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일(수)

행동하는 K팝 팬덤 기후산업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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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거세지는 ‘K팝 팬덤 기후행동’

BTS·블랙핑크 모델로 내세우며 성장한
印尼 ‘토고피디아’에 친환경 행보 요구

세계 곳곳 팬들 힘 모아 기후 위기 대응
온라인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 결성도
SNS로 빠르게 소통하며 기후 이슈 확산

블랙핑크는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홍보대사로 선정됐다. 블랙핑크가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기후변화 대응 촉구 영상은 조회수가 총 1000만회에 달한다. /블랙핑크 공식 유튜브 캡처

“BTS(방탄소년단)와 블랙핑크를 모델로 내세우며 회사가 성장했으니, K팝이 추구하는 건강한 지구 만들기에 동참해 주세요!”

지난 1일(현지 시각) 인도네시아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 ‘토코피디아’ 사무실 앞에 현지 K팝 팬들이 모였다. 토코피디아에 친환경 행보를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요구는 세 가지다. ▲2030년까지 회사 운영에 필요한 전기를 100% 재생에너지에서 얻을 것 ▲토코피디아가 발생시키는 탄소발자국을 대중에게 공개할 것 ▲파리협정과 같은 국제 표준에 따라 장기적인 탈탄소 계획을 수립할 것. 전 세계 K팝 팬 2083명이 이 서한에 동의하는 온라인 서명을 마쳤다.

토코피디아는 BTS와 블랙핑크를 홍보 모델로 내세우며 성장한 유니콘 기업이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회사 운영에 필요한 전력량도 크게 늘었다. 전국 데이터센터에서는 컴퓨터 수천 대가 하루종일 돌아간다. 문제는 인도네시아에서는 전력의 87% 이상이 석탄·가스·석유 같은 화석연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토코피디아를 대상으로 이번 기후행동을 주도한 K팝 팬 누를 사리파(22)씨는 “전 세계적으로 1억명이 넘는 K팝 팬덤이 있다”면서 “팬으로서,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 지구를 위해 연대하면 어떤 단체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기업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K팝 팬덤의 기후행동이 거세지고 있다. 누를 사리파씨는 지난 3월 온라인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을 결성했다. 전 세계 K팝 팬이 모여 함께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자 만든 네트워크 형태의 조직이다. K팝 팬 대다수는 환경 문제나 기후 위기에 관심이 많은 ‘Z세대’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연결된다.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할 때 나타나는 팬덤 특유의 응집력을 기후행동에 발휘하며 엔터테인먼트사(이하 엔터사)를 비롯한 다양한 기업에 탄소 저감, 환경 보호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강원 삼척 맹방해변에서 촬영한 BTS 앨범 ‘버터’의 콘셉트 사진. /하이브 제공

K팝 팬덤 “죽은 지구엔 K팝도 없다”

K팝 팬덤이 기후행동에 나서는 이유는 명확하다. K팝을 오래 즐기려면 지구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팝포플래닛이 지난 6월 전 세계 K팝 팬 36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10명 중 9명이 ‘K팝 시장에서도 기후 위기 등을 고려해 친환경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갈 주체로는 95.6%가 엔터사를 꼽았다. 다음은 팬덤(59.4%), 아티스트(39.5%) 순이었다. K팝이 친환경적이지 못한 이유로는 ▲앨범과 굿즈 제품의 과도한 포장(69.7%) ▲앨범 대량 구매(65.7%) ▲조공(가수에게 주는 선물) 시 소비되는 제품과 플라스틱(57.2%) 등을 지적했다(중복 응답).

지난 7월 케이팝포플래닛은 하이브·YG· SM·JYP 등 국내 주요 엔터사들에 기후 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죽은 지구에 K팝은 없다’ 캠페인을 시작했다. ▲앨범과 굿즈 포장에 플라스틱 사용을 최소화하기 ▲탄소 배출이 적은 공연 만들기 ▲환경에 관한 메시지를 담은 음악 제작하기 등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낼 예정이다. 이다연(19) 케이팝포플래닛 한국 활동가는 “아티스트의 음악이나 콘텐츠 방향을 결정하는 건 엔터사”라며 “K팝 문화가 지속가능하려면 엔터사의 참여와 지지가 필수”라고 말했다.

기후변화로 피해를 본 지역을 돕기 위한 성금도 직접 모은다. 지난 1월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 지진과 홍수가 잇달아 일어나자 BTS·블랙핑크·엑소·NCT 등 현지 팬클럽 회원들이 열흘 만에 1억원을 모아 기부했다. 호주 산불(2019), 터키 산불(2021)이 발생했을 때도 세계 각지 K팝 팬들의 릴레이 기부가 이어졌다.

