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빵집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여든 살쯤으로 보이는 어르신이 길바닥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계셨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일어서려는 듯했다. 어르신 뒤로 택배차가 오고 있어서 얼른 다가가 부축해 드렸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돌아서려는데 혼잣말처럼 인사를 건네셨다.
“미안해요.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자식들한테 짐만 되고…”
어머니도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사회는 어쩌다 오래 사는 게 미안한 일이 되었을까.
지난 12월 23일 대한민국은 초고령 사회가 됐다. 뭔가 무시무시한 사회가 된 것 같지만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었다는 통계에 불과하다.
사회의 고령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1956년 UN에서 시작됐다. 한 국가의 고령자 비율이 사회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처음 ‘고령화 사회’가 언급됐다. 1956년의 기대수명은 50.6세였으니, 65세만 넘어도 고령자에 속했다. 그래서 65세를 넘은 ‘노인’이 인구의 7%만 넘어도 ‘고령화 사회’라고 규정했다. 고령 사회(14%)나 초고령 사회는 그 후에 생겼다. 인간의 수명이 점점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1956년에 태어난 사람은 올해 69세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기대수명보다 18년을 더 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 초고령 사회는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의료기술이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한 결과다. 다만 너무 빨리 성과를 이루었을 뿐이다.
◇ 가장 빨리 늙는 국가
사회의 고령화가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맞다. 우선, 일하는 사람보다 연금 받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세금 내는 사람보다 세금 혜택을 받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국가나 지자체는 심각한 재정 압박을 받는다. 기업은 숙련자가 부족해 생산성이 떨어지고 구인난에 시달린다. 요양이 필요한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다 보니 요양 업계에서도 사람이 부족하다. 운전하는 노인이 늘어나서 심각한 교통사고도 발생한다.
이런 현상들은 고령자 비율이 높아서 혹은 우리의 부모님들이 오래 살아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속도가 너무 빨라서 생긴 문제다. 한국은 2000년에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후 24년 만에 초고령 사회가 됐다. 반면에 프랑스는 142년, 독일은 76년, 일본은 35년이 걸렸다. 사회의 인식이나 제도가 따라잡기엔, 우리의 인구 구조가 너무 빨리 변한 것이다.
십수 년 전에 초고령 사회가 된 일본, 독일, 프랑스는 모두 세계 경제 10위권의 경제 강국이다. 세수가 부족해 나라가 망한 것도 아니고, 기업과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젊은 사람과 노인들이 원수로 지내는 것도 아니고, 노인들의 운전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많은 문제가 있었으나 충분히 대응할 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 인내의 시간
사회의 고령화는 기후변화처럼 적응이 필요한 문제다. 지구의 역사에서 기온 변화는 늘 있었다. 빙하기와 고온기는 지금의 기온보다 훨씬 낮거나 높았지만, 생태계는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해 왔다. 우리는 쉽게 적응이라 말하지만, 그들에겐 인내였을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도 인내의 시간을 거쳤다. 고갈되는 연금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를 견뎌야 했다.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이민자를 유치할 때는 차별과 갈등, 분열의 시간을 지나야 했다. 정년을 연장하는 동안에는 그들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고, 때로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서두르고 싶지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스페인의 한 대학교에서 물고기의 성장 속도에 관해 실험을 했다. 수조를 두 개로 나누어 한쪽은 비정상적으로 높고, 다른 쪽은 비정상적으로 낮은 온도에 물고기를 풀어두었다. 높은 온도에서 자란 물고기는 낮은 온도에서 자란 물고기보다 더 빨리 성장했다. 이후에 두 물고기를 정상 온도의 수조로 옮겨 키웠다. 물고기의 성장 속도는 보통의 속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빠르게 자란 물고기가 느리게 자란 물고기보다 더 빨리 죽었다.
인내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시간을 앞선 질문이 필요하다. 문제가 생긴 후에 문제가 뭔지, 어떻게 해결할지를 고민한다면 변화를 뒤쫓을 수밖에 없다. 그보다 앞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은 “오래 사는 게 행복한 세상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다. 우리보다 앞서 초고령 사회를 살고 있는 곳의 사례를 살펴보며 우리의 실정에 맞는 행복은 무엇인지, 그것이 다수에게 행복한 것인지, 그러려면 어떤 장애를 넘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역사는 변화가 문제를 만들면 그 문제를 해결하며 진보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우리는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승훈 공익마케팅스쿨 대표
필자 소개 마케팅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믿음으로 ‘지역의 미래’를 탐구하는 오래된 마케터입니다. 현재 공익마케팅스쿨 대표이자 공익 싱크탱크 그룹 ‘더미래솔루션랩’의 전문위원으로, 공익 마케팅 전략과 지역경제 정책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슬리퍼 신은 경제학’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