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기부하기 싫은 최악의 영상을 뽑아주세요”… ‘빈곤 포르노 월드컵’이 열린 이유는?

‘최악의 빈곤 포르노를 뽑아라! 다음의 영상 중에서 가장 보기 싫고 기부하기 싫은 영상을 뽑아주세요!’

‘시작하기’ 버튼을 누르자 영상 두 개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창이 떴다. 후보 영상은 8개, 이 영상들의 공통점은 무력한 특정 인종의 모습이 담겼다. “오늘도 굶어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는 아동, 뼈가 드러난 마른 몸이 강조된다. 영상에는 ‘먹을 게 없어 잡초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들’,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아이들’ 등의 제목이 붙었다.

공적인사적모임의 ‘빈포선셋’이 지난달 5일부터 온라인 영상 월드컵 ‘빈포 월드컵’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공적인사적모임 SNS 갈무리

투표를 마치자 의견을 남기는 창이 떴다. “이런 것에만 반응한다고 어쩔 수 없다고 후원자 탓을 하지 말라”, “너무 노골적이어서 돕는 마음이 아니라 반협박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등 투표자들의 댓글도 달려있다.

이 온라인 영상 월드컵의 이름은 ‘빈포 월드컵’. 모금 캠페인 영상 중 ‘최악의 빈곤 포르노’를 뽑는 프로젝트다. 이 월드컵을 주최한 곳은 국제개발협력 청년 커뮤니티 ‘공적인사적모임’의 프로젝트 그룹 ‘빈포선셋’이다. 지난달 5일 열린 ‘빈포 월드컵’은 8강으로 시작했지만, 개최 직후 컨선월드와이드가 후보에 오른 영상 2개를 삭제해 현재는 6강으로 진행되고 있다.

◇ 과대광고·불공정 거래인 빈곤 포르노, 모금 활동가도 떠나게 한다

“자극적인 이미지를 쓴다고 모두 ‘빈곤 포르노’인 것은 아니에요. 당장 전염병으로 수만 명이 죽고 있으면 보여주고 현장의 문제 대응해야죠. 책무성과 투명성이 부재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의석 공적인사적모임 대표)

지난해 4월 “동정심에 돈을 내는 당신에게”라는 표어로 이들이 모인 이유는 ‘빈곤 포르노 근절 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공적인사적모임에 소속된 14명이 각자가 가진 역량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별 태스크 포스(Task Force·TF) 형태로 활동한다.

빈포선셋이 모인 계기는 정치권의 ‘빈곤 포르노’ 논란이었다. 2022년 11월 캄보디아 현지에서 김건희 여사가 아동을 안고 찍은 사진을 둘러싼 공방으로 인해 ‘빈곤 포르노’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오의석 공적인사적모임 대표는 “시민들이 ‘빈곤 포르노’에 대해 인지하게 됐으니 ‘이 관심을 그대로 가져와서 국제개발협력 생태계를 바꿔보면 어떨까’ 생각했다”며 “변화를 위해 ‘빈곤 포르노를 근절하자’는 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빈포선셋이 정의하는 ‘빈곤 포르노’는 “빈곤(Poverty)이라는 이미지를 돈벌이 수단 삼아 동정심을 유발하고, 한 인격체의 정체성을 단일한 프레임에 가두는 행위”다.

빈곤 포르노 이슈를 짚은 공적인사적모임 인스타 내용 일부. /공적인사적모임 SNS 갈무리

빈포선셋은 빈곤 포르노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과대광고’와 유사하다고 짚었다. 오 대표는 “베트남, 미얀마 등 개발도상국에서 프리랜서로 사업을 기획 및 실행하고 NGO 기관 컨설팅과 사업 평가를 하며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활동한 지 10년 차”라며 “여러 나라를 돌아봤지만 빈곤 포르노에서 다루는 영상만큼 시급하고 심각한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난이나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을 제외하고는, 현장과 광고가 따로 놀고 있다”며 “기부자가 기부금을 냈음에도 얼마나 문제가 해결됐는지를 ‘빈곤 포르노’식 영상으로는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국제개발협력 생태계 관점에서는 역량있는 모금 활동가가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모금 규모 축소를 이유로 빈곤 포르노에 의존하면, 모금 기관의 목표가 ‘사회 변화’보다 ‘모금액’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오 대표는 “빈곤 포르노의 자극만큼 그 지역에서 변화를 이루어냈는가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며 “이에 따라 현장에서 사업 관리에 소홀하게 되면서 프로젝트 수준도 떨어질 수 있다”고 전했다.

