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화)

[Cover Story] 히트 제조 디자이너, 나눔을 히트시키다

카이스트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 배상민 교수
세계 디자인 무대서 최연소 교수로 이름날려
코닥 디지털카메라 등 만든 제품마다 ‘인기’
‘접는 MP3 플레이어’ 애플 ‘아이팟’ 제치고 획기적 디자인으로 찬사
소비자, 포장 푼 뒤에야 나눔상품인지 알게 돼…
그만큼 제품 질에 승부
8년째 수익금 전액 기부
저소득층 교육지원 쓰여

“살기좋은 마을 선물하러 이번엔 아프리카로 떠나요”

동양인 최초로 27세에 세계 3대 패션스쿨 중 하나인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의 최연소 교수로 강단에 선 디자이너가 있다. 그의 손을 거친 제품은 항상 ‘대박’이었다. 코닥의 디지털카메라가 그랬고, 3M의 포스트잇 패키징이 그러했다. 소비자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한 그의 제품은 곧장 기업 매출 신장으로 이어졌다. 코카콜라·샤넬·가네보·랄프로렌·골드만삭스·JP모건 등 미국의 대표 기업들이 앞다퉈 제품과 기업 로고(CI) 디자인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05년 13년간의 화려했던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돌연 귀국, 카이스트(KAIST)에 ‘사회공헌디자인연구소’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로 ‘사회공헌디자인(Philanthropy Design)’ 개념을 만든 그는 기부 상품을 기획·디자인해, 수익금 전액을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기부하는 나눔 프로젝트를 8년째 지속해오고 있다. 궁금했다. 미국의 성공한 디자이너로 꼽히던 그가 ‘기부 상품’과 ‘사회공헌디자인’에 열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7일 오후, 카이스트에서 배상민(40) 교수를 만났다.

2005년부터 매년 한개씩 '나눔 상품'을 기획ㆍ출시하고 있는 배 교수는 "디자인을 어떻게(HOW) 할지 고민하기 전에, 왜(WHY) 디자인하려 하는지 동기에 집중하면 소비자의 마음을 여는 '착하고 똑똑한'상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배 교수가 '2012 IDEA 어워드'에서 동상을 받은 '사운드 스프레이(모기 퇴치 음파 발생기)'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2005년부터 매년 한개씩 ‘나눔 상품’을 기획ㆍ출시하고 있는 배 교수는 “디자인을 어떻게(HOW) 할지 고민하기 전에, 왜(WHY) 디자인하려 하는지 동기에 집중하면 소비자의 마음을 여는 ‘착하고 똑똑한’상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배 교수가 ‘2012 IDEA 어워드’에서 동상을 받은 ‘사운드 스프레이(모기 퇴치 음파 발생기)’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상업 디자인을 하면서 ‘아름다운 폐품(廢品)’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선 소비자가 첫눈에 매력을 느껴 구입하도록 만들고, 6개월이 지나면 싫증을 느끼도록 제품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디자이너라고 하죠. 제가 디자인한 상품이 광고에 나오고, 상을 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디자인이 사람들의 과소비를 조장하고, 환경 문제를 유발한다는 죄책감이 들었거든요. 6개월마다 사라지는 디자인이 아니라 주는 쪽도 받는 쪽도 행복한 디자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그의 디자인연구소 이름에도 반영돼있었다. ‘ID+IM’. ‘I DESIGN, therefore I AM(나는 디자인을 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약자다. ‘D’에는 디자인(DESIGN) 외에도 드림(DREAM·꿈)과 도네이트(DONATE· 기부)란 뜻이 담겨있다. 꿈을 꾸고, 디자인을 하고, 기부를 할 때 비로소 존재감과 행복을 느끼는 연구소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8년의 실적은 놀랍다. 디자이너들이 평생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세계 4대 디자인대회(레드닷, IF, IDEA, 굿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무려 41개 받았다. 특히 2007년에는 ‘접는 MP3플레이어(크로스큐브)’로 50개국 작품 6000개를 제치고 미국 IDEA 은상을 차지했다. 접는 MP3플레이어는 당시 동상(3등)을 받은 애플 아이팟(iPod)을 제치고 2등을 차지해, 획기적인 나눔 상품으로 찬사를 받았다. “육각형 큐브를 펼치면 나눔을 상징하는 십자가 형태의 목걸이가 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소외된 이들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면에 버튼을 하나만 배치했고요. 디자인의 3요소인 상징성·심미성·기능성을 모두 결합한 나눔 상품이었기에 그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 같습니다.”

