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등산보다 힘든 精算(정산)

한 페이스북 친구가 ‘사업보다 정산이 더 어렵다’는 글을 올리자, 댓글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다녀온 산악인 엄홍길님이 ‘어느 때가 가장 힘드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정산’이라고 하셨단다ㅠㅠ”라는 글부터 “기업이 공동모금회처럼 변해간다” “모두가 공감하는데 바뀌지 않는 이유는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 “적정 수준의 행정이 투입되고 사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불신사회라서 그렇다. 관급공사에서 디폴트가 ‘을’을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시작하니…” “행자부 회계지침부터 뜯어고치고 쓸데없이 서류 늘리는 공무원들 없게 정산매뉴얼 만들어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 정산 어렵게 하면 사업을 철회할 정도로 압박할 필요가 있다”까지. 분노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다른 한편에선 기획재정부의 국고보조금통합관리시스템(e나라도움)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한 정부 산하기관 관계자는 “e나라도움 때문에 사업 못하겠다는 단체도 있어, 입찰 응모단체 구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분명 기재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보조금의 투명한 검증이 가능해진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는데, 이건 무슨 말일까. 신용카드를 통해 모든 지출을 검증하겠다는 것인데, 입찰 과정에서 이미 1차 서류심사 2차 PT와 면접을 통해 뽑아놓고, 사후엔 ‘사업 담당 기관을 못 믿겠으니 모든 통장 내역을 공무원인 우리가 들여다보겠다’는 식이다. 복지와 문화예술 등 올해 e나라도움이 시작된 현장에선 현실에 맞지 않는 규정 때문에 겪는 혼란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방산비리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차장급 직원이 처남 회사에 200억원어치 용역을 몰아준 뒤 잠적한 사건이 또 발생한 걸 보면, 정부의 고충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비리사건은 만국 공통으로 생긴다. 다른 점은 사후 처리다. 이 같은 사건이 생기면,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통제와 규제의 강도를 점점 높인다. 모두를 잠재적인 비리 행위자로 규정한 채, 이걸 막겠다며 온갖 방지 시스템 도입을 약속한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에베레스트 등산보다 힘들다는 정산’이 된 것이다. 하지만 결코 이렇게는 막을 수 없다. 선진국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신뢰의 기반하에서 민간기관을 정부의 파트너로 보되, 랜덤(random) 조사를 통해 비리를 발견하면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벌칙’이 부과되는 식이다.

최근에 읽은 ‘한국의 제3섹터’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국가공공성’뿐이었다. 사회공공성, 시장공공성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공공성의 주체는 국가뿐 아니라 영리 영역과 사회로 확대될 수 있음에도 권위주의적 국가의 지배하에서 자율적이고 공적인 시민, 시민사회는 발전하기 어려웠고, 기업 또한 사회적 책임에 충실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도 좀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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