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좌담회] 기후변화 시대, 농업이 미래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2000년 전후의 ‘닷컴 붐’을 잇는 차세대 비즈니스로 농업을 꼽는다.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 ‘기후 기술의 미래(The Future of Climate Tech)’에 따르면, 미국의 기후 기술 투자의 대부분은 ▲농업·식량 ▲교통·물류 ▲에너지·전략 등 세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농업·식량 분야의 지난해 투자금은 58억달러(약 6조6300억원)로 가장 크다. SVB는 올해 상반기에만 47억달러(약 5조3700억원) 투자가 이뤄졌고, 올해 말까지 총 투자금은 94억달러(약 10조74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조선일보 더나은미래가 기후변화 시대 농업의 미래를 진단하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성수동 카우앤독에서 진행된 좌담회에는 제23대 농촌진흥청장이자 한국벤처농업대학 설립자인 민승규 한경대학교 석좌교수, 농산업 육성·지원 기관인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의 홍영호 벤처창업본부장, 농식품 전문 임팩트투자사인 소풍벤처스의 한상엽 대표가 참여했다.
좌담회에 앞서 이들은 ‘농업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농업 안에 종자, 생산, 유통, 금융, 관광을 넘어 인공지능(AI)과 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가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중 어느 하나를 콕 집어 농업의 미래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농작물 생산만 해도 노지에서 이뤄지는 관행 농업을 비롯해 친환경 농업과 유기 농업, 기술 기반의 스마트팜 등 여러 갈래로 나뉜다는 설명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날 농업의 ‘소셜임팩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기후변화 시대 농업의 의미, 지구를 살리는 농업 분야의 혁신 기술들, 농식품 분야 투자 등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좌담회 진행은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장이 맡았다.
농업은 그 자체로 ‘소셜임팩트’
―기후변화 시대, 농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빌 게이츠도 제프 베이조스도 농업 기술에 투자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한상엽=농업은 사회적 가치와 재무적 가치를 동시에 가져갈 수 있는 대표 분야다. 소풍벤처스는 2년째 농식품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전문적으로 하고 있다. 투자사 입장에서 한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다. 기후변화, 감염병 등의 영향으로 사회문제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이런 문제들을 더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야가 없을까 고민했다. 그 결과, 임팩트가 가장 큰 분야가 농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민승규=과거에는 ‘할 일 없으면 농사짓는다’는 말을 했는데, 지금은 농업을 매력적인 산업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높아졌다. 하지만 농업은 여전히 접근하기 까다로운 산업군에 속한다. 기회와 어려움이 공존하는 과도기에 있다. 이 시기에 지혜를 발휘해야 희망 있는 산업으로 나아갈 수 있다.
홍영호=농업 선진국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세계 농식품 최대 수출국은 미국. 그다음이 네덜란드다. 농업 강국으로 불리는 두 나라의 공통점은 전후방 산업이 고루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농업이 바로 선 나라는 다른 산업도 튼튼하다.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7국(G7)만 하더라도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농식품 수출 규모가 200억달러를 넘는다. 우리나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민승규=네덜란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덧붙이겠다. 네덜란드는 30년, 50년 앞을 내다보는 농업정책을 발표하는 나라다. 과거 기계농업을 거쳐 첨단농업, 인공지능(AI)까지 나왔다. 그런데 작년에 ‘순환 농업’을 선언했다. 농업이라는 건 일반 산업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 농업은 생명을 다룬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씨앗을 땅에 심으면 그 씨앗은 땅에서 투쟁한다. 투쟁의 과정을 거쳐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 그게 바로 농업이고, 자연의 순환이다.
―농업에 기술을 도입할 때도 자연과의 조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인가.
민승규=첨단 농업으로 대표되는 스마트팜에서는 좋은 것만 집어넣는 양액 재배를 한다. 마치 농업을 공장처럼 생각하는 거다. 첨단농업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농업이 생명을 다루는 산업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홍영호=VC에서 농업 분야에 관심을 갖고 수익이 난다고 평가하지만, 사실 농업은 기간 산업이고 생명 산업이다. 그 자체로 임팩트투자다. 농업기술실용화재단 설립 초기인 10여 년 전만 해도 무척 헤맸다. 단순 가공식품 기업에만 지원했는데, 현재 재단 보육 기업의 50% 정도가 테크 기업이다. 주력 분야도 농업과 관련된 자재, 생산물, 가공식품, 유통 플랫폼까지 다양해졌다. 특히 IT나 바이오 기술 등이 농업으로 굉장히 빠르게 들어오고 있는데, 결국 농업을 영위하는 데 최적화하거나 효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활용되고 있다.
