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원조 끊기자 시간당 100명 사망…멈춰버린 백신과 식량 [글로벌 ODA 위기 리포트]

트럼프發 원조 축소, 세계 보건·식량망 붕괴
공백 속 한국의 책무는 남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조에 따라 미국국제개발처(USAID) 해체와 세계보건기구(WHO) 탈퇴를 공식화하면서, 미국이 주도해온 글로벌 보건 체계에 심각한 균열이 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모든 해외 개발원조 사업을 90일간 중단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하고, 7월 1일부로 USAID를 국무부 산하로 이관해 사실상 해체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기준 660억 달러(약 90조원) 규모였던 USAID 예산은 2025년까지 60억 달러(약 8조원)로 줄어들 예정이며, 조직 인력도 기존 1만여 명에서 300명 수준으로 대폭 감축된다.

문제는 그 여파다. 미국은 국제 보건개발 분야 최대 기여국이다. 보건 전문 비영리기관 카이저패밀리재단(KFF)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 세계 보건개발원조의 42%를 미국이 담당했다. PEPFAR(에이즈구호비상계획), 글로벌펀드, 말라리아 이니셔티브 등은 미국의 지원을 기반으로 운영돼왔다. USAID 활동은 2000년 이후 5800만 명의 결핵 사망과 2500만 명의 에이즈 사망, 1100만 명의 말라리아 사망을 막았다는 평가도 있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USAID의 기능 축소로 인한 사망자가 없다고 발언했지만, 브룩 니콜스 교수는 지금까지 원조 삭감으로 시간 당 103명이 초과로 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AP, 연합뉴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USAID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지만, 전문가들은 그 발언과 무관하게 피해는 현실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브룩 니콜스 브라운대 보건학 교수는 원조 삭감의 영향을 분석한 결과 “시간당 103명, 하루 2472명이 초과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HIV/AIDS, 결핵, 말라리아에 집중된 피해자 수는 6월 15일 기준 성인 11만733명, 아동 23만1059명에 달한다. 실제로 HIV 감염률이 높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미국의 원조 중단 이후 지난 3~4월에 HIV 검사 수가 최대 21%까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 백신·영양·식량까지 타격…“영양실조, 질병 악순환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삭감 명령 이후, 미국의 대규모 식량지원도 중단됐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보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지부티, 휴스턴 등 미국 내외 창고에 6만6000톤의 식량이 방치돼 있으며 일부는 오는 7월 유통기한 만료로 폐기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 물량은 3500만 명에게 제공할 수 있는 분량이다.

국경없는의사회(MSF) 나이지리아 북서부 구호 코디네이터 니콜라스 몰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급성 영양실조 아동은 홍역, 콜레라, 말라리아에 더 취약하다”며 “이미 2024년부터 자금 부족이 심각했는데, 2025년 들어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MSF는 이를 “영양실조와 감염병의 악순환”이라고 표현했다.

이훈상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 이사는 “미국이 Gavi(세계백신면역연합)에만 지난해 3억 달러(약 4000억원)를 지원했지만, 앞으로 5년간 이 같은 공백으로 인해 7500만 명 아동의 예방접종이 중단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예방접종률 하락은 홍역, 폐렴, 설사병 등 백신으로 예방 가능한 질병의 재확산으로 이어지며, 교육과 경제까지 파급 효과를 낳는다는 설명이다.

◇ 주요 선진국, 원조 줄줄이 삭감…한국의 책무와 기회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국은 2023년 대비 39% 원조를 삭감했고, 오는 2027년까지 국민총소득(GNI) 대비 원조 비율을 0.3%까지 낮추겠다고 밝혔다. 독일은 27%, 캐나다 25%, 프랑스 19% 삭감을 단행했으며, 미국의 감축률은 2년 전보다 56%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USAID의 해체로 즉각적인 질병 치료부터 백신 접종, 의료 인프라 구축 등 세계 보건 시스템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로이터통신, 연합뉴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의 ‘역할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훈상 이사는 “한국이 미국의 빈자리를 모두 채우기는 어렵지만, 기존 보건 ODA 수준을 유지하거나 소폭 증액하는 것만으로도 국제사회에 큰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며 “글로벌펀드, Gavi, 감염병혁신연합(CEPI) 등 다자기구와 협력하고 정책 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면 ‘신뢰받는 중견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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