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Cover Story] “좋은 일자리, 답은 量 아닌 質 … 밀레니얼 세대, 직업 재미·성장성이 우선”

[Cover Story]좋은 ‘일’이 생긴다

일자리·노동 전문가 3人 대담

그동안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숫자’에 묶여 있었다. 주 52시간 근무제와 최저임금 인상이 이뤄져도 시민이 체감하는 ‘노동 행복 지수’가 제자리 수준인 이유다. 급격한 경제성장과 사회 변화 속에서 ‘행복하게 일하는 방식’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못했던 한국. 이제는 한국의 노동이 양적 팽창을 넘어 질적 성장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왔다. 더나은미래는 이 시대의 ‘좋은 일자리’가 무엇인지 함께 토론하고 찾아보는 대담의 장을 마련했다.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에 모인 이병훈(60)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서현선(41) 진저티프로젝트 대표, 황세원(39) LAB2050 연구실장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일자리의 형태와 일하기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면서 “좋은 일자리의 개념이 전환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에서 ‘우리 시대 좋은 일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노동 및 일자리 전문가 3인이 대담을 나눴다. ⓒ임영근 C영상미디어 기자

◇“막내만 하라는 법 있나요?” 밀레니얼 세대들의 반란

―연령에 따라 ‘좋은 일자리’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 같다.

이병훈=’사람 안에는 3개의 시계가 돌아간다’는 이론이 있다. 태어난 시간, 사회적 시간, 역사적 시간. 즉, 노동에 대한 세대 간 차이는 단순히 나이대가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겪은 사회적 배경 및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개념이 시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짧은 시간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식민지, 전쟁, 그로 인한 가난,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 다른 나라보다 변화에 따른 ‘성장통’을 극심하게 앓는 이유다. 수차례의 혼란을 한가운데서 경험한 중·장년층에게 삶과 직결된 문제가 아니고서는 깊이 사유하고 고민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전쟁과 가난을 겪었던 중·장년층 세대에게 노동은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상명하복과 권위주의 문화가 심해 노동문제에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정년까지 보장되는 안정성, 경제적 보상 등이 ‘좋은 일자리’의 기준이 됐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세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임영근 C영상미디어 기자

황세원=그래서 예전에는 사람들이 다 같이 한 줄로 서서 달리기를 하다가 거기서 1등을 하거나 혹은 끝까지 살아남아 최고가 되는 사람을 선망했다. 과거 신문 인터뷰 기사들을 보면 최연소 합격자, 수석 합격자 또는 기업 대표 등 정상에 선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요즘 언론에는 하던 일을 과감하게 그만두고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독특한 일에 도전한 사람들의 얘기가 많다. 집단보다는 개인, 개성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 출생한 사람들)의 특징과 연관 있다.

서현선=밀레니얼 세대는 조직의 성장을 나의 성장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게 다른 세대와의 큰 차이점이다. 이 때문에 노동의 결과가 조직의 성장만으로 남으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안 한다.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는 조직이 곧 자신이라 조직을 위해 개인의 희생하는 걸 당연시한다. 예를 들어 주말에 회사에서 야유회를 가니 전원 참석하라거나, 출근 시간보다 30분 먼저 오는 게 당연하다거나…. 그런데 밀레니얼 세대는 이런 걸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를 보고 개인주의적이다, 책임감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을 쉽게 그만두거나, 그동안 막내가 해온 일들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이다.

황세원=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가 밀레니얼들에게 책임감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경제적 안정도, 성장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내기 힘든 현실이니.

서현선=맞다. 중·장년층은 조직에 대한 좋은 인상이 있다. 환영받고 회사에 들어간 사람들 아닌가. 반면 요즘 청년들은 비정규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조직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들은 어떤 걸 ‘좋은 일자리’라고 생각하나.

이병훈=딱 꼬집어 하나로 정의 내리기는 힘들다. 이들의 특성 중 하나가 다양성이니까.

황세원=밀레니얼 세대 특징 중 하나가 좋은 일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일을 찾아서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문제는 사회의 노동 시스템이 밀레니얼 세대 이전에 맞춰져 있다. 예를 들어 요즘 청년들은 국민연금을 안 들기도 하는데 연금에 부을 만한 돈도,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규직이 65.7%라고 말하는데, 청년들은 공감 못 한다. 정규직에 진입조차 못 해봤으니까. 그래서 이들은 일단 ‘적당한’ 직업을 구한 뒤 다른 곳으로 옮겨갈 생각부터 한다.

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임영근 C영상미디어 기자

서현선=2년 전 4000명의 밀레니얼 세대를 설문조사한 적이 있다. 이들은 사회가 워낙 불안정하다 보니 ‘안정성 있는 노동’ ‘일한 만큼 보상이 따르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더라. 실제 최근 통계에서 20대가 입사 1년 안에 퇴사하는 비율이 27%나 된다고 한다. 즉 자신이 누리는 편안함과 안정성이 언젠간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연봉과 안정성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 절대적이지 않더라. 그 대신 재미있는지, 조직 안에서 성장 가능한지를 더 따진다. 어차피 안정성이 보장 안 되니 기왕이면 자신이 성장할 수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경직된 조직 문화·제도 바꾸는 ‘일자리 실험’ 퍼져야

―지난해 발표된 한국노동연구원의 ‘2016년 비정규직 노동 통계’를 보면 15~24세 남성의 53%, 여성의 47%가 비정규직이다. 임금과 복지 등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부가 일자리 늘리기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일자리의 ‘양’도 중요하지만 ‘질’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이병훈=과거 고소득 전문직부터 아르바이트형 비정규직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28명의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를 했었다. 그 결과 돈을 많이 벌고 직업이 안정적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사람이 불안과 극심한 피로를 느끼더라. 결국 일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안전망 자체가 탄탄하지 못해 어떤 일을 하든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건 일자리를 늘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답은 일자리의 질, ‘좋은 일자리’다.

