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공익추적] 사회에 헌신하며 일하자더니, 직원이 헌신짝인가요?

[직장 갑질 사각지대, 비영리단체]
폭언·폭력에 반려견 산책까지 지시하는 사무소장
돈 버는 일 아니라며 희생 강요하는 상급자

“광범위한 왕따, 공개적 모욕, 차별과 권력 남용 등으로 ‘유독한(toxic)’ 노동 환경에 처해 있다.”

이달 초 발표된 국제앰네스티 근무환경 조사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국제개발단체와 인권단체를 지원하는 미국 콘테라그룹이 심리학자들과 함께 국제앰네스티 국제사무소 전체 직원의 75%에 해당하는 475명을 대상으로 조사·분석한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직원들은 상급자로부터 ‘너는 쓰레기야’ ‘그만둬라’ ‘계속 일하면 인생이 불행해질 것’ 등 상습적인 폭언에 시달린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인권단체에서 벌어진 ‘직장 내 갑질’ 실태다. 국내 비영리단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나은미래는 지난 한 달간 전·현직 비영리단체 노동자들과 접촉해 직장 내 갑질 사례를 조사했다. 우리 사회의 인권 개선을 위해 힘쓰는 그들이 처한 상황은 여느 영리기업의 갑질 사례 못지않았다.

고용 불안, 개인 심부름… 직장 갑질 사각지대 놓인 UN 기구 한국사무소

A씨는 계약직이다. 계약 기간은 6개월 혹은 9개월로 일정하지 않다. 고용 불안 탓에 상급자의 괴롭힘을 넘어 부당한 처우까지 감내하는 UN 기구 직원이다.

“UN 기구 한국사무소에서는 사무소장 눈 밖에 나면 끝이라고 봐야 해요. 회의 중에 직원을 향해 펜을 던지거나 장난식으로 뒤통수를 때리는 일도 일상입니다. 본부 차원에서 마련한 옴부즈맨 제도가 있지만, 갑질 내용을 본부에 접수시켜도 이게 다시 한국사무소로 내려오기 때문에 사실상 유명무실하죠.”

UN 기구에서 지역 사무소장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직원 10여 명의 고용계약 여부는 물론 연봉까지 결정한다. UN 기구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전문직의 경우 P급(P1~5)·D급(D1~2)의 직급을 부여받는데, 계약직을 벗어나 P급 이상으로 정식 채용돼야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고 이직도 수월해진다. A씨는 “우리 조직의 단기 계약직 비율은 현재 70%를 훌쩍 넘는 상황이라 사무소장에게 감히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사무소장의 전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UN 기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B씨는 “사무소장이 어느날 유기견을 입양했다고 하더니, 그 뒤로 본인이 야근을 할 때면 직원들에게 반려견 산책을 시키라고 지시했다”면서 “당시 모든 직원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경험해본 일”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무소장은 사무실과 1.5㎞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친절히’ 알려줬다고 한다.

공개적인 망신 주기를 당했다는 직원도 있다. 지난해 UN 기구에서 이직한 C씨는 “상급자가 업무 지적을 하면서 직급이 더 낮은 직원에게 검토받고 가져오라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순교 문화’에 멍드는 비영리단체 노동자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비영리단체 직원들은 “비영리 활동가라는 사명을 노동자의 권리보다 앞세우는 조직 문화에 조금씩 지쳐간다”고 입을 모았다. 상급자들이 “우리의 작은 희생으로 많은 사람이 희망을 얻는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하나”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등의 발언을 하며 지나친 업무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국제앰네스티 조사보고서는 이 같은 조직문화를 비영리단체 특유의 ‘순교 문화(martyrdom culture)’라고 지적한다. 국제구호단체에서 일하는 D씨는 “희생과 헌신을 지나치게 강요하면서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원에게는 개인의 문제를 탓한다”면서 “업계에서 ‘헌신을 강요하지만, 사람은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우스개가 나오는 이유”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국제구호단체 직원 E씨는 “신입사원 교육 때 정기후원자 가입 목표를 할당한다”면서 “선배들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가족이나 친구를 동원해 겨우 할당량을 맞춘 기억이 있다”고 고백했다.

폐쇄적인 조직 문화가 직원들의 사기를 꺾는 경우도 있다. 국제인권단체에서 근무하는 F씨는 “정규직이 아닌 업무지원을 하는 인턴이나 계약직에게는 주요 내용을 공유하지 않는다”면서 “업무 효율은 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로 모두가 불편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직문화 개선하지 않으면 유능한 젊은 활동가 잃게 될 것”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여러 비영리 노동자들은 갑질하는 상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서도 비영리 활동 자체에는 애정을 보였다. 비영리단체 내부의 갑질 사례가 공론화되면 후원자가 줄고 활동이 위축될까봐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비영리 내부의 조직문화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유능한 젊은 활동가들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는 “민주적 사고방식이 훈련된 젊은이들은 경직된 조직문화에 실망을 넘어 고통스러워한다”면서 “과거 본인의 결단으로 일을 추진해 여기까지 온 1세대 활동가들은 지금부터라도 조직 내부 민주주의에 대해 교육받고, 직원 고충을 해결하는 과정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 21일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을 내놨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명시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7월 시행을 앞두고 내려진 조치다. 네트워크형 공익단체 ‘직장갑질119’는 직장 내 부당한 대우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자원봉사로 참여한 241명의 변호사, 노무사, 활동가들이 SNS 오픈채팅과 이메일을 통해 매일 무료로 법률 상담과 갑질 대응 방법에 대해 상담을 진행한다. 지난달에는 제보받은 사례 2만5000건을 토대로 ‘직장갑질 예방 매뉴얼’과 ‘모범 취업규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노동법 전문 조석영 변호사는 “직장 내 갑질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를 공론화하기에 앞서 갑질 피해에 대한 증거를 확보해 당사자로부터 사과와 시정을 얻어내는 게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라며 “증거 확보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것인데, 녹취나 정신과 진료 기록 등 객관적 증거뿐 아니라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작성한 일기도 증거 효력이 있다”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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