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봉사단 ‘티치포올 코리아’ 최은희씨
어린 시절 피난처였던 학교…
하버드 졸업 후 ‘교육’ 돌려줘야겠다 생각
“한 사람이라도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곳이
결국 내가 일하고 싶은 곳이죠”
“난 모든 것을 할 순 없지만, ‘어떤 것’은 할 수 있다(I can’t do everything, but I can do something).”
패기만 넘치는 청년의 말이 아니었다. 하버드대 우등 졸업생이자, 게이츠 밀레니엄 100만달러(약 10억원) 장학금의 주인공인 최은희(24·Joy Choi)씨가 선택한 ‘어떤 것’은 한국의 교육문제였다.(게이츠 밀레니엄은 1999년부터 빌앤드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아시아·히스패닉계 등 미국 소수민족 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매년 지원하는 장학금이다) 미국의 피치트리 리지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최씨는 100여개 경시대회에서 상을 받고, 세계과학경시대회 미국 대표로도 출전했던 수재(秀才)다. 1년 전, 그녀는 ‘개천에서 용이 비상하는 것’을 꿈꾸며 서울에 왔다. 현재 한국의 교육봉사단 ‘티치포올 코리아(Teach For All KOREA)’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부팀장인 최씨는 일주일에 3번,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서 아이 7명을 가르친다.
◇하버드대 우등 졸업생, 탈북 청소년 영어 선생님이 된 이유는?
압구정역-충무로역-명동역. 이제 서울 생활 1년 차인 최씨에겐 출근길 다음으로 익숙한 동선이다. 적어도 300번 이상은 왕복했다. 지난 19일 오후에도, 최씨는 여명학교 등굣길에 올랐다.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느라 하얀색 단화를 신은 최씨는 “하이힐은 힘들다”며 고개를 저었다. 오밀조밀 붙어있는 게스트하우스 고개를 넘은 지 10여 분, 목적지에 다다른 그녀는 숨을 한두 번 크게 쉴 뿐 거뜬했다.
“Hi, everyone(안녕, 여러분).” 순백의 재킷을 차려입은 최씨가 등장하자, 한 여자아이가 자연스럽게 입을 뗐다. “You are so beautiful, today(선생님 오늘 정말 예뻐요).” 영어 말하기가 꽤 자연스럽다. “What did you do last weekend?(주말엔 뭐했어)” 수다 떠는 모습이 영락없는 언니·누나다. 지난해 여름방학에는 네 아이와 영어 말하기 대회를 도전하기도 했다. 교내 대회가 아닌 전국 대회 출전은 처음이었다. 탈북인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영어 단어 외우는 것도 어려워하던 애들이 매일매일 연습을 하는 겁니다. 하루는 남자 아이가 이어폰을 끼고 있길래 ‘무슨 노래를 듣나’ 궁금해 들어봤더니, 제 목소리인 거예요. 영어 스크립트를 녹음한 MP3 파일이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하버드대 우등 졸업생인 그녀가 한국의 교육봉사단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할아버지 고향이 평양이에요. 만약 제가 미국이 아닌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하버드대를 갈 수 있었을까요?” 일종의 빚진 심정이다. 최씨는 “교육은 ‘나의 것(my own thing)’만이 아니다”면서 “필요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pay back)”이라고 했다. 최씨가 처음 사회문제를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사회 시간. 100만명이 죽어나가고, 순식간에 난민 300만명, 고아 40만명이 생긴 ‘르완다 대학살(1994년)’. 피해자들은 겨우 또래 친구였다. 그녀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는지는 개인의 권한이 아니다”며 “강자는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출발 지점이 다르거나 넘어진 약자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공부로 꿈에 한발 다가설 수 있었던 최씨는, 이젠 다른 이의 꿈을 이뤄주는 ‘교육 사다리’를 놓고 있다.
