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일은 ‘자기결정권’ 넘어 ‘생존권’으로 이어져
‘대안적 삶’ 꿈꾸는 지역 청년들의 임팩트 주목해야
28일 서울 중구 온드림 소사이어티에서 ‘2022 Connect Forum(이하 커넥트포럼)’이 열렸다. 이날 ‘지역의 잠재력’이라는 대주제로 진행된 커넥트포럼의 마지막 세션에서는 ‘지역이 만드는 미래’를 주제로 패널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자로는 나영훈 포스코건설 사회공헌그룹장,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정유미 포포포 대표, 유다희 공공프리즘 대표가 나섰다. 모더레이터는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국장이 맡았다.
-지역의 임팩트를 누가, 어떻게 만들어내는 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는 토론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먼저 각자 소개를 한다면.
나영훈=지역사회복지관, 글로벌 NGO에서 활동한 경력을 살려 포스코그룹에서 사회공헌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제철소가 있는 포항과 광양뿐 아니라 베트남 붕타우, 인도네시아 찔레곤, 태국 라용 등 글로벌 지역사회 이슈를 찾아내고 해결한다. 특히 아동, 청년의 자립을 돕는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양승훈=마산에 있는 경남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여성의 일자리, 청년을 지역에 유입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정유미=결혼 후 아이가 생기고 남편을 따라 포항으로 내려가면서 ‘결혼이주여성’ ‘경력단절여성’이라고 불렸다. 포항에 거주하면서 경력단절여성 뿐아니라 결혼이주여성들이 자신들의 고유성과 역사성을 잃어가는 것을 목도하게 됐다. 그래서 그분들의 서사를 그림책으로 만들어 작가로 데뷔시키고, 강사로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하는 포포포 매거진을 발행하고 있다. 한국어와 영어, 2개국어로 출판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단면을 담기 위해서다.
유다희=창의적인 문화예술 작업을 해오다가 자연스럽게 청년과 지역의 문제들과 연결됐고, 공공디자인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컨설팅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5년 광주에서 현대자동차그룹과 진행한 ‘청춘발산마을 프로젝트’가 있다. 마을 안에서 거주하는 청년들의 지지기반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도새재생 사업이다. 현재는 부산·세종·강릉 등에서 주민, 청년들과 창의적인 일자리를 창출해내고 있다.
-이번 포럼에서 지역의 잠재력을 깨우고 임팩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여성의 일’과 ‘청년의 자유’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양승훈=청년에게는 일자리를, 여성에게는 문화시설과 주거를 지원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게 오히려 청년들이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할 자유를 뺏는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여성을 주거와 문화의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건 여성들이 돈을 벌거나 의미있는 일을 통해 뭔가 창출하는 사람이 아닌 소비하는 주체, 가정을 관리하는 주체로만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자면, 스웨덴의 말뫼라는 도시가 있다. 조선업이 무너지면서 현대중공업에 대형크레인을 고작 1달러에 넘긴 산업이 몰락한 도시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북유럽과 중부유럽을 연결하는 허브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스타트업과 사회적기업이 쏟아지고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는 도시가 됐다. 남자는 일터로 나가고 여성은 아이를 돌보는 제조업 도시의 모델이 완전히 달라진 거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남성들도 기존의 제조업 일터만 찾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말뫼 사례를 통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도시와 지역을 발굴해야 한다.
유다희=지난해 행정안전부와 함께 ‘청년마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전국 11곳의 다양한 청년들을 만났다. 지역에서 임팩트를 내는 청년들의 사례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쏟아질 수밖에 없는 시대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례를 하나 소개하자면, 광주 청춘발산마을에서 만난 청년들은 표준적인 일자리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 했다. 이러한 청년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고, 그렇게 마을살이 프로젝트가 기획됐다. 청년들은 이른바 ‘적정 경제’라고 해서 돈을 많이 벌기보다 이것저것 실험들을 해가면서 스스로 생활을 책임지는 삶을 실천했다. 광주 작은 마을에 입주한 한 청년은 마을살이를 ‘관심과 간섭 사이’라고 이야기했다. 동네 할머니들이 아침마다 문을 두드리고, ‘개똥 치워라’ ‘담배를 왜 거기서 피냐’ 등의 말이 간섭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느날에는 배고플 때 따뜻한 한끼를 챙기는 관심을 보인다는 거다. 이처럼 청년들의 다양한 삶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정유미=지역에서 사업을 하면서 창업 초기에는 생경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 중에 하나가 ‘남편 허락 받고 나왔냐’는 질문이다. 사업 아이템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였는데 말이다. 당시엔 굉장히 당혹스러웠는데, 지난 2019년부터 포포포에서 결혼이주여성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살펴보니까 실제로 일부 여성들은 일거수일투족을 남편에게 허락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특히나 아이를 두고 본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일은 생존권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지역에서 여성들이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건 그간 관심받지 못한 영역이기도 하다.
