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Cover story] 아프리카서 희망농사 짓는 이상훈·이송희 부부

지치지 않는 아프리카 봉사”말라리아도 우릴 못 막아요”

이상훈(43), 이송희(37) 부부는 결혼생활 15년 중 9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세 아이 중 두 딸도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났다.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시달리며 16년째 긴급 구호와 지역 사회 개발에 헌신하고 있는 이 부부는, 이달 말 아이 셋을 데리고 다시 아프리카 르완다로 떠난다. ‘청년’ 이상훈과 ‘젊은 아가씨’ 이송희의 첫 만남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 200만명이 넘는 르완다 난민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그곳에서 ‘희망 농사’를 지을 예정이다. 운명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이상훈씨가 르완다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94년이다. 종족 분쟁으로 대학살을 피해 수백만 명의 르완다 국민들이 난민이 된 상태였다. 극심한 식량부족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신문에 난 ‘기아대책 봉사단’ 광고를 보고 지원한 상훈씨는, 겨우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르완다에 파견됐다. 의사 2명, 간호사 5명으로 이뤄진 팀과 함께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밀어닥치는 난민들로 의료팀은 하루 종일 치료와 수술로 전쟁을 치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천막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먹는’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모두 힘들고 피곤하니 밥 당번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누가 밥을 할거냐, 김치는 왜 없냐며 매일 큰소리가 났지요.”

상훈씨는 젊고 철없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지 싱긋 웃었다.

“이대로는 의료 봉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근 국가들의 봉사단원들에게 SOS를 보냈지요. 다행히 케냐 나이로비에서 도와주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반가운 마음에 상훈씨는 공항까지 달려나갔다. 당연히 40~50대 아주머니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행기에서는 젊은 여자가 내렸다.

“업무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하면 아무도 안 올 것 같다고 해서 행정 업무를 보는 일이라고 포장해서 얘기했거든요. 젊은 아가씨가 오니 행정만 보고 밥은 안 할 것 같아 크게 걱정했지요.”

하지만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이송희씨는 의료팀이 충실하게 치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숙식과 그 외 행정부분을 깔끔하게 지원했다. 타지에서 외로움을 겪는 간호사들에게는 언니처럼, 친구처럼 다정다감하게 챙겼다.

16년 전 르완다 난민촌에서 만났던‘청년’이상훈과‘젊은 아가씨’이송희는 어느덧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세 아이 훈희, 진희, 강희와 함께 다시금 첫사랑 르완다를 밟는 감회가 새롭다고 한다.“ 긴급구호 활동을 할 때는 워낙 위험한 곳들을 많이 다녀서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온 가족이 함께 르완다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다”며 이상훈, 이송희씨는 소박한 꿈을 밝혔다. /이경섭 객원기자
16년 전 르완다 난민촌에서 만났던‘청년’이상훈과‘젊은 아가씨’이송희는 어느덧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세 아이 훈희, 진희, 강희와 함께 다시금 첫사랑 르완다를 밟는 감회가 새롭다고 한다.“ 긴급구호 활동을 할 때는 워낙 위험한 곳들을 많이 다녀서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온 가족이 함께 르완다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다”며 이상훈, 이송희씨는 소박한 꿈을 밝혔다. /이경섭 객원기자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난민들과 구호 팀원들을 보살피는 송희씨를 보면서, 이상훈씨는 만난 지 2주 만에 “이런 일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평생 같이하면 어떻겠습니까”라며 청혼했다. 이 멋없는 청혼을 받은 송희씨는 1시간 후 “정말 평생 하실 건가요”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평생을 헌신하며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고열, 배탈, 설사 등 풍토병에 시달리는 때가 잦았다. 말라리아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기도 했다. 생후 6개월인 큰딸 훈희가 고열로 괴로워해 병원을 전전할 때는 일에 대한 회의까지 느꼈다. 열악한 의료시설은 그렇더라도, 무관심하고 성의없는 아프리카 의사들에 대한 서운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한국에 가고 싶다”고 떼쓰는 아이들을 혼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도, 먼 이국 땅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프리카 현지 직원이 횡령했을 때는 일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해당 직원 해고, 사업장 임시 폐쇄 등 단호하게 대처하고 지원 기관에 100% 투명하게 보고해 오히려 더 강한 신뢰를 얻었지만,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이 뻐근한 일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이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콩고에서, 케냐에서, 우간다에서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간다에서 베나와 프리실라라는 두 소녀가 심장병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수술 시설도 의사도 없는 우간다에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죠. 우선 ‘좀 더 급하다’는 베나가 한국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돈을 모으러 뛰어다니던 중에 ‘조금 덜 급하다’고 차례가 미뤄졌던 프리실라가 결국 숨졌습니다.”

다행히 베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아 새 생명을 얻었다. 학교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며 학생회장까지 맡았다고 한다.

“제가 떠나올 무렵, 베나의 고향 주민들과 국회의원들이 나서 우간다에서도 심장병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어린이 심장재단’을 설립하자는 법안을 상정했습니다. 제2, 제3의 베나를 위해, 그리고 그들을 통한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해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체하는 동안 어디선가 프리실라처럼 희망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꺼지는 생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 반정부 게릴라들에게 납치돼 어린 나이에 살인을 강요받으며 킬링 머신이 되어버린 소년병들, 반군의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고향에서도 버림받는 어린 소녀들에게 어쩌면 이 부부는 처음이자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스와힐리어 속담에 ‘파나 니아 페나 니아(Pana nia pena njia)’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뜻이지요. 지치지 않고 이 희망 농사를 계속 짓고 싶습니다.”

송희씨는 “우간다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르완다에는 아주 오래 있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아프리카를 향한 온 가족의 사랑 여정이 수많은 희망 열매를 맺게 되길 응원한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