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도구로 21세기의 문제를 풀고 있지는 않나

AVPN 글로벌 콘퍼런스 2026에서 마주한 ‘자선의 역설’

“비영리는 지금 자선의 역설 속에 있습니다. 20세기의 역량과 도구, 인프라로 21세기의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요.”

아시아 최대 사회적투자 네트워크 AVPN이 지난 8월 말 인도 뉴델리에서 연 글로벌 콘퍼런스에는 전 세계 2000여 명의 임팩트 리더가 모였다. 그 자리에서 구글닷오알지(Google.org) 아시아태평양 총괄 마리야 랄리치(Marija Ralic)가 한 말이다. 받아 적다가 손이 멈췄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의 비영리 앞에도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

한국 비영리는 오랫동안 필요한 곳을 찾아 자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을 잘해 왔다. 결핍이 문제의 본질이던 시대에 그 방식은 유효했고, 실제로 수많은 아이들의 삶을 바꿔 왔다. 그런데 아이들이 마주한 문제의 성격이 달라졌다. 결식과 결핍의 자리에 돌봄 공백과 마음건강, 디지털 환경이 들어섰다. 이런 문제는 지원의 양만으로 풀기 어렵다. 아이 한 명에게 정확히 닿는 일에 더해, 그 아이가 놓인 구조까지 함께 바꾸는 새로운 근육이 필요해진 것이다.

기부자와 기업의 질문도 달라졌다. 이제는 얼마를 어디에 썼느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래서 아이의 삶에서 무엇이 달라졌느냐를 묻는다. 질문이 진화한 만큼 답하는 방식도 함께 진화해야 할 때가 왔다.

◇ 위험은 생각보다 과대평가돼 있었다

델리에서 만난 아시아의 재단들은 우리가 아직 써 보지 않은 방법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그 방법들을 관통하는 말이 ‘촉매 자본(catalytic capital)’이었다. 가치가 검증되기 전의 위험을 먼저 떠안아 뒤따르는 민간 자본의 물꼬를 트는 돈이다. 테마섹재단(Temasek Foundation)의 응분헝(Ng Boon Heong) 대표는 재단의 자선자금을 아예 ‘리스크 자본’이라고 부른다.

이 원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것은 콘퍼런스에서 소개된 마스터카드 포용성장센터(Mastercard Center for Inclusive Growth)의 사례였다. 이들은 인도에서 개발금융기관·현지 은행과 함께 여성 사업자를 위한 신용보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부실이 발생하면 자신들이 먼저 손실을 떠안겠다고 약속하자 은행이 대출 문을 열었고, 마련해 둔 대출 재원은 18개월 만에 동이 났다. 담당자의 설명에 따르면 약 8000명의 여성 사업자가 대출을 받았고, 상당수에게는 생애 첫 대출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대출금을 갚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손실을 메워 주기로 했던 보증은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그는 이 대목이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고 했다. 은행이 이 시장을 피해 온 것은 떼일 위험이 커서가 아니라,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위험을 대신 지겠다고 나서자 은행은 그제야 이 시장을 들여다봤고, 그곳에는 꼬박꼬박 돈을 갚는 성실한 고객들이 있었다.

위험이 과대평가돼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과대평가를 걷어내는 데 필요했던 것은 큰돈이 아니라, 먼저 위험을 지겠다는 약속 한 줄이었다.

◇ 우리는 같은 코끼리 앞에 서 있었다

랄리치와 같은 세션에 참석한 인도 바르티 에어텔 재단(Bharti Airtel Foundation)의 누리야 안사리(Nuriya Ansari) 대표는 이 상황을 코끼리 만지기에 비유했다. 모두가 같은 코끼리 앞에 서 있는데, 저마다 다른 부분을 만지면서 그것이 문제의 전부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 비유는 초록우산이 스스로에게 던져 온 질문이기도 했다. 재단은 오랫동안 잘해 온 지원에 더해, 아이가 놓인 문제의 구조까지 해결하는 조직으로 나아가겠다고 방향을 정했다. 그 첫 관문이 임팩트투자, 즉 공익목적투자였다.

지난 8월 사회복지법인으로는 처음으로 공익목적투자를 목적사업에 명시하는 정관변경 인가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전례가 없다”였다. 전례가 없다는 말은 물어볼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가 내딛는 걸음이 곧 길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회복지법인이라는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새로운 시야로 사업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보여 주는 걸음이었다.

