덕분이었죠. 그 활이 저를 당겨 여기로 보냈나 봐요.”

조명환 월드비전 회장은 ‘운명’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교수, 벤처기업가, 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커리어를 거치며 유엔기구, NGO, 정치인, 연예인 등과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모두 월드비전을 잘 이끌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한준호 C영상미디어기자

운명이 이끌다

조명환 회장은 세계적인 에이즈 전문가다. 건국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바이오 관련 벤처회사를 창업해 운영한 경험도 있다.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가난한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대규모 모금을 진행하기도 했다. 각국 정부, 국제기구, 영리기업 등과 협업해 ‘고통없는 후원금 제도’라는 걸 만들었고 5년간 2조원에 달하는 기금을 조성했다. 수백만 명이 이 기금의 혜택을 받고 있다.

―월드비전 오기 전에도 사실상 비슷한 활동을 했었네요.

“그래서 운명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우고 겪은 일들이 신기하게도 다 월드비전과 연결돼 있어요. 마치 여기 오려고 그런 경험을 한 것처럼요.”

―취임 후 6개월간 어떻게 지냈습니까.

“월드비전 직원 700여 명을 거의 다 만났습니다. 전국 지부도 다 돌았어요. 보통은 관리자급부터 만난다던데 저는 반대로 했어요. 막내들부터 만났어요. ‘간사’들이라고 부르죠. 월드비전에서 일한 지 1~2년 된 직원들과 거의 매일 점심을 먹었어요. 그들이 월드비전을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했어요. 뭐가 어렵고 뭐가 바뀌었으면 좋겠는지 열심히 들었습니다.”

―20대 직원들과 말이 잘 통하던가요.

“저도 월드비전 신입이라 막내들이랑 더 잘 통하는 면이 있었죠(웃음). 막내급부터 시작해 점점 높은 연차들을 만났어요. 차장급만 돼도 제게는 ‘대선배님’이니 배울 게 많았습니다. 10년, 20년씩 월드비전에서 일하며 느낀 점, 경험과 노하우를 압축해 들을 수 있어서 매우 유익했어요.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됐고요.”

―몰랐던 사실이라면?

“월드비전이 외국 기관인 줄로만 알았는데 한국에서 시작됐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국전쟁 당시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아이들을 돕기 위해 미국인 목사님이 만든 기관이 바로 월드비전이에요. 현재 전 세계에 월드비전 회원국이 100곳 있는데 20여 곳은 ‘도움을 주는 월드비전’이고 나머지는 ‘도움을 받는 월드비전’이에요. 한국은 원래 도움을 받는 기관이었는데 1991년 도움을 주는 기관으로 전환됐어요. 지금은 미국, 캐나다, 호주에 이어 4번째로 후원 규모가 큽니다.”

―회원국이 100개나 됩니까.

“규모로만 따지면 유엔(UN) 다음으로 크죠. 직원 수가 3만5000명. 연간 예산이 3조4000억원에 달해요. 지금까지 누적 2억명의 아이를 도왔습니다. 두바이, 쿠알라룸푸르 등 전 세계 5곳에 대형 물류 창고를 운영하면서 100개 회원국이 서로 긴밀하게 도움을 주고받고 있어요.”

영화보다 영화 같은

한국월드비전의 정기 후원자는 지난 5월 말 기준 60만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모인 후원금만 2572억원. 국내 NGO 가운데 최대 규모다. 수십 년째 한 달에 몇백 명의 아이를 후원하는 연예인도 있고, 수억원의 큰돈을 내놓는 고액 기부자들도 있다. 조명환 회장은 “돈이 많아서 후원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라며 “어린아이를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 때문에 후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후원자님들의 60%가 ‘부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후원을 이어가는 분들이 많아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린 아이를 돕고 시장에서 장사해서 번 돈으로 후원합니다. 그들을 보면 저절로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릴 때 후원금을 보내주셨다던 미국인 어머니요?

“에드나 넬슨. 어머니 이름이에요. 무려 45년 동안 15달러와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1990년에 제가 건국대학교 교수가 됐는데 그때까지도 돈을 부치셨어요.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만 540여 통입니다. 듣기로는 제가 중학생 되던 해에 돈을 그만 보내도 된다고 했는데도 계속 보내셨다고 해요.”

―교수가 된 후에도 15달러를 보내셨다고요?

“보내주신 돈으로 출근길에 빵 사먹었다고 하면 ‘잘했다’며 좋아하셨죠. 저는 어머니가 부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25년간 초등교사로 근무하다 은퇴하고 편의점 청소일을 하는 소시민이었어요. 어머니가 99세가 되셨을 때 미국으로 찾아가서 만났는데 그때까지 비행기도 한번 안 타봤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를 만나셨군요.

