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포굿, 국내 첫 업사이클 공동 브랜드 출시
소규모 창작자에 설비 공유 ‘리플라 프로젝트’
여성청결제 뚜껑으로 만든 호루라기 등 제작
“소규모 회사에서는 업사이클 제품을 만들고 싶어도 값비싼 설비를 갖추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우리가 가진 설비를 공유하고 오랫동안 쌓아온 노하우도 알려주면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죠.”
박미현(36) 터치포굿 대표가 지난 5월 국내 최초 업사이클 공동 브랜드 ‘리플라’를 출시했다. 터치포굿은 2008년 설립된 1세대 업사이클 기업이다. 지난달 27일 만난 박 대표는 “터치포굿의 설비를 활용해 소규모 창작자들이 제품을 만들고 공동 브랜드를 붙여서 판매하는 ‘리플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프로젝트에 지원할 수 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이날은 리플라 프로젝트의 제품을 제작하는 날이었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서울 창신동 터치포굿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세이브앤코는 여성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성생활용품을 만드는 소셜벤처다. 박지원 대표는 분홍색 플라스틱 뚜껑을 한 봉지 가득 가져왔다. 박미현 대표는 “이 뚜껑들이 잠시 후면 멋진 제품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라며 웃었다.
“아이디어만 들고 오세요”… 설비와 제작 노하우 공유
박지원 대표는 자사 여성 청결제 뚜껑을 방범용 호루라기로 제작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로 리플라 1기에 선발됐다. 그는 “여성 청결제 용기를 유리로 만들고 싶었지만 욕실 제품이라 깨질 위험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플라스틱 통을 택했다”고 말했다. 대신 고객들이 다 쓴 용기를 보내주면 홈페이지 결제 시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주는 ‘용기 회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날 가져온 뚜껑들이 바로 고객들이 보내준 것들이라고 했다. 그는 “판매 수익 전부를 여성 성폭력 피해자에게 기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박미현 대표가 박지원 대표를 작업실로 이끌었다. 업사이클 공정에 필요한 기계 여러 대가 놓여있었다. 폐플라스틱을 재질과 색에 따라 수작업으로 분류한 뒤 기계로 ▲세척 ▲건조 ▲파쇄 ▲금형(금속 틀)을 통한 성형 등을 진행하게 된다. 파쇄기, 세척기 등의 기계 비용과 환기 시설, 전기 공사 비용 등을 합하면 설비를 갖추는 데만 5000만원 정도가 든다는 게 박미현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리플라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공정에 필요한 모든 기계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세척이 끝난 뚜껑을 분쇄기에 쏟아부으니 잘게 잘린 플라스틱 조각들이 밑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박미현 대표가 작은 빗자루로 조각을 한데 쓸어 담았다. 다음은 플라스틱 조각을 사출기에 넣고 레버를 돌릴 차례. 녹아 내린 플라스틱이 금형 안으로 들어와 틀 모양대로 식으며 굳었다. 호루라기가 찍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3분 남짓이었다.
금형에는 공동 브랜드명인 ‘REPLA(리플라)’가 새겨져 있었다. 박 대표는 “개별 브랜드명을 새겨 넣은 금형은 한 업체 외에는 쓸 수가 없지만 공동 브랜드를 새기면 한 대로 여러 업체가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규모 업체들이 1개에 100만원이 훌쩍 넘는 금형을 제작해놓고 수명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게다가 금형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많이 배출됩니다. 금형을 하나라도 덜 제작하는 게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죠.”
“업사이클 생태계 위해 소규모 사업장과 연대할 것”
리플라 1기에는 박지원 대표를 포함해 일반 회사원, 업사이클 엔지니어, 영상 크리에이터 등 총 4명이 뽑혔다. 종이 재활용을 방해하는 스테이플러 대신 쓸 수 있는 클립, 페트병 뚜껑 밴드를 자를 수 있는 분리배출 전용 가위, 마스크를 걸어둘 수 있는 고리 제작 등의 아이디어를 각각 제안했다.
특히 회사원 박길상씨는 직접 특허를 받은 ‘특수구조 클립’을 업사이클 제품으로 만들고 싶다며 설계도를 공유했다. 현재는 리플라 1기 참가자들의 아이디어가 모두 제품으로 제작돼 텀블벅 펀딩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향후 터치포굿 사이트에도 올라갈 예정이다. 판매 수익은 디자인, 제작, 판매의 기여도에 따라 배분된다.
터치포굿이 업사이클 생태계를 위해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0년부터 업사이클 기업이 요청하는 소재를 찾아주는 ‘소재 중개소’를 운영해왔다. 톤 단위 대량 구매를 원칙으로 하는 업사이클 산업 특성상 소규모 기업이 소재를 수급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고, 소재 공급처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터치포굿은 우유팩, 폐현수막 등의 소재를 대량 수거한 뒤 소규모 사업장에서 요청하는 만큼 조금씩 판매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용노동부가 주최하는 ’2021년도 환경 분야 사회적 기업가 육성사업’의 운영기관으로 선정됐다. 초기 창업 단계에 있는 13팀을 대상으로 공간 지원, 사회적경제 기업 창업 관련 멘토링 등을 진행한다. 박미현 대표는 “업사이클 생태계가 좋아져야 터치포굿도 잘될 수 있다”면서 “업사이클 제품 사용이 일상화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연대하겠다”고 말했다.
강태연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kit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