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친환경 행동주의’ K팝 팬덤, 이번에는 명품 브랜드 정조준

샤넬 F, 디올 E, 셀린느 E, 생로랑 D.

K팝 팬들이 주요 명품 패션 브랜드의 ‘기후 성적표’를 지난 9일 발표했다. K팝 팬들이 만든 네트워킹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Kpop4planet)’과 국제환경단체 ‘액션스픽스라우더(Action Speaks Louder)’는 각 기업이 공개한 탄소배출량, 재생에너지 전환 계획, 실제 이행 상황 등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겼다. 패션산업의 화려함에 비해 성적은 다소 초라했다. A등급은 없었다. 1020세대를 주축으로 한 팬들은 이들 기업의 변화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디올 앰배서더로 활동 중인 블랙핑크 지수. /YG엔터테인먼트
디올 앰배서더로 활동 중인 블랙핑크 지수. /YG엔터테인먼트

내 아이돌이 ‘부끄럽지 않은 옷’ 입었으면

K팝 팬들은 왜 ‘명품’을 저격한 걸까. 최근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은 앞다퉈 K팝 스타를 앰배서더로 기용하고 있다. K팝의 트렌디한 이미지를 활용해 아시아 시장과 1020 소비자를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블랙핑크 멤버들은 이번 평가 대상이 된 샤넬(제니), 디올(지수), 생로랑(로제), 셀린느(리사)의 앰배서더로 활동 중이다. BTS 멤버들은 루이뷔통(제이홉) 디올(지민), 발렌티노(슈가) 등 앰배서더로, 뉴진스는 구찌(하니), 버버리(다니엘) 등 명품 브랜드 앰배서더로 활약하고 있다. “명품 브랜드 사이에서 ‘K팝 스타 모시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올 정도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들어 10대의 명품 구매력이 매우 높아졌다”며 “명품 브랜드 입장에서 문화리더십이 있는 한국 아이돌은 아시아 시장과 10대 소비자를 공략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이에 팬들이 “뒤에선 환경파괴를 일삼는 패션기업이 K팝 아이돌을 이미지 포장에 이용한다”며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팬들은 기후 성적표를 발표하면서 “우리는 샤넬 옷 입은 제니(블랙핑크)를 오래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지구가 건강해야 한다”며 “명품 브랜드가 환경보호에서도 ‘명품’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캠페인 제목은 ‘명품 언박싱: 그린워싱 에디션’이다. 이다연(21)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는 “이미 ‘끓고 있는’ 세상을 이어받은 우리에게 기후위기는 매우 시급한 일”이라며 “명품 패션브랜드가 미래에 고객이 될 우리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 K팝 스타를 계속 활용할 계획이라면, 책임감을 갖고 실질적인 기후행동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블랙핑크 팬클럽 운영진으로 활동하는 K(가명)는 “팬들은 블랙핑크가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유엔지속가능개발목표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등 환경을 위해 헌신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팬의 입장에서는 블랙핑크가 홍보하는 모든 것이 지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K팝 팬들이 매긴 주요 명품 패션 브랜드의 기후 등급. /케이팝포플래닛
K팝 팬들이 매긴 주요 명품 패션 브랜드의 기후 등급. /케이팝포플래닛

이번에 기후 성적표를 받은 4개 브랜드 모두 탄소배출량 감축과 재생에너지 100% 전환을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팬들은 “명품 패션 기업의 탄소배출량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케이팝포플래닛과 액션스픽스라우더는 독일 뉴클라이밋연구소의 ‘기업 기후 책임 모니터’ 자료를 근거로 이번 기후성적 보고서를 작성했다. 생로랑은 모기업인 케어링, 셀린느와 디올은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차원에서 평가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샤넬의 2021년 탄소배출량은 전년도보다 67%, 케어링(생로랑)은 12%, LVMH(셀린느·디올)는 34% 늘었다. 4개 브랜드 모기업이 2021년 배출한 탄소는 약 930만t(이산화탄소 환산량 기준)이다. 이는 섬유산업의 메카인 인구 1694만명의 캄보디아가 연간 배출하는 탄소량의 절반이 넘는 양이다. 재생에너지 전환 계획도 불충분하다는 게 팬들의 주장이다. 샤넬과 LVMH는 전력 사용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급망 차원에서의 재생에너지 전환 목표를 제시하지 않았다. 케이팝포플래닛은 앞으로 캠페인을 통해 ▲2030년까지 공급망 내 100% 재생에너지 사용 약속 ▲1.5도 지구온도 상승 제한을 위해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의 43~48%를 감축하는 목표 수립 ▲공급망 관련 정보의 투명성 제고 등을 촉구할 예정이다.