그 신발끈을 묶고 나서야 비로소 같은 질문을 안고 이 자리에 먼저 서 있던 이들이 누구인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델리에서 만난 동행들

세이브더칠드런 국제 네트워크는 임팩트투자를 위해 글로벌 차원의 투자 법인을 별도로 두고 있다. 이 기구가 품어 온 문제의식도 우리와 같았다. 기존의 지원 방식이 여전히 유효한 영역이 있는가 하면, 그것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영역도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는 이미 21세기의 방식으로, 사업 모델을 통해 사회문제를 풀어 가는 조직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보조금이 해 온 역할에 더해 성장의 시간을 견뎌 줄 자본이 필요하다. 이 투자 법인은 그 자본을 공급하는 쪽에 서기로 했다.

현재 조성 중인 아시아 아동을 위한 헬스케어 펀드도 앞서 본 것과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담당자는 이 일을 “우리가 먼저 위험을 질 테니 다음 위험을 져 주시겠느냐고 묻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펀드의 문은 우리에게도 열려 있었다.

◇ 자본은 3%뿐이다

그렇다고 자본이 만능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경고는 그 반대였다. 인도의 비영리 인공지능 연구기관 와드와니 AI(Wadhwani AI)의 셰카르 시바수브라마니안(Shekar Sivasubramanian) 대표는 “AI는 해법의 3%이고 나머지 97%는 사람과 생태계”라고 했다. 기술 이야기지만 임팩트투자에 그대로 옮겨도 성립한다.

돈을 넣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어떤 문제를 풀 것인지 정의하는 눈, 투자할 조직을 알아보는 심사 기준, 투자 이후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사후 관리, 그리고 그 조직이 뿌리내릴 현장과의 연결이 나머지 97%를 채운다.

뒤집어 보면 이 말은 비영리를 향한 격려이기도 하다. 3%의 자본은 시장이 공급할 수 있지만, 97%를 이루는 사람과 생태계는 돈으로 살 수도, 하루아침에 만들 수도 없다. 아이들 곁에서 쌓아 온 현장에 대한 이해와 데이터, 지역과 맺어 온 관계와 신뢰는 비영리가 수십 년에 걸쳐 축적해 온 자산이다.

그러니 비영리가 임팩트투자에 나서는 것은 낯선 시장에 뒤늦게 들어서는 일이 아니라, 이미 가진 97% 위에 3%를 얹는 일에 가깝다.

더 어려운 것은 그다음이다. 임팩트를 측정하는 단계에서 그 결과를 토대로 의사결정을 바꾸는 단계로 넘어가는 일이다. 일본의 임팩트 측정 지원기관과 마주 앉아 보니 이 고비는 아시아 어디에서나 비슷했다. 측정하는 기관은 늘었지만, 측정 결과를 자원 배분의 근거로 활용하는 구조를 갖춘 곳은 아직 드물다는 것이다.

측정이 보고의 언어에 머무는 한 자본은 관성대로 흐른다. 측정 결과가 다음 의사결정을 바꿀 때 비로소 3%의 돈이 97%의 생태계를 움직이는 지렛대가 된다. 자본을 다루는 역량과 근거를 다루는 역량이 함께 자라야 하는 이유다.

◇ 신발끈은 묶었고, 혼자 갈 수 없다

자선의 역설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틀렸다는 선고가 아니다. 문제가 진화한 만큼 시야를 넓히고 도구를 더할 때가 됐다는 신호다.

현장에서 쌓아 온 아동에 대한 이해와 데이터, 오랜 시간 후원자들이 보내 준 신뢰는 21세기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제 그 위에 새로운 방법을 더해 자산의 쓰임을 넓히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재단은 방향을 정했고, 법적 근거를 만들었고, 팀을 꾸렸다. 신발끈은 다 묶었다는 뜻이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아이들이 마주한 문제는 재단 하나의 크기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델리에서 확인한 것도 결국 그것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행이다.

오는 9월 21일과 22일 코엑스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사회적가치 페스타에서 초록우산은 ‘초록우산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토론 세션을 연다. 그동안 해 온 고민과 지금 바꾸고 있는 것, 앞으로 가려는 길을 있는 그대로 꺼내 놓을 생각이다. 자랑할 성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같은 질문을 안고 있는 이들과 답을 나눠 갖고 싶어서다.

물어볼 곳이 없어 답답했던 경험은 우리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답이 아니라, 서로가 보고 있는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보여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질문을 이제는 이렇게 바꿔 물으려 한다.

우리는 21세기의 질문에, 21세기의 방식으로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김예지 초록우산 임팩트사업본부 임팩트허브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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