나영훈=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인근의 ‘찔레곤’이라는 도시에 포스코 인니제철소가 있다. 현지에 제철소를 지으면 지역 청년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게 되는데, 그 지역에는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이 굉장히 많았다. 사정을 알아보니 지역 청년들이 최소한의 역량에도 미치지 못해서 오히려 지역 사회 외부에서 유입된 인력들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지역 청년들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설립해서 배수로 관리, 분리수거, 식목 등의 업무를 주고 동시에 용접이나 문서 작업 등 직업 훈련을 진행했다. 그렇게 6개월에서 1년 정도 지속하면서 지역 청년들을 그룹사에서 고용하거나 더 좋은 직장으로 재취업시키는 사례를 만들었다. 이처럼 아무리 좋은 지원이라도 지역 사회 여건에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하나, 청년들의 성장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는 지원을 한다면 지역 사회와 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에서 여성과 청년이 활동하는데 장애물이 굉장히 많은데, 이러한 장애물을 걷어낼 수 있는 연대와 협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한다. 지역의 관행이나 편견에 부딪혀 사업에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구와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했나.
유다희=일본에서는 ‘마을 만들기’에 굉장히 중요한 사람으로 외지인을 꼽는다. 우리나라도 로컬크리에이터나 지역에서의 청년 창업을 지원하면서 점차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지역에 들어가서 활동하려면 지역 사회의 환대와 지지가 필요하다. 광주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도 주무관 한 분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지역 사회와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외지 청년들이 창업을 통해 지역 내에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려고 배타적인 정서가 작동하는데, 청년들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함께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관계망 구축도 꼭 필요하다.
정유미=지역 여성, 특히 엄마들의 잠재력이 큰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을 어떻게든 잘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한몫한다. 이들에게 많은 예산이 필요한 건 아니다. 지역에도 ‘눈 먼 예산’이 많고 유휴공간이 존재하지만, 정작 지역 여성들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을 찾아 활동하는 여성들이 많다. 다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지역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다양한 활동을 소화하고 있는 레퍼런스를 경험하고 공유하는 공간이다. 여성의 가능성을 지역의 유휴자원과 결합시키면 폭발적인 영향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영훈=현실적으로 기업도 자선적인 활동보다는 비즈니스 전략과 연계한 CSR 차원의 혹은 ESG와 연계한 활동을 선호하고 있어 여성·청년과의 접점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실정이다. 결국 지역을 바꾸는 주체는 청년이고, 이들의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 외부 자원을 지원하고 연결하는 건 기업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승훈=연결이란 관점에서 공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여기서 공간은 과업이 부여되지 않고 자율성이 보장되는 곳이다. 장소는 로컬의 고유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지역의 특색이 발현될 수 있는 곳이 장소다. 지역에 들어오는 청년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이러한 공간과 장소가 마련돼야 한다.
-공간을 마련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든 잘 성장하려면 지원이 중요한데, 돈의 흐름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정유미=지원사업은 보통 1년 단위로 11~12월에 결산을 하기 때문에 그 시기에 맞춰 자금이 잘 집행됐는지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보니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후속연계가 없이 새로운 프로젝트만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본래의 비즈니스 모델을 계속 발전시켜 성장시키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유다희=지난해 청년마을 12곳을 지원하면서 기업 자금과 공공 정책자금의 목표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업 자금은 목표에 대한 자율권이 있지만, 전문적이고 투명한 사용이 필수적이다. 공공 정책자금은 계획승인된 집행권과 많은 사람에게 지원해주는 프로세스가 중심이 된다. 이 두 자금이 시너지를 내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제언한다면?
나영훈=몇 년전에 미국 코카콜라 본사에 갔는데, CSR 목표로 ‘여성 500만명이 2020년까지 자립하도록 돕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코카콜라와 여성의 자립이 무슨 관계냐고 질문했더니, 여성의 자립을 지원하는 게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찾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기업이 이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면 앞으로 사회문제 해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양승훈=여성과 청년이 지역에서 도전한다고 했을 때 문턱을 어떻게 낮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주어진 숙제를 잘하는 청년’과 ‘주어진 숙제를 잘하지 못하는 청년’으로 나눠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 아닌 청년들에 자율성을 줘 다양한 시도를 부담 없이 해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다희=지역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활동하는 여성, 청년들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게 중요하다.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히 역할을 수행한다면 자연스레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
정유미=지속가능한 삶과 미래를 위해서는 돌봄에 대한 부담을 여성에 지우면 안 된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정부·지자체는 지원이 필요한 당사자의 입장에서 어떤 게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김수연 더나은미래 기자 ye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