황세원=좋은 지적을 해주셨다. 요즘 청년들은 대학 졸업 직후 희소한 기회를 잡아 취업해야 그나마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 만약 잠깐이라도 방황하면 바로 질이 낮은 일자리를 얻을 확률이 높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한다’는 게 이 맥락이다. 이런 질 낮은 일자리는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구의역 설비 노동자와, 음료 공장 아르바이트생의 죽음에서 알 수 있지 않은가. 청년 실업을 해소한다고 해서 단기 일자리,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일자리, 직장 갑질을 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자리로 밀어 넣는다면 그게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결국은 정규직과의 차별이 분명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 주기만 한다면 그게 해결일까.

이병훈=EU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정상회의에서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자’는 미션을 선언했다. 특히 프랑스는 재무제표를 보고할 때 노동 및 인권, 환경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이행 상황도 공개하는 ‘소셜 밸런스 법’을 제정했다. 국가 차원에서 강하게 밀어붙인 덕에 유럽은 개방적이면서 노동 친화적인 문화가 활발해질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최근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서현선=내가 몸담고 있는 진저티프로젝트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업무 비율 따라 월급을 받는다. 사무실에 나올 필요도 없다. 목표한 양을 끝내기만 하면 된다. 임금이 높은 것도, 복지가 좋은 것도 아닌데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진저티프로젝트의 일하기 방식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했다.

서현선 진저티프로젝트 대표. ⓒ임영근 C영상미디어 기자

황세원=좋은 일자리 실험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본다. 우리만큼 경직된 직장 문화를 가진 일본도 유연 근무 실험을 한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금을 계속 올려줄 수 없어 그 대신 노동의 질을 높이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어서다.

서현선=진저티프로젝트에선 자신의 직함을 스스로 만들고 할 일을 정한다. 이를테면 진저티 대표가 아니라 조직 관리 및 연구 기획자가 되어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한다. 이렇게 스스로 직함과 역할을 정하다 보니 목표가 분명해지고 목적의식도 강해진다.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이것이 곧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노동자에게 결정권을 주면 동기부여돼 보다 많은 성과를 이루는 등 선순환 구조가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병훈=이런 문화가 확산하려면 리더들이 변해야 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조직에서 고용자가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다. 이들은 결정권도 많지 않다. 서구에서는 비교적 노동 친화적인 조직이 많은 편인데, 이 조직들은 리더가 개방적이고 혁신에 앞장서더라.

황세원=연봉 높고 복지 좋기로 유명한 모 기업이 유연 근무제 등 다양한 제도를 시행 중인데 직원들은 시큰둥하다. 위에서부터 하달되는 시혜성, 전시성이어서 효과가 높지 않다는 거다. 노동자에게 진짜 필요한 제도를 도입하려면 이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경청해야 한다.

이병훈=그런데 ‘을’인 노동자가 ‘갑’인 사용자에게 요구하는 게 쉬울까.

황세원=물론 어렵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필요한데 사실 국내 노조가 있는 곳이 별로 없을뿐더러 있어도 협상 방식이 ‘대화’가 아니라 ‘투쟁’이더라. 모두 자멸하게 되는 ‘치킨게임’인 것이다. 또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으려면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해야 한다. 내가 이 회사를 관둬도 조직에 속할 때처럼 안정적인 보험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생활비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큰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일’ 대담을 이어가고 있는 전문가 3인. ⓒ임영근 C영상미디어 기자

―좋은 일자리 실험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이병훈=두 가지 제안을 하겠다. 첫째는 시대 변화에 따라 일자리 질 개념을 담을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는 식의, 법을 노동 친화적으로 고치는 방법이다. 둘째는 법을 잘 준수하도록 감독과 제재를 강화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나라는 이 부분이 심각하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가 큰데, 이 간격을 줄이기 위해 근로감독관도 늘리고 행정도 효율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서현선=일자리 정책에는 급여 수준, 복지, 근로 조건 등 보편적 지표와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지표 모두 고려돼야 한다. 즉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이 지급되는지, 노동법에 근거한 노동조건들이 지켜지는지도 봐야 하고, 개인의 개성을 존중해주는 문화도 조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정부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후자는 정부와 기업이나 조직,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황세원=임금 수준, 노동시간, 지속 가능성 등 객관적 조건들도 중요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지, 나의 적성과 개성에 부합하는지 또는 내가 원하는 삶과 조화를 이루는지 등 주관적 만족도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측면을 균형 있게 보면서 노동자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찾아서 할 수 있고, 그 일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개인들이 행복하고, 이런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사회에서 노동하는 것이 좋은 일자리라고 생각한다.

[박민영 더나은미래 기자 bad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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