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11시. 샌프란시스코 구글 베이 뷰의 주차장. 우주 정거장을 연상케 하는 건물의 입구를 찾는 데만 20분이 걸렸다. 구글의 향후 로드맵을 관장하는 인공지능(AI) UX 리서치의 정수진 파트장을 만나 ‘Guest visit’ 절차를 밟는 과정은 출국 수속과 비슷했다. 국제공항을 방불케 하는 메인 홀을 지나 카페테리아로 향한 우리는 세 자매의 비밀 레시피라는 재밌는 이름의 수프를 가득 퍼담았다. 벙거지를 쓰고 골든 리트리버를 산책시키는 직원, 유모차를 탄 영아부터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백발의 어른까지 삼대가 모여 식사 중인 그룹 사이에서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공간마다 예술 경험을 전담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작품을 두리번거리며 인터뷰 장소로 가는 길엔 헨젤과 그레텔이 떠올랐다. 빵 부스러기라도 흘려 두어야 겨우 출구를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과 삶의 균형을 얘기할 때 과연 이 둘을 완벽히 분리할 수 있을까. 규격화된 업무 환경에서 창의성은 떨어지고 생산성은 올라간다. 도서관이나 카페 같은 공간에서 업무 효율이 올라가는 건 열린 공간이 사고를 확장하기 때문이다. 이 으리번쩍한 건물은 관상용 로비가 아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발상의 정거장이다. 10년 후 구글의 미래 먹거리를 고민해야 하는 이들이 규격화된 공간에 갇혀있는 건 해롭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틈을 만들어야 한다. 본인의 일은 스스로 주도해서 만들어 가야 한다. 주니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리더로서 조언은 아끼지 않고 우선순위를 조율하되 어떤 일을 할 건지 관여하지 않는다. 누가 몇 시에 어디서 일하는지 개의치 않는다. 휴가 중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할 수도 낯선 공간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튀어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평일에 스파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일해도 OK.
개척자에겐 지금까지의 성공 방정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새롭고 창의적인 일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실험하고 어떤 방식으로 성과를 낼 것인가. 무제한의 자유와 권한을 주는 것. 본인이 만들어야 책임지고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AI 영역에서는 모호한 것에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뽑지 않아요. 모든 새로운 기술의 앞단은 역시 모호함이 가득한 세계인데, 그 안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기회를 찾아내고 인간의 삶에 유익한 기술이 될 수 있도록 리드할 수 있어야 해요. 특히 자신이 열정을 쏟아붓는 영역이 독창적이고 분명한 사람이 그런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 ‘진짜’를 찾아가는 데 집중한다. “23년 커리어를 쌓는 동안 저도 한때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리더처럼 되려고 애쓴 적도 있어요. 중요한 건 정말 나다운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더 파고들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약점이 아니라 강점에 집중해 부서가 원하는 방향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엄마라서 가능한 역할을 부각하면서 팀원들과 공감하는 것처럼요.”
혼자일 때는 주중 주말 상관없이 맘껏 일할 수 있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는 적정한 선이 필요하다. 100~150%의 목표치가 아니라 70~80%에서 업무 효율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지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아이에게 더 시간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국으로 이직을 결심했어요. 삼성에서 인텔 본사로 옮겼을 때 인사과에 불려 간 적이 있어요. 팀원 중 하나가 저를 두고 ‘미국 문화를 이해 못한다. 삼성식으로 일한다.’고 불평한 거죠. 앞으로는 숨어서 일하든지 조심해라. 네가 늦게까지 일하면 다른 팀원들에게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그다음부터는 정말 조심하게 됐어요.” 혹여나 팀장이 밤낮없이 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6시 이후에는 가급적 메일을 보내지 않는다. 오후에 아이 픽업이 있어 6시 이후에 메일을 보낼 수도 있다는 것에 미리 양해를 구했다. 아이 때문에 무언가 못한다고 얘기하면 팀원들은 오히려 고마워하고 기꺼이 존중한다.
조직을 운영할 때 엄마라는 경력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전 엄마라서 팀장을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이를 키우는 경험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졌거든요. 미국은 특히 해고가 쉬운 사회예요. 어떻게 하면 팀원들을 좀 더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마인드 셋이 달랐던 거죠. 엄마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잖아요.” 무언가를 계속 지적하기보다 장점을 키울 것. 그런 유대를 통해 팀원과의 결속력을 다졌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이들이 거쳐 온 성장 환경, 교육방식을 물어보며 참고했다. 상대적으로 학벌, 학점, 스펙은 동양인이 더 좋은 경우가 많았다.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는 시기에는 이들이 돋보인다. 처음에는 비슷한 비율로 젠더, 인종을 뽑지만 위로 갈수록 격차가 벌어진다. 일을 키우려면 ‘Think outside the box’ 소위 사고를 칠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 열 팀을 끌어모아 협업할 수 있는 스케일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되는 게 아닌, 살면서 갈고 닦는 리더십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량을 뛰어넘는 이들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을까. 문화적 배경에 따라 확실히 다른 우선순위가 드러난다. 동양에선 시험을 잘 보는 스킬이, 서양에선 넓고 깊은 대화가 중요하다. 오늘 무슨 질문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윤리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격의 없이 나눈다. 사고의 제한을 두지 않는 환경에서 야생마처럼 큰 사람과 고정된 틀 안에 갇혀 자란 사람의 역량이 달라지는 건 예정된 수순이다. 논문, 뉴스 기사처럼 인간의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영역을 인공지능이 대체하고 있지만, 무엇이든 답해줄 챗GPT조차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방향과 결과가 달라진다. 선명하고 독창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사고력이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AI를 생성하고 트레이닝하는 것에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참여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하얀 손만 사람의 손으로 인식하거나, 입국 심사 같은 사진 촬영 시 동양인의 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개발에 참여한 상당수의 백인 남성이 편견을 배제하려 노력해도 이들의 사고체계와 가치관이 먼저 투영될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다양성에 관한 폭넓은 포용이 필수적이다. “리더 미팅에 들어가면 여성, 네이티브가 아닌 사람은 저뿐일 때가 있어요. 엔지니어가 많은 자리에선 내가 유저의 대변인, 어떨 때는 여성의 대변인. 어디에 있던 내가 속한 그룹의 대변인이라는 생각으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해요. 여기서 내 역할은 무엇이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지 고민하죠.”
인터뷰를 마치고 텅 빈 메인 홀을 따라 나오면서 여전히 산책 중인 반려견과 눈이 마주쳤다.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다. 존중하는 것이다. 일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그 이상의 기여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천국처럼 보여도 여기는 회사다. 구글이라서 가능한 환경과 대우에 감탄이 터져 나오면서도 각자의 치열한 전투가 충분히 예상되는바. 책임과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언제든 짐을 싸야 할 수도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누구도 지시하지 않는다. 아무도 보지 못한 잠재력을 발굴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필요한 일을 효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설계해 나가는 방법은 의외로 명료하다.
일과 삶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구글에선 성과만큼이나 좋은 양육자의 모습을 더 어필하는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된다. 가정이 행복하고 잘 돌아가야 더 좋은 에너지로 일을 할 수 있는데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게 리더의 역할 중 하나.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회사에서 일만 하던 아버지와 남겨진 가족. 눈부신 속도로 성장해 온 한국 핵가족의 단면을 답습하고 싶지 않은 지금의 세대가 가족을 꾸리는 것을 스킵하고 실버타운을 알아보는 현실이 가속화되지 않도록. 우리에겐 일과 삶의 양립에 관한 더 다양한 관점과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정유미 포포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