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조원 기부 후 재단 해산 선언
보건·빈곤·교육·에너지에 집중…“부자로 죽는 건 수치”
“부자로 죽는 자는 수치스럽게 죽는 것이다.”
빌 게이츠(70)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가 8일(현지시각) 공개한 기고문에서 인용한 구절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1889년 발표한 ‘부의 복음(Gospel of Wealth)’에 담긴 말이다. 게이츠는 이날 “내 자산의 99%를 생명을 구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쓰겠다”며 “2045년까지 약 2000억달러(한화 약 280조원)를 기부한 뒤 재단의 문을 닫겠다”고 밝혔다.

2000년 멜린다 프렌치와 함께 설립한 ‘빌앤드멜린다 게이츠재단’은 이미 지난 25년간 1000억달러(한화 약 140조원) 이상을 기부해왔다. 하지만 그는 “이제 절반은 끝났을 뿐”이라며 “남은 20년간 그 두 배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다. 당초 게이츠는 본인의 사망 20년 후에 재단을 해산할 예정이었지만, 2045년 12월 31일 재단 활동을 마무리하겠다고 발표했다.
◇ 예방 가능한 죽음을 막는 일…“보건은 시작이자 핵심”
게이츠는 이날도 재단의 중심 목표로 ‘보건’을 강조했다. 그는 “건강 불평등은 재단이 존재하는 이유”라며 “지금까지 지출한 기금 중 절반이 보건 분야에 집중됐다”고 밝혔다.
대표적 성과로는 세계백신면역연합(GAVI)과 글로벌펀드 설립을 지원한 점을 꼽았다. 가비는 2000년 창립 이후 24년간 11억 명의 아동에게 필수 백신을 제공했고, 1880만 명의 생명을 살렸다. 게이츠재단은 초기 7억5000만달러(한화 약 1조 500억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61억달러(한화 8조5400억원)를 기부했다.
글로벌펀드는 HIV/AIDS, 결핵, 말라리아 퇴치를 목표로 설립된 세계 최대 보건 기구로, 2022년까지 590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 게이츠재단은 창립 당시 1억달러(한화 약 1400억원)를 기부하며 창립 파트너로 참여했고, 현재까지 누적 기부금은 36억 2000만 달러(5조 700억원)에 이른다.
재단이 앞으로 20년간 집중할 과제도 분명하다. 첫째는 예방 가능한 원인으로 인한 임산부·아동 사망 방지. 둘째는 치명적 전염병의 완전한 퇴치다. 게이츠는 “1990년 5세 미만 아동 사망자가 1200만 명이었지만 2019년 500만 명으로 줄었다”며 “이를 다시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는 특히 “소아마비와 기니충은 천연두처럼 인류가 극복한 질병 목록에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2045년에는 말라리아와 홍역 퇴치도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핵심은 기술 혁신을 통한 비용 절감”이라며 “저소득 국가도 치료와 백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재단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 교육·농업·에너지…번영을 위한 다음 투자
빌 게이츠는 빈곤 해결의 해법으로 ‘교육’과 ‘농업’, ‘디지털 인프라’를 들었다. 미국 내 흑인과 라틴계 아동의 수학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AI 기반 교육 기술에 투자하고, 디지털 공공 인프라를 통해 금융·복지 서비스 접근성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더불어 아동 발달에 필수적인 양질의 영양 공급과 지역 식량 안보에도 기여할 수 있는 소규모 자작농 지원을 위해 종자 개발을 지속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보건, 교육, 농업, 교육 지원의 바탕에는 성평등이 있다고 짚었다. 세계 소규모 자작농의 절반은 여성이며 여성은 교육, 보건 서비스,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을 때 가장 큰 수혜자가 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시스템을 그대로 두면 여성은 종종 소외되지만, 올바르게 작동하면 여성은 가족과 공동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이츠는 에너지 접근성 문제도 주요 과제로 꼽았다.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는 생존을 넘어 번영을 위한 기본 인프라”라며 “재생에너지 기술과 원전 기술을 개발하고, 투자 수익은 모두 재단으로 되돌린다”고 밝혔다. 그가 직접 설립한 ‘브레이크스루에너지벤처스(BEV)’는 기후테크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으며,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사인 ‘테라파워’도 운영 중이다.
◇ “더 많은 부자들이 기부에 동참해야”
게이츠는 이날 발표에서 사회문제 해결의 동력을 ‘협력’에서 찾았다. “가비와 글로벌펀드는 모두 다른 재단·정부·기업·다자기구가 함께 만든 성공 사례”라며 “어떤 단체도 혼자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미국·영국·프랑스 등 각국 정부의 ODA 예산 삭감 흐름을 우려하며 “자선단체의 힘만으로는 이 공백을 메울 수 없다”고 경고했다.
파이낸셜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는 미국 정부효율부(DOGE)를 이끄는 머스크를 저격하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들을 죽이는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부자들에게도 목소리를 높였다. “더 많은 부자들이, 더 빠르게 기부해야 한다”고 했다. 2010년 그는 워런 버핏,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기부클럽인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를 창설했다. 이는 억만장자들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면 가입할 수 있는 모임이다. 2024년 12월까지 전 세계 억만장자 244명이 참여했으며, 한국에서는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과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2021년 이름을 올렸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