◇”교육은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최씨 또한 출발선이 남들과 달랐다. 어렵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은 그것만이 내가 컨트롤(control)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아버지가 국제 사기단에 속아 전 재산을 날리고 잠적해버렸고,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됐다. 삼남매를 홀로 키우게 된 어머니는 누구보다 강했지만, 여덟 살의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힘든 사건이었다. 소녀는 집보다 학교를 좋아했다. 일종의 피난처였다. 공부를 하면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왔고, 선생님과 친구들은 그녀를 인정해줬다. 그렇게 하버드대와 예일대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 통지서까지 받았다. 자신이 경험했듯, 교육은 사람들이 ‘점프업(jump-up)’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이 힘을 전파해야 했다.
최씨는 대학교 1학년 때, 난민들의 멘토가 되고자 국제구호위원회(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IRC)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다. 졸업한 후 아예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클라크스턴(Clarkston) 난민촌으로 들어가, 6개월 동안 난민들이 영어를 배우고 미국 문화를 익히면서 미국 사회에 정착하는 일을 도왔다. 클라크스턴 난민촌은 미얀마·네팔·태국 등 난민 2만명가량이 생활하는 커뮤니티다. 지난해 지인에게 ‘티치포올 코리아’ 학습 봉사자 모집 소식을 들었을 땐, 남다른 울림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고향이 이북인 것도 한몫했고, 난민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도 있었다. 최씨는 작년 여름 캠프를 기점으로, 아예 한국에서 직장을 얻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최씨는 “국제정책학·국제기구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명의 삶이라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anywhere) 좋다”고 했다.
◇사람을 바꾸는 교육 봉사, 글로벌 인재들이 몰려온다.
교육 봉사에 매료된 글로벌 청년 인재들은 최씨뿐 아니다. 강한별(24·여)씨도 지난 2월, 컬럼비아대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티치포올 코리아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강씨는 지난해부터 학습 봉사단으로 활동하면서, ‘교육학’ 전공을 살려 학습법 진단·비판적 사고 등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강씨는 “교육 봉사는 매주 학생들을 직접 만나면서 소통하기 때문에 삶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교육 봉사 활동이 계기가 돼서 ‘북한 이탈 청소년 지도 교사를 위한 교사 연수 방안’을 주제로 석사 논문까지 썼다. 코넬대를 졸업한 오예인(24·여)씨도 티치포올 코리아 인턴에 지원했다. 포브스 500대 기업 중 한 곳에서 일하던 오씨는 1년 전 티치포올 코리아 최유강 대표의 강연과 비전을 듣고 탈북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오씨는 “많은 탈북 난민들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지만, 재정착 과정에서 적절한 지원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통일 이후 세대를 준비하는 이 단체의 비전에 동참하고 싶다”고 지원 동기를 밝혔다.
교육 봉사의 열기는 태평양을 넘나든다. 미국의 교육 봉사단 ‘티치포아메리카(이하 TFA)’ 출신 봉사자 2명도 이번 여름 티치포올 코리아 인턴으로 합류키로 했다. 조지타운대 출신인 TFA 교사가 여름방학 동안 인턴 봉사자로 활동할 예정이고, 컬럼비아대 학부를 졸업한 후 3년간 TFA 활동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와 다시 봉사단으로 활동하려는 청년도 있다. 최유강 티치포올 코리아 대표는 “미국에서는 ‘TFA 출신=좋은 인재’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져 실제로 맥킨지·구글보다 입사하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된다”면서 “모국에 대한 애정과 사회 기여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우수한 인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만큼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응원이 뒷받침된다면 봉사자들도 성장하고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도 혁신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티치포올 코리아
1990년 미국의 웬디 콥(Wendy Kopp)이 설립한 비영리단체 ‘티치포아메리카(TFA)’는 대학 졸업생들에게 교사 교육을 시키고,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서 2년간 교사로 봉사하게 한다. TFA는 현재 미국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직장 ‘톱 10’의 하나이자, 하버드대 졸업생의 18%, 프린스턴대 졸업생의 15%를 포함해 미국 전역 대학 졸업생의 5% 이상이 매년 지원하는 곳이다. 티치포올 코리아는 2011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졸업생인 최유강씨가 설립한 한국의 봉사단체로, 150여명이 넘는 아이비리그 대학과 서울대 등 국내외 명문대를 졸업한 우수한 봉사자가 활동한다. 봉사자가 되려면 에세이 평가, 모의 강의, 워크숍 3단계 과정을 거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