농식품 혁명이 도래한다
―농업이 식량 문제나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 산업으로 떠오른 건 ‘기술’ 때문이다. AI, 빅데이터 등과 같은 첨단 기술을 농업에 어떻게 잘 접목시킬 것인가가 관건인 것 같다.
민승규=네덜란드에 머물 때 ‘IOF(Internet of Food&Farm)’라는 농업 연구 프로젝트를 접하고 깜짝 놀랐다. 연구계획서만 400페이지 되더라. 연구 책임자를 두 번이나 만나 인터뷰했다. 그때 들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첨단 기술을 농업에 접목하는 시기, 새로운 파워 게임이 진행 중이다.” 그 말처럼 세계 각 나라는 이른바 ‘농업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스케일과 스피드로 말이다. 아직 어느 나라가 주도하게 될지 모른다.
홍영호=바꿔 말하면 우리나라에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농업 기술력으로만 보면 글로벌에서도 10위권 안에 든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죄다 일본에 가서 배웠다. 정책 자료조차 일본을 따라 할 정도로 기술력 차이가 컸는데, 지금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됐다.
―투자 관점에서 농업은 얼마나 경쟁력이 있나.
한상엽=조만간 농식품 혁명이 온다고 보고 있다. 지금 VC 투자군에서 바이오·헬스케어가 대장이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다음이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으로 대표되는 모빌리티. 소풍벤처스에서는 농식품 산업을 차세대 주자로 꼽고 있다. 유엔 지속가능개발목표(UN SDGs)에 명시된 169개 세부 목표 중에서 100여 개가 농식품과 연관돼 있다. 일례로 헬스케어 쪽이라고 생각하고 투자했는데 결국 농업으로 귀결되고, 핀테크로 접근한 기업이 농업의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케이스도 많았다. 이처럼 농식품 분야는 다른 산업과 유관성도 높기 때문에 농식품 혁신이 일어나면 사회 전반에 임팩트를 줄 수 있다. 투자 수익 관점에서도 무리가 없다.
민승규=예전에 나온 개념인 ESG가 왜 최근에야 뜨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전 세계 투자 규모가 약 10경원 정도 된다고 한다. 투자라는 게 포트폴리오에서 한쪽이 잘되고 한쪽이 안 되면 자칫 제로섬게임이 된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전 세계 각 투자처 모두가 성장해야 수익을 얻는데 그 방법론 중 하나가 ESG 투자다. 같은 관점에서 높은 잠재력에도 상대적으로 소외된 농업은 곧 주목받게 될 거다.
―그럼에도 여전히 농업 분야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다.
민승규=농업에 돈 될 게 많은데 못 보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소비자들이 소셜임팩트 기업에 기꺼이 지갑을 열면서도 농업에는 그러지 않는다. 정서적으로 그렇다. 그러다 보니 VC 입장에서는 회수 기간도 길고 하니까 투자를 주저하게 된다.
홍영호=여러 장벽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걸 돌파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농업에 ‘팁스(TIPS) 프로그램’을 적용하면 어떨까 싶다. 민간에서 기술력을 갖춘 농업 창업팀에 선투자한 뒤 추천하면 정부가 연구개발·창업사업화·해외 마케팅 등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농업 분야에 특화된 VC가 농업 법인이나 농업인을 발굴해서 판로를 확보할 유통사와 함께 초기 투자하고, 후속으로 정부의 정책 자금을 유치하면 된다. 지금도 농업 정책 자금을 지원하지만, 3년 거치 10년 분할 상환하면 더는 투자금으로 받을 게 없다. 대출을 받아 스케일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 청년 농업인 중에 성공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인데, 농업에 펀드 개념을 도입하면 그 수가 굉장히 많아질 거다.
―주목할 만한 농업 벤처 사례엔 어떤 게 있나.
홍영호 = 농업기술실용화재단에서 농식품 벤처 육성 기업을 선발해 육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300곳이 넘는다. 전후방 산업 기업이 다수 포진해있다. 전방산업의 대표 사례로는 비규격품 감자를 활용해 빵을 만드는 ‘감자밭’을 꼽을 수 있다. 이미 춘천 지역 명물로 자리 잡았고 백화점에도 입점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월매출만 20억원 이상 나온다. 감자를 계약 재배하는 형태로 사업을 확장한 ‘록야’도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빅데이터로 생산성을 높이는 노지 스마트팜 기업 ‘에이아이에스(AIS)’도 대표 보육 기업 중 하나다.
