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무한반복 ‘프랙탈’이 전통예술로 거듭나다

‘수학 공식과 IT기술이 만나 전통 예술을 살린다?’

얼핏 들으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 여기 도전장을 내민 사회적기업이 있다. 인도네시아 사회적기업 ‘픽셀 인도네시아(Pixel Indonesia)’가 그 주인공.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수학의 ‘프랙탈(fractal)’ 개념을 활용해 인도네시아 전통 무늬인 ‘바틱(Batik)’을 디자인한다.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몇 번의 클릭으로 나만의 문양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2D평면은 물론이고, 3D 입체적 문양도 가능하다.

창립자 세명의 전공은 각각 건축·수학·커뮤니케이션. ‘전통 예술’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바틱’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뭘까. 지난 6일, 영국문화원이 주최한 ‘인도네시아 창조·사회적기업을 만나다’ 행사에서 만난 픽셀 인도네시아(Pixel Indonesia)의 무하마드 루크남(Muhamad Lukman·사진) 공동창업자 겸 디자인 총괄책임을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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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문화원 제공

-‘프랙탈’ 원리로 바틱 문양을 생산한다는 게 흥미롭다. 기존 바틱 시장의 문제가 무엇이었고, 프랙탈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나. 

 “‘바틱(Batik)’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염색 방식이자, 무늬를 일컫는다. 전통적으로는 ‘챤틱’이라는 얇은 도구를 이용해 녹인 밀랍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천연 염색 방식으로 색을 물들인 뒤 끓는 물에 밀랍을 녹인다. 인도네시아에서 ‘바틱’은 문화 그 자체다. 나이 많은 결혼식 같은 중요한 행사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이나 출근할 때도 바틱을 입었다.

바틱을 제작하는 과정. 녹인 밀랍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천을 염색한 뒤 끓인 물로 밀랍을 녹인다. /프랙탈 인도네시아 제공
바틱을 제작하는 과정. 녹인 밀랍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천을 염색한 뒤 끓인 물로 밀랍을 녹인다. /프랙탈 인도네시아 제공

그러나 바틱은 젊은이들에게 외면 받았다. 디자인이 너무 획일적이다. 몇 가지 디자인이 수십 년째 반복됐다. 개인이 새로운 문양을 만들기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시장에서 통하면 바로 복제 될 확률도 커서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할 유인이 적다. 게다가 전통 바틱 문양을 기록하고 축적한 자료도 많지 않다.

우리는 ‘제이바틱(jBatik)’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여러 가지 변수를 바꾸면 프랙탈 원리에 기반해 새로운 바틱 문양을 생성해 준다. 이 방식으로 바틱 장인이나 시각디자이너들은 무수히 다른 바틱 디자인 도안을 만들 수 있다. 우리 프로그램의 장점은, 무수한 바틱 문양을 생성해낼 수 있다는 거다. 자신의 취향, 혹은 고객의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 더하거나 뺄 수가 있다. 그리고 다른 패턴을 도용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전통 문양에 기반해서 새로운 패턴을 구상할 수도 있다. 다양한 디자인이 없고, 시장 변화에 면밀하게 반응할 수 없다는 게 전통 바틱 디자인의 한계였지만, 그 지점을 기술로 메워 새로운 시장 변화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로 한거다. 또한 전통 생산자 경우에 패턴을 머릿속에 갖고 있거나, 낡은 종이에 적어 세대를 넘어 건네주곤 했다. 제이바틱을 활용하면 한번 썼던 패턴을 저장하기도 쉽고,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구상할 수도 있다.

프로그램 개발이 쉽지는 않았다. 하나의 형태가 반복되면서 자동적으로 패턴이 만들어지는 ‘제너레이티브 아트’를 구현하도록 만드는 게 과제였다. 인도네시아 내에서 그래픽이나 인공지능분야를 다루는 개발자를 찾기도 정말 어려웠다. 개발 비용도 팀원들이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했다. 2009년에 처음 ‘jBatik 2.0’ 버전을 출시한 뒤로 부족한 부분을 계속 업데이트 했고, 올해 초엔 4.0 버전까지 업그레이드됐다.”

