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포스코청암상’ 봉사상 수상자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원장 인터뷰
처음부터 의사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던 중 한 피해자가 남긴 말을 듣고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 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의료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절실한 것이라면, 자신이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 끝에 이듬해 의과대학으로 다시 입학했다. 그리고 수년 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병원’을 직접 만들었다.
그는 지난달 22일 ‘2025 포스코청암상 봉사상’을 공동 수상한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원장이다. 추 원장은 의대 진학 후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며 “여성이 직접 참여해서 만들고 운영하는 ‘의료협동조합’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의료협동조합’은 일반적인 병원과 다르게 “개인 의사가 아닌 시민과 의료인이 협동해 만들고 운영하는 조직”으로, 조합원의 출자금을 통해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이다. 추 원장은 여성운동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 함께 2012년 살림의원을 만들었다.
◇ 시민과 함께 만든 병원에서 ‘의료의 기본’을 지키다
살림의원의 시작은 단순한 개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환자를 위한 의료’가 사라진 현실에 대한 도전이었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서는 환자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30초 만에 진료를 끝내도, 15분 동안 꼼꼼하게 상담을 해도 진찰료는 똑같다. 그러다 보니 의료기관들은 진료보다는 검사와 처치를 늘려야 수익을 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추 원장은 이 구조를 바꾸고 싶었다. 충분히 듣고, 충분히 설명하는 진료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병원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의 대답은 ‘혼자가 아닌, 시민과 함께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병원 개원부터 지금까지,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병원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료였다. 현재 살림의원의 조합원은 4600명이 넘는다. 은행 대출 없이 병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운영에 필요한 자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힘 덕분이었다.
“5000명 가까운 조합원들과 함께 민주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는 건 쉽지 않아요. 하지만 이 관계가 짐이 아니라 힘이 되어야 병원이 지속될 수 있어요.” 추 원장은 더나은미래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에 받은 2025 포스코청암상 봉사상도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받은 상이라고 말했다.
살림의원은 여성주의적 치료와 포용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기관이다. 살림의원에서는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등 다양한 환자들이 차별 없이 진료받을 수 있다. 최근에는 점점 돌봄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현재는 살림의원뿐만 아니라 치과, 한의원, 주간보호와 방문요양을 제공하는 ‘데이케어센터’, 재택의료센터와 가정간호사업소까지 운영한다.
◇ 왕진가방 들고 환자에게 찾아가다
살림의원의 가장 큰 특징은 환자가 병원에 찾아오는 것만이 아니라, 의사가 환자를 찾아간다는 점이다. 추 원장은 2012년 개원 이래 방문진료를 시작했다. 병원에서 진료받기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직접 집으로 찾아가는 방식이다. 그는 “당시에는 방문진료에 수가가 없어, 환자도 의료진도 방문진료를 요청하거나 본격적으로 실시하기가 어려웠다”며 “2018년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을 통해 중증 장애인을 대상으로 방문진료가 가능한 제도가 생겨 좀 더 활발하게 방문진료를 나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가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발달장애 환자가 병원 문턱을 넘고 치과 진료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병원에서는 진료를 거부하던 발달장애인 환자가 집에서는 편안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방문진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꼈죠.”
그는 의료 시스템이 환자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 목소리를 내어 방문진료 대상이 지적·자폐성 장애인까지 확대되도록 제도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 2021년 9월,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은 대상을 지체·뇌 병변·시각 장애 유형에서 지적·정신·자폐성 유형까지 확대하도록 개선됐다. 추 원장은 “지금 운용되고 있는 제도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 현장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 목소리가 반영돼 제도가 실제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보람”이라고 전했다.
◇ 마을에서 함께 살고, 함께 돌보는 의료
추 원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꿈꾸는 것은 ‘나답게 살다가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죽을 수 있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의료와 돌봄을 통합해,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의료뿐만 아니라 방문요양, 주간보호센터, 건강모임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향후에는 자원활동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상담을 실시하고, 유류품과 여러 의료기기를 기증받고 대여하는 센터를 운영하며 그 첫발을 뗄 계획이다.
그는 “2024년은 의대 증원 문제로 큰 사회적 갈등이 있었던 해”라며 “앞으로 어떤 의사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앞으로의 의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는 정부와 의사들만의 합의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문제”라면서 “직접적인 당사자인 시민들도 정책 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래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같이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운영할 수 있는 의료기관의 역할이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며 “시민들이 함께 운영해 온 의료협동조합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