한상엽= 최근 AIS는 충북 괴산에 3000평 규모로 노지 스마트팜 구축 계약을 성사시켰다. 창업 4년 만에 첫 매출이다. 노지 스마트팜의 핵심은 AI와 빅데이터를 통한 분석이다. 사업이 확장될수록 정확도는 올라간다. 특히 이번 계약건의 경우 대규모 농장의 일부를 맡았기 때문에 비교 데이터를 더 많이 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진다
―과거 단순한 먹거리 산업이었던 농업이 최근 ICT, BT 등과 융복합되면서 확장하는 추세다.
민승규=요즘 농식품 환경이 급변하면서 비즈니스 모델로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업종 간 경계가 명확했다. 금융, 운송, 요식업 등 뚜렷하게 구분됐다. 그런데 ‘배달의민족’이나 ‘카카오T’ 같은 플랫폼 사업이 등장하면서 업종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빅블러(Big Blur) 시대’다. 빅블러 시대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경쟁자가 등장한다. 과거 한우 농가의 경쟁자는 수입 쇠고기 혹은 돼지고기 사업자였다. 그런데 식물성 고기가 나오면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됐다. 미국 식물성 고기를 생산하는 ‘임파서블푸드’의 비전은 ‘지구상에서 축산업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한다. 식물성 고기는 축산물이 아니다. 수입 쇠고기는 관세를 매기는데, 식물성 고기는 세금도 안 물고 축산물도 아닌데 경쟁자가 된 거다.
홍영호=농식품 환경의 변수는 점차 늘고 있다.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산업의 고도화를 이뤄야 하는데, 농업에 대한 정밀한 통계와 데이터가 부족한 상황이다. 조사도 잘 안 돼 있다. 시장 규모라든지 기대 수익을 측정하기가 너무 어렵고, 과감한 투자도 이뤄지지 않는 거다.
민승규=맞는다. 과거 농업의 경쟁력은 장비나 기계에서 나왔다. 지금은 다르다. 어떤 데이터를 쓰는지, 어떤 알고리즘을 활용하는지가 핵심이다. 업(業)의 경쟁력이 바뀌어버렸다는 거다. 농업 데이터는 흩어져 있다. 정보가 모이고 호환이 돼야 빅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는데 그 정비 작업이 아직 안 됐다. 데이터가 곧 경쟁력이다.
한상엽=실제 투자 포트폴리오 중에 데이터 기업이 있다. 식품 데이터를 다루는데, 한국에 수출하고 싶어도 한국의 식품 소비 데이터가 없어서 주저하는 해외 농식품 기업에 설루션을 제공한다. 호주대사관과 인도대사관의 상무관이 데이터를 사서 자국 농가에 보급한다. 데이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에는 노지스마트팜 기업, 가상발전소 기업, 농기계 제조기업 등 3자가 만나 기상 데이터의 정확도를 올리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농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민승규=농업의 스펙트럼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10여 년 전 아이폰이 나왔을 때 다들 비관적이었다. 전화기와 태블릿, MP3 플레이어를 왜 합치냐는 거였다. 스티브 잡스는 유일하게 불편을 느꼈던 사람이다. 농업도 불편을 해소하는 사람들이 주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 스타트업은 온실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나방을 퇴치하는 소형 드론을 만든다. 나방의 궤적을 감지해 프로펠러로 갈아버린다. 가격은 한 대당 1유로 정도다. 이게 혁신이고 소셜임팩트 아니겠나.
홍영호=하버드대 출신의 한 농업벤처대표는 농사짓기 좋게 만드는 설루션을 제공한다. 농사를 지을수록 지력(地力)이 떨어지는데 이걸 회복시켜서 되파는 식이다. 어떻게 이런 기획이 됐는지 궁금했는데, 전공이 디자인이라고 하더라. 농업 생태계는 앞으로도 계속 확장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한상엽= 농업의 사회적가치를 고려하면 분명 미래 산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생산의 3요소인 ‘토지’ ‘노동’ ‘자본’ 측면에서 농업을 바라보면, 자본은 고도화되고 있는데 농지는 줄고 농가 일손은 부족한 현상이 지속하고 있다. 농업은 기후위기, 지방 소멸 이슈와도 연결된다. 결국 기술이 붙어서 데이터 기반의 전략적 의사 결정을 이루고 규모의 경제도 달성할 수 있다.
민승규=기후변화로 매년 농지는 줄고, 기상이변으로 농사 여건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농업 AI는 세계 식량 문제 해결에 하나의 설루션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대비하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고, 농업계에 AI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스템이 구축되고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정리=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