제이바틱(jBatik) 프로그램 화면 스크린샷. 제이바틱은 ‘프랙탈’ 원리를 활용해 무수한 조합의 바틱 문양을 생성할 수 있다. /Batik Fractal 홈페이지 제공

-창립자 셋 모두 ‘바틱’과는 관계가 없어보인다. 바틱을 다루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처음부터 ‘바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건 아니었다. 내 전공이 ‘건축’인데, 석사 논문으로 ‘건축 내 프랙탈의 원리’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같은 주제로 전시회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학을 전공한 윤 아리아디(Yun Hariadi)와 커뮤니케이션 전공 낸시 마그리드(Nance Magried)를 만났다. 셋 다 프랙탈 원리를 이용해서 하나의 패턴을 계속 생성해내는 ‘제너레이티브 아트(Generative Art·자율 시스템을 활용한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 기술을 활용할 분야가 없을지 찾아보면서 프로그램으로 여러 작품들을 만들다 보니, 우연히 바틱과 문양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바틱 문양 내에도 ‘프랙탈’ 원리가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2007년, 셋이서 ‘픽셀 피플 프로젝트(Pixel People Project)’라는 연구 모임을 시작했다. ‘바틱’ 문양을 제대로 파보자는 거였다. 300개도 넘는 바틱을 컴퓨터에 스캔하고, 다시 분석했다. 같은 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X 제너레이티브 아트 컨퍼런스(X Generative Art Conference)’에 그간의 연구에 기반한 페이퍼도 제출했다. 바틱이 ‘프랙탈’ 성질을 갖고 있으며, 프랙탈 원리를 활용해 바틱 문양을 생성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바틱 세계’도 새롭게 알게 됐다. 전통적으로 디자인이나 염색이 어떻게 이뤄지는 지를 알게 됐고, 오늘날 전통 바틱의 한계와 문제점도 봤다. 우리가 들어갈 지점이 있다고 확신하게 됐고, 2009년 ‘픽셀 인도네시아(Pixel Indonesia)’라는 이름으로 기업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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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랙탈 인도네시아 공동창립자들의 모습. 왼쪽부터 윤 하리아디(Yun Hariadi) 공동창립자 및 CSO(Chief Science Officer), 무하마드 루크만(Muhamad Lukman) 공동창립자 및 CDO(Chief Design Officer), 낸시 마그리드 공동창립자 및 CEO, 디마스 다누르웬다(Dimas Danurwenda) CTO/ 프랙탈 인도네시아 제공

-픽셀 인도네시아의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인가.

“‘바틱 프랙탈(Batik Fractal)’이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게 하나다.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생성한 바틱 문양을 활용해 의류나 잡화, 팔찌 등 다양한 패션 소품을 판매한다. 맞춤형 주문도 가능하다.

둘째로 소프트웨어 제이바틱(jBatik)을 판매하고, 프로그램 활용법 관련한 강좌나 트레이닝을 진행한다(프로그램의 체험판은 무료, 기능이 추가된 베이직은 55달러, 프로 버전은 150달러다).”

jBatik 프로그램을 통해 만든 패턴으로 제작한 상품. ‘바틱 프랙탈(Batik Fractal)’ 브랜드를 달고 판매한다. / 프랙탈 인도네시아 제공

-장인들이 ‘손수 만들어오던’ 전통을 IT기술과 프린트 바틱이 대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을 것 같은데.

“욕도 많이 먹었다. 인도네시아 바틱의 거장으로 유명한 분을 어렵게 만났는데, ‘예술은 기술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며 격하게 화를 내기도 했다.

우리 생각은 다르다. 지금의 바틱은 젊은층에서 외면받았다. 딱 하나의 형태를 고집해 잊혀지는 전통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변주’를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는게 좋지 않을까?

