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nter is coming.”(겨울이 오고 있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첫 에피소드의 제목이자 밈으로 널리 퍼진 대사다. 어렵고 힘든 날이 다가온다는 경고이자, 대비하라는 메시지다.
국제보건, 더 넓게는 국제개발원조의 영역에도 겨울이 닥쳤다. 미국의 해외원조 삭감에서 시작된 듯 보이지만, 그 전부터 징후는 곳곳에 나타나고 있었다. 원조에 대한 회의론이 커졌고, 과연 효율적이고 임팩트가 있는지 묻는 질문이 늘어났다.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결국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충분히 설득력을 발휘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국제기구들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효율을 입증하려 애써왔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지난 2년간 몸담았던 기구의 사례를 중심으로, 국제기구들이 어떻게 혁신하며 원조의 효과성을 높여왔는지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 180만원 백신을 3만원으로 낮춘 비밀
2000년대 이전까지 백신은 사실상 선진국의 전유물이었다. 중저소득 국가는 협상력을 잃은 채 비싼 가격에 소량만 구매하거나 선진국 기부에 의존해야 했다. 이런 시장 실패 속에서 2000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빌 게이츠 등이 아이디어를 냈다. “중저소득국의 백신 수요를 묶어 제약사와 협상하면 가격을 낮출 수 있지 않을까?” 백신 펀드를 조성해 공동구매로 가격을 낮추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2000년,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이 출범했다.
효과는 막대했다. 미국 공공시장에서 약 180만원이던 아동 필수 백신을 Gavi는 단 3만원에 공급받았다. 원리는 간단했다. 제약사에 대량·장기 공급을 약속해 신뢰를 주고, 공동구매로 가격을 낮춘 것이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제약사들도 Gavi가 매년 대량의 백신을 구매해 실제로 공급하는 것을 보며 합류했다. 2000년대 초반 5곳이던 공급사가 지금은 19곳으로 늘었다. 그 결과 지난 25년간 12억 명의 아이가 백신을 맞았고, 1900만 명의 생명이 구해졌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생명을 살리려 했던 혁신의 성과다.
◇ 자본과 기술, 혁신의 길을 뚫다
둘째는 파이낸스의 혁신이다. Gavi는 2006년 국제기구 최초로 ‘백신채권’을 발행했다. 매년 공여금을 받아 쓰던 기존 방식을 벗어나, 공여국의 10~20년 장기 지원 약속을 담보로, 금융시장에서 AAA 신용도를 바탕으로 자금을 조달한 것이다. 처음엔 회의적 시선을 받았지만, 투자자들은 안정적인 수익과 사회적 임팩트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백신채권을 선택했다.
그 결과 지난 20년간 Gavi는 백신채권으로 100억 달러 이상을 조달했다. 지금도 전체 재원의 20%가 금융시장에서 나온다. 안정적인 자금 덕에 필요한 국가에 더 빨리 백신을 공급할 수 있었고, 제약사에 선주문할 여력도 생겼다. 연구개발과 상품화 과정에 안정성을 불어넣은 것이다. Gavi가 전 세계 아동 백신의 절반을 구매하며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자, 제약사들도 구매력을 믿고 중저소득국 맞춤형 백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폐렴구균·콜레라·자궁경부암 백신이 한때는 비싸서 접근조차 어려웠지만, 이제는 중저소득국을 위한 공급 라인이 만들어졌다. 시장을 움직이기 위해 시장의 자본을 활용한 혁신이었다.
셋째는 배달의 혁신이다. 백신은 개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강과 산 너머 시골 아이들에게 도달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지금도 보건소 직원들이 백신 캐리어를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다. 이 모든 과정이 곧 비용이며 효율의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Gavi는 다양한 파트너와 손잡았다. 드론으로 먼 거리를 신속히 배송하고, 아이들의 지문을 읽어 접종 이력을 디지털로 기록했다. 백신 보관을 원격으로 모니터링하는 기술도 도입됐다. 글로벌 기업과 협업해 이런 솔루션을 개발·투자하면서 비용을 낮추고 혁신 속도를 높였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기술은 ‘마이크로니들 패치’다. 한국이 선도하는 이 기술은 주사기 없는 미래를 보여준다. 붙이는 패치만으로 접종이 가능해 의료 인력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냉장 보관이 필요 없어 비용과 탄소 배출을 줄이고, 주사기 폐기물 문제도 사라진다. 무엇보다 주사에 대한 불편이 줄어 더 많은 아이들에게 편리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이 이 기술의 선두주자인 이유는 피부미용 기술과 반도체 정밀가공 기술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두 산업이 만나 생명을 살리는 혁신의 도구가 된 셈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원조는 정말 낭비되는가? 효율도, 임팩트도 없는 비즈니스인가? 세 가지 사례가 모든 질문에 답이 될 수는 없다. 한 기구의 시도만으로 전체를 대변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혁신이 효율과 임팩트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국제개발과 국제보건에 여전히 희망을 걸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겨울을 지나며 더 강해지고 효율적으로 변해, 다시 봄이 올 때 그 성과를 모두가 반갑게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축소된 원조의 현장에도 봄은 다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Spring is coming.
김형준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선임 매니저
필자 소개 미국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국제기구 유니세프에서 약 10년간 근무하며 네팔, 가나, 말레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개발도상국 아동과 청소년의 건강한 삶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동시에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에서 선임 매니저로 일하며 백신으로 저개발국의 아동들을 살리는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보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일하며 질병 예방으로 사람을 살리는 다양한 방법을 경험했고, 이를 많은 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