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금)

“홧김에 벌컥” 농촌 농약자살… 농약보관함 생긴 뒤 안타까운 죽음 사라져

생명존중 그린마을 사업
널린 게 농약인 농촌 충동적 음독 많아
친지 모여 사는 농촌특성 자살사건 일어나면 마을 전체가 ‘우울증’
농약안전보관함 설치로 농약 관리·보관 한번에 생명의 가치 일깨워

“재작년쯤 부부싸움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화가 잔뜩 난 거야. 술에 취한 상태였거든. 이분이 ‘이거 한 모금 먹고 죽어버릴란다’면서 고독성 농약을 들고 나가선 진짜 딱 한 모금 마셨는데 돌아가신 거지. 시골에는 밖에 나가면 널린 게 농약이니, 힘들 때 눈에 들어오면 충동적으로 그냥 드시는 거지.”

16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석천3리에서 만난 이완균(66) 이장의 말이다. ‘농약’은 농촌 노인의 자살 수단으로 가장 흔히 쓰인다. 통계청에 따르면, 농약을 자살도구로 사용한 사람은 약 2800여명에 이른다(2008). 이 중 절대다수인 78%(2170명)가 농어촌이 밀집한 광역시ㆍ도에 몰려 있다. 전준희 화성시정신보건센터장은 “농촌은 아직도 집성촌 형태로 친족ㆍ친지들이 모여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 명이 자살하면 마을 전체가 우울증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전 센터장은 마을 이장들과의 대화를 통해 대부분의 농약 자살이 매우 충동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전 센터장은 “독성이 강한 농약을 먹으면 일주일 안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 사이에 후회하면서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그 충동에 한순간만 제동을 걸 수 있어도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생명존중 그린마을 사업은 농약안전보관함 설치는 물론 각종 교육과 상담 등도 함께 진행한다.
생명존중 그린마을 사업은 농약안전보관함 설치는 물론 각종 교육과 상담 등도 함께 진행한다.

이 같은 발상은 자살예방 지원에 앞장서고 있던 (재)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을 만나 현실화됐다. 지난 2009년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의 지원사업 공모를 통해 농가에 농약보관함을 설치해 주는 ‘생명존중 그린마을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정봉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상무는 “현재 농촌을 지키는 사람들은 거의 다 노인들”이라면서 “신체적으로 아프고, 농사일도 고된 데다, 타지로 나간 자식들에 대한 외로움까지 겹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 노인들의 환경을 개선코자 이번 사업을 진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면에 위험표시 마크가 붙어 있는 농약안전보관함은 양쪽 문의 환풍구를 통해 내부에 유독가스가 차는 것을 방지했을 뿐만 아니라, 높이가 다르게 구성된 3단 선반으로 다양한 형태의 농약 용기를 보관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전 센터장은 “농약안전보관함은 열쇠로 보관함을 여는 데다 보관함에 생명존중 문구가 붙어 있어 충동적인 자살을 위한 최종 방어선이 된다”며 “마을주민 모두가 설치한 보관함은 ‘우리 마을은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을’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강화해주는 매개체 역할도 한다”고 설명했다.

고독성 농약의 경우 소량만 먹어도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고독성 농약의 경우 소량만 먹어도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올해 이 사업을 통해 농약보관함을 설치하게 된 경기 화성시 장안면 장안6리의 김명숙(76)씨는 “예전에는 그냥 빈 박스에 넣어두기도 하고, 손 닿을 만한 곳에 대충 놔두고 썼다”면서 “이렇게 보관함에 정리하니까, 깨끗하고 그라목손(고독성 제초제)같이 독한 것은 따로 구분해서 보관하니 안전하다”고 했다. 단순히 보관함만 설치하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설치한 보관함의 모니터링 및 교육은 물론, 보건소와 연계한 상담 등도 함께 진행된다.

전 센터장은 “초기에는 농가의 농약 사용량을 몰라, 보관함 크기로 애를 먹기도 했다”면서 “첫해부터 100가구씩 3년 정도를 하다 보니 지역의 인식과 태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이완균 이장은 “2010년 전까지만 해도 농약 사고는 빈번히 발생했는데 이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아직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며 “마을 이장단 회의에 가면 다른 마을 이장들도 참여하고 싶다는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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