◇ NGO 공개 질의 했으나 월드비전·굿네이버스·플랜코리아 ‘미응답’

공적인사적모임 ‘빈포선셋’은 이 대회를 열기에 앞서, 7월 중순 빈곤 포르노가 의심되는 홍보를 하고 있는 구호단체에 공개질의를 보내는 활동도 펼쳤다. 오 대표는 “왜 이렇게 자극적인 영상을 썼는지 물어본 것이 아니다”라며 “해당 영상을 통해 얼마를 모금했고, 사업이 해결하려는 문제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상황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이 잘 제시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등을 물었다”고 설명했다.

주요 7개 단체(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월드비전, 월드쉐어, 컨선월드와이드, 플랜코리아, 함께하는 사랑밭)에 질의서를 보냈는데, 세이브더칠드런과 컨선월드와이드 2곳에서만 질의 기간 내 서면 답변이 왔다.

세이브더칠드런은 “개별 영상에 대한 질의응답보다는 세이브더칠드런의 모금 홍보 영상 촬영 시 업무 지침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다”며 개별 질문에 대한 구체적 응답을 피했다.

컨선월드와이드 또한 “빈곤 포르노를 지양하며, 모금 유도를 위해 자극적 묘사로 동정심을 유발하지 않는다”며 질문에 대한 답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컨선월드와이드는 8월 빈포월드컵이 개최되자마자, 후보에 오른 캠페인 영상을 내렸다.

함께하는 사랑밭은 질의에 기간 내 답변을 제출하지 않은 채 의심 영상을 비공개 처리했다. 이후 빈포선셋 SNS 채널의 카드뉴스를 통해 응답하지 않은 것이 알려지고 나서야 답변을 보내왔다.

월드쉐어 또한 기간 내 질의에 응답하지는 않았으나 추후 빈포선셋이 지목한 빈곤 포르노 의심 영상에 대해 인정했다. 오 대표는 “월드쉐어의 경우 ‘어떻게 하면 빈곤 포르노가 아닌 영상을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며 빈곤 포르노 평가 지표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며 “올해의 주요 사업 목표가 빈곤 포르노 근절이었는데 빈포선셋의 활동이 촉매제가 되었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향후 월드쉐어는 빈포선셋과 빈곤 포르노 근절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반면,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플랜코리아 3곳은 기간 내에 응답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모금 단체인 월드비전의 연간 기부금은 3000억원이 넘으며,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제외한 기부금 단체 중 가장 큰 규모다. 월드비전의 2023년 사업 수입은 3417억3050만원에 이르며, 이중 기부금은 3136억원에 이른다(국세청 홈택스 공시).

빈포선셋은 SNS 채널을 통해 “공개 질의 메일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책무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이라며 “공개 질의의 의도는 NGO를 질책하는 것이 아닌 투명하고 윤리적인 국제개발협력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김지유 빈포선셋 총괄은 “영상을 내리거나 카드뉴스를 보고 회신한 것도 빈포선셋의 활동을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의미인 만큼 성과의 일부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12월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한 ‘빈곤포르노 근절 후디’의 모습. /공적인사적모임 SNS 갈무리

이들의 다음 목표는 올해 12월까지 빈포 월드컵 참여자 1만 명을 달성하는 것. 오 대표는 “월드컵을 마무리한 뒤 연말에는 ‘최악의 빈곤 포르노’ 영상에 상을 주는 ‘빈포 시상식’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향후 빈곤 포르노의 대안을 제시하는 ‘반(反)빈포월드컵’ 기획도 고민 중이다.

오 대표는 “빈곤 포르노는 스포츠로 치면 반칙”이라며 “모금 역량을 키워 ‘반칙하지 않고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빈포선셋은 이런 활동이 각 NGO 내에서 빈곤 포르노에 반대하는 활동가에게 용기를 주기를 기대한다. 오 대표는 “빈곤 포르노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기에 근절을 위한 장기적 대책이 필요하다”면서 “빈포선셋과 함께 협력할 수 있는 동료가 점점 많아져야 빈곤 포르노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kyuriou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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