기업을 바꾸는 1020 소비자

K팝 팬들의 기후 대응 활동은 처음이 아니다. 세계 각지의 K팝 팬들은 2021년부터 케이팝포플래닛이라는 기후행동 플랫폼을 만들고, 소셜미디어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각 나라 앰배서더가 모국어로 캠페인 관련 콘텐츠를 번역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지역 내 K팝 팬들에게 전하고, 변화에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식이다.<관련기사 행동하는 K팝 팬덤 기후산업을 바꾸다>

이들은 K팝과 관련된 산업을 중심으로 변화를 요구해왔다. 엔터사에 기후대응을 요구한 ‘죽은 지구에 케이팝은 없다’는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플라스틱 앨범을 만들고, 여기에 포토카드와 팬 사인회 응모권을 넣어 팬들에게 수백장의 앨범 구매, 즉 ‘앨범깡’을 유도하는 기획사에 대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관련기사 미끼상품 대량 생산하면서 환경보호 촉구?… 엔터사 이중성에 팬들이 화났다> 엔터사들은 팬들 의견을 받아들여 플라스틱 사용을 최소화한 QR 앨범, 친환경 디지털 앨범 등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YG엔터테인먼트는 지난 2월 탄소배출량을 줄인 인쇄, 제조 기술로 친환경 앨범을 만드는 자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멜론·지니·플로·바이브 등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기업을 대상으로 ‘멜론은 탄소맛’ 캠페인을 시작했다. 요즘엔 주로 앨범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듣는데, 스트리밍 플랫폼 데이터센터에서는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이 낮아 방대한 양의 탄소를 배출하는 점을 지적했다. 이후 2040년까지 기한을 잡아뒀던 친환경 데이터센터 이용 계획을 10년 앞당겼다. 멜론은 지난해 12월부터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센터로 데이터 이전을 시작, 2030년까지 작업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4월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들이 하이브 사옥 앞에서 플라스틱 앨범 생산 중단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케이팝포플래닛
지난 4월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들이 하이브 사옥 앞에서 친환경 앨범 생산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케이팝포플래닛

그런가 하면 현대차가 석탄발전소를 짓는 인도네시아의 알루미늄 기업과 업무협약을 맺자 “BTS를 앞세워 친환경 자동차를 홍보하는 현대차가 석탄발전을 활용해 알루미늄을 생산하는 기업과 협약을 맺은 것은 그린워싱”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1만명 이상의 청원을 받아 현대차에 전달하는가 하면, 인도네시아 K팝 팬들은 수도 자카르타 현대 전기차 충전소 앞에서 방호복을 입고 BTS 음악에 맞춰 커버댄스를 추고, 현대차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이에 현대차는 “아직 해당 기업과 구체적인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잘 논의해 나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다연 활동가는 “현대차로부터 직접 답변받았으니 앞으로 현대차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지켜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케이팝포플래닛은 앞으로 더 많은 팬과 패션 브랜드를 압박해 나갈 예정이다. 이다연 활동가는 “이번 ‘명품 언박싱: 그린워싱 에디션’ 캠페인에는 벌써 프랑스, 멕시코, 인도네시아의 블랙핑크 팬클럽이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며 “패션브랜드에 지속적으로 기후 메시지를 전달해 패션 기업의 말뿐인 다짐들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서용구 교수는 “어릴 때 형성되는 브랜드의 첫 이미지는 평생 쉽게 바뀌지 않는다”며 “10·20대 소비자에 대한 이미지 관리는 기업 마케팅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이유로 1020세대가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브랜드 액티비즘’을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행동은 매우 의미 있다”며 “기업도 이들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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