“미국에서 유학할 때 어머니에게 만나러 가겠다고 했는데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세 번이나 거절당했죠. 교수가 되고 5년쯤 지났을 때 문득 어머니 나이를 계산해보니 99세나 되신 거예요. 이러다 얼굴도 못 뵙고 돌아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연락도 안 하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공항 도착해 렌터카를 빌려 타고 네브래스카주에 있는 어머니댁으로 향했죠. 어머니가 사는 하얀 2층집 앞에 차를 세웠는데 너무 떨리고 벅차올라서 한 시간 동안 집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니 어머니의 동생 릴리안 이모가 문을 열어주며 깜짝 놀라더군요. ‘네가 여기 어떻게 왔느냐’고 해서 ‘어머니 보러왔다’고 했어요. 릴리안 이모가 2층으로 올라가 어머니에게 제가 왔다는 말을 전했는데, 곧 내려오신다던 어머니가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불쑥 찾아와서 불쾌하셨나 싶어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2시간 만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셨어요. 새하얀 바지에 빨간 상의, 빨간 하이힐을 신은 어머니가 웃고 계셨습니다.”

―아들 왔다고 꾸미느라 늦게 나오신 거네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목욕을 하고 머리를 다듬고 빨간색 루주까지 바르고 나오셨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평생 처음 봤어요. 제 눈에는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어머니의 집에서 일주일간 먹고 자며 지내다 왔어요. 재밌는 건 동네 사람들이 전부 저를 알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어머니는 결혼을 안 하고 독신으로 사셨는데 제 사진을 이웃들에게 보여주면서 ‘아들 자랑’을 하셨대요. 명환이가 초등학교에 갔대, 대학교 갔대, 결혼했대, 교수 됐대, 하시면서요.”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영화로 나온다면 한석규씨가 제 역할을 맡으면 좋겠어요. 닮았다는 얘기 좀 들었거든요(웃음).”

까먹지 마라

―전 세계 월드비전의 공동 목표는 무엇인가요.

“가장 집중하는 건 ‘취약한 아동을 돕는 것’입니다. 글로벌 차원에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초즌(chosen) 캠페인’이라는 게 있어요. 세계 최초로 시도하는 혁신적인 아동 후원 캠페인이죠. 예전에는 후원자가 사진을 보고 후원아동을 골랐잖아요. 초즌 캠페인은 거꾸로 후원아동에게 후원자를 선택하게 합니다.”

―후원아동이 자신의 후원자를 직접 고른다?

“결연 과정을 보면 뭉클합니다. 후원자들이 선택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요. 온 가족이 총출동해 가장 예쁜 옷을 차려입고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어 보냅니다. 후원아동에게 후원자를 선택한 이유를 들어보면 그건 더 감동적이에요. 세상을 떠난 엄마와 닮아서, 사진 속에 자기 동생과 닮은 아이가 있어서 라고 이유를 말합니다. 후원자들은 선택받았다는 것 자체로 한번, 이유를 듣고 또 한 번 감동을 받습니다.”

―한국월드비전이 지난해 만든 ‘베이크’라는 플랫폼도 재밌던데요.

“재밌죠? 기존에는 월드비전이 캠페인을 만들고 대중에게 ‘후원하세요’하는 방식이었는데 이건 개방형 캠페인이에요. 누구나 들어와서 대화를 나누고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프로젝트를 진행해 모금을 하는 일종의 ‘놀이터’죠. 올 하반기에는 베이크에 ‘블록체인’기술을 접목시킬 계획이에요. 소셜 캠페인의 기획, 모금, 사업 수행, 회계 등 전 과정을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평범한 개인의 작은 마음들이 연결되고 모여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게 하자는 게 베이크의 목표입니다.”

후원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조명환 회장은 말했다. 자신이 바로 그 증거라고 했다. “어린 시절 제겐 희망이 없었요. 그런데 한 달만 되면 편지와 돈이 오는 거예요. 나를 응원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게 힘이 되기 시작했어요. 아프리카 어딘가에도 어린 조명환이 있을 거예요. 그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게 월드비전이 도울 겁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월드비전 회장이 된 걸 돌아가신 에드나 어머니가 알았다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솔직히 이해가 안 갔어요. 어머니가 대학교수인 제게 15달러를 보내는 이유를요. 제게 그 돈이 필요할 리가 없잖아요. 나중에는 좀 귀찮기도 했어요. 환전을 하러 가야 하니까.”

15달러의 의미를 그는 월드비전 회장이 된 후에야 알게 됐다고 했다. “까먹지 말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어머니도 저를 후원하면서 놀라셨을 거예요. 제가 미국 가서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는 걸 지켜보면서 저 아이에게는 어떤 소명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셨겠죠. 그래서 계속 돈을 보냈을 겁니다. 네가 후원아동이었다는 걸 절대로 까먹지 마라, 너는 기적이다, 그 기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라.” 조명환 회장은 울었다. 뒤늦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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