우리는 기술을 통해, 기존의 바틱에 무수한 ‘매력’을 더할 수 있다고 봤다. 우리 프로그램을 활용해 해골 모양 바틱을 만들어내는 등 젊은 층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바틱 디자인’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평면 2D외에 3D로도 구현이 가능하다. 젊은 작가 한 명은 우리 프로그램으로 만든 도안을 활용해 레이저커팅기로 가죽에 문양을 찍어내기도 했고, 실크프린팅 방식으로 찍어낸 작가도 있었다. 다양한 활용 가능성이 생긴 셈이고, 바틱이 우리 세대에 환영 받을 가능성도 커졌다고 본다. 온라인으로 공유도 가능하고, 자신의 바틱을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도 이미 공장에서 찍어낸 바틱 시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수공예 바틱 구매층과 공장산 바틱을 사는 이들은 완전히 별개다. 손으로 만든 바틱은 예술적 가치가 높지만, 그만큼 가격이 비싸다. 저소득층에게는 이런 바틱을 구매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에게도 ‘공장에서 찍어낸 똑같은’ 바틱보다는 좀더 매력적이고 다양한 옵션이 필요한 것 아닌가.”

바틱 생산 장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jBatik 프로그램 활용 워크숍 모습/ 프랙탈 인도네시아 제공
바틱 생산 장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jBatik 프로그램 활용 워크숍 모습/ 프랙탈 인도네시아 제공

-바틱 장인에게 프로그램을 구매하도록 어떻게 설득하나. 현재 몇 명 정도가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나.

“지금까지 1000명 이상의 인도네시아 장인들을 대상으로 트레이닝을 제공했다. 직접 마을로 가서, 우리 소프트웨어를 손으로 다뤄 볼 기회를 제공하고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초기 설득 과정이 쉽진 않았고, 여러 단계로 나눠 접근했다. 하나는 프로그램을 활용해 만든 바틱 문양으로 다양한 제품을 제작해 함께 홍보했다. 우리 프로그램을 썼을 때 어떤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거다. 장인들이 제작한 패턴으로 상품을 만들어 ‘바틱 프랙탈’이라는 브랜드로 판매하기도 하고, 디자이너 이름을 건 라인을 걸어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장인들을 대상으로 우리 프로그램 활용법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예술 쪽 정부 기관과도 협력할 지점이 생겼다. 지금도 인도네시아 반둥 외 다양한 지역에서 트레이닝을 제공한다.”

족자카르타에서 열린 패션위크에서 한 남성 모델이 jBatik을 활용해 장인들이 만든 바지를 선보이고 있다. /프랙탈 인도네시아 제공
족자카르타에서 열린 패션위크에서 한 남성 모델이 jBatik을 활용해 장인들이 만든 바지를 선보이고 있다. /프랙탈 인도네시아 제공

-바틱 장인과 협력하면서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면 공유해 달라. 

“캄봉(kampong) 지역에 있는 다고 포족(Dago Pojok)이라는 마을에 가서 30여명의 여성 생산자들과 만난 적이 있다. 이들에게 프로그램 활용법과, 바틱 제작법을 교육했다. 이후엔 ‘바틱 프랙탈 커뮤니티(Batik Fractal Community)’라는 라벨을 붙여, 바틱 프랙탈 브랜드 내에서 판매했다. 아이들에게도 프로그램 사용법을 가르쳐 자신만의 문양을 만들어보게 했다.

‘바틱 프랙탈 커뮤니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시도아르조(Sidoarjo) 지역에 있는 커뮤니티와 협력해 제품을 제작한 적도 있다. 시도아르조는 가죽, 바틱, 자수 기법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이들에게 ‘jBatik’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가르쳤고, 이후 지방정부와 함께, 가죽, 바틱, 자수 분야의 장인들과 함게 패션쇼도 열고 공동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시도아르조 지역 내 몇몇 장인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일하면서 제품을 생산한다. jBatik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바틱 패턴을 제작한 생산자들은 언제든지 자신이 만든 작품을 우리 브랜드 유통채널에 올릴 수 있다.”

-‘픽셀 인도네시아’의 목표는 뭔가.

“우선은 규모의 성장이다. 투자 등도 확보할 수 있을지 모색 중이다. (픽셀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외부 자금 없이 운영되고 있다). 바틱 프랙탈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해외 시장도 물색하고 있다. jBatik은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야 한다. 바틱 구매자가 원하는 문양을 직접 만들어 바틱 셔츠를 구매하는 어플리케이션 개발도 계획하고 있다.”

주선영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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