①친환경아로마 가습기 '러브팟'. ②MP3 '크로스큐브'. ③텀블러(보온통) '하티'.
①친환경아로마 가습기 ‘러브팟’. ②MP3 ‘크로스큐브’. ③텀블러(보온통) ‘하티’.

그 외에도 배 교수 연구팀이 만든 친환경 아로마 가습기 ‘러브팟(lovepot)’, 텀블러(보온통) ‘하티(Heartea)’, 의류의 특성과 다리미·세탁기를 연동한 옷 꼬리표 ‘클로스태그’ 등 나눔 상품들은 세계 4대 디자인 대회를 휩쓸었다. 접는 MP3플레이어는 지금까지 1만2000개, 러브팟은 1만개, 하티는 1만5000개 이상 팔렸다. 배 교수는 지금까지 GS칼텍스의 지원 및 개인출자를 통해 디자인한 나눔 상품을 판매해서 얻은 수익금 약 17억원 전액을 월드비전에 기부해 저소득층 어린이들의 교육·장학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나눔 상품을 출시하기 전에 고민했던 것이 바로 가격이었습니다. 기부 상품은 소비자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100만원이 넘는다면 나눔에 참여하는 소비자 수가 적을 테니까요. 그래서 서울 시민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니 ‘나눔 상품을 구매하는 데 1년에 약 3만~5만원 정도 쓸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공정의 혁신’이 시작됐죠. 세상에 없는 획기적인 상품을 만들되 5만원 이내로 단가를 낮춰야 했습니다. 비용이 많이 드는 복잡한 시스템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최상의 물건을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고자 했죠.”

2005년부터 세상에 없는 획기적인 나눔 상품을 매년 1개씩 출시하고 있는 배 교수에게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어디서 어떻게 얻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연구실 책장을 잠시 뒤적이더니 검은색 하드커버 노트 세 권을 꺼내 보였다. 빛바랜 사진, 오린 신문, 깨알같이 쓴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디어 노트예요. 제겐 이런 노트가 18권 있습니다.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을 적습니다.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마다 이 노트들을 뒤적이는데, 생각지도 않은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라요. 롤리-폴리 화분도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어느 날 노트를 펼쳐보니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오늘 또 키우던 식물이 죽었다’는 글귀가 보였어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롤리-폴리 화분은 물 주는 시기를 알려주는 나눔 상품이다. 바닥을 오뚝이처럼 둥글게 만들고 화분 한쪽에 납을 넣었다. 화분 중심을 유지하던 물이 떨어지면 식물은 자연스레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 화분이 똑바로 설 때까지 물을 주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화분 바닥에는 체중계처럼 영(0)점 조절이 가능하도록 장치해서, 각 식물의 무게와 흙의 양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다.

배 교수처럼 ‘착하고 똑똑한’ 나눔 상품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모든 아이디어는 ‘동기’에서 나온다”면서 “디자인을 ‘어떻게’할지 고민하기 전에, ‘왜’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창의력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입니다. 소외된 이웃,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해보세요. 내가 왜 나눔 상품을 디자인하는지 그 이유에 집중하면 아이디어는 저절로 나옵니다.”

동정에 호소하는 제품이 아니라, 소비자가 사고 싶게끔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나눔 상품’을 디자인하는 그의 철학이다. “저는 제품 겉면에 ‘기부해달라’는 메시지를 절대 넣지 않아요. 소비자가 예뻐서 혹은 제품 질이 좋아서 구매했다가, 포장을 풀어본 뒤에야 나눔 상품인 걸 알 수 있게 디자인하죠. 저희가 디자인한 나눔 상품 2차 구매율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부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비자들은 더 마음을 열고, 나눔에 동참하려 하거든요.”

작년부터 배 교수는 개발도상국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디자인하는 ‘시드 프로젝트(seed project)’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는 안식년을 반납하고 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이다.

“지난해 케냐 마사이족 마을에 갔을 때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어요. 주민들이 비영리 단체가 지어준 슬레이트집을 아예 비워두고, 소똥으로 지은 본래 집에서 잠을 자더라고요. 한 소녀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안 예뻐요’라고 답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을이 간직하고 있는 전통과 고유의 미(美)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이 보기에도 아름답고 생활하기 편리한 집을 만들어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들의 예술적 감각은 저보다도 뛰어나요. 그러한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제가 떠나더라도 주민들이 아름답고 편리한 집을 계속 지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시드 프로젝트’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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