인도네시아 K팝 팬들은 지난해 SNS에서 ‘SavePapuaForest’ 해시태그(#) 달기 캠페인으로 파푸아 열대우림 파괴 이슈를 공론화하기도 했다. 누를 사리파씨는 “파푸아 열대우림 파괴 이슈의 경우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K팝 팬들이 해시태그로 참여했다”면서 “과거에는 다른 가수의 팬덤끼리 사이가 나쁜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기후 위기 대응’이라는 목표 아래 연대하고 있다”고 했다.

“강원 석탄화력발전소 반대” 태국서만 하루 1000번 리트윗

흩어져 있는 K팝 팬들이 끈끈하게 연대할 수 있는 이유는 SNS 덕분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에서 효율적으로 빠르게 소통하며 기후 이슈를 확산하고 있다. 지난달 한국 K팝 팬들은 강원 삼척 ‘맹방해변’을 보호하자는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맹방해변은 BTS의 ‘버터’ 앨범 사진을 촬영한 곳으로 팬들에게는 성지(聖地)나 다름없다. 맹방해변 인근에 석탄화력발전소 설립이 추진되면서 석탄 운반에 쓰일 항만 건설 공사가 시작됐고, 이로 인해 침식이 일어나면서 해변이 망가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한국 K팝 팬들은 지난 14일 맹방해변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중단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이 소식은 팬덤의 SNS 네트워크를 타고 순식간에 해외로 퍼졌다. 태국의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가 이 내용을 태국어로 번역해 트위터에 올렸고, 태국에서만 하루에 1000번 이상 리트윗됐다.

토코피디아 청원에서도 팬덤 네트워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블랙핑크 글로벌 팬덤 ‘블링크’가 힘을 보탰다. 팔로어 740만인 블링크의 ‘맘(mom) 팬덤(글로벌 공식 계정)’이 각국 블링크에 내용을 전달하면서 순식간에 수천 명이 사인한 셈이다.

1일(현지 시각) 인도네시아 현지 K팝 팬들이 전자 상거래 업체 토코피디아에 방문해 “2030년까지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이 서한에는 전 세계 K팝 팬 2083명이 서명했다. /케이팝포플래닛 제공

전문가들은 K팝 팬덤이 기후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로 ‘당사자성’을 지목했다. 대부분 Z세대인 K팝 팬들은 유년 시절부터 기후변화를 일상적으로 겪어왔고, 앞으로 기후변화가 지속될 경우 가장 피해를 볼 당사자라는 것이다. 태국에 사는 NCT 팬 몬프라리야 롭농부아(25)씨는 “2019년 미세 먼지 농도가 짙어져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면서 “수년째 여름이면 홍수가 마을을 덮쳐 노인과 어린이들은 다른 마을로 이주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몬프라리야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후변화의 영향 아래 살아가게 될 세대”라며 “내가 살아갈 환경과 나의 건강, 내 가족과 이웃의 안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K팝 아티스트들이 UN 등 국내외 주요 기관의 기후변화 관련 홍보 모델로 임명된 것도 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블랙핑크는 지난 2월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블랙핑크는 6750만명이 구독하는 공식 유튜브에 “지구는 우리의 행성입니다. 우리의 미래입니다. 기후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라는 영상 메시지를 전하며 기후변화 대응과 COP26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COP26 개최국인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영상이 SNS상에서 천만 번 이상 조회되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며 블랙핑크 멤버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이 밖에도 레드벨벳은 우리나라 정부가 지정한 ‘푸른 하늘의 날’ 홍보대사로, 폴킴은 환경부 기후변화 홍보대사로 각각 활동 중이다.

국내 엔터사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친환경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K팝 팬들의 요구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블랙핑크는 지난 8월 데뷔 5주년 기념 굿즈로 친환경 소재의 소파와 파우치를 선보였다. JYP소속 그룹인 스트레이키즈의 프로듀싱 유닛 쓰리라차(3RACHA)는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자작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K팝 팬덤의 기후행동이 엔터사를 비롯한 여러 기업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임진모 대중문화평론가는 “기후위기나 환경 문제의 경우 팬덤과 엔터사의 협력 관계가 중요해졌다”면서 “엔터사 입장에서도 팬들의 요구를 계속 무시할 순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박길성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팬덤은 엔터사의 주요 소비층”이라며 “당장은 경제적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시스템을 (친환경적으로) 완전히 바꾸기는 어렵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지은 더나은미래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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