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9일(수)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잔반통을 확인하는 정부가 좋은 정부다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외식 경영 전문가 백종원은 식당을 잘 경영하기 위해서는 잔반통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고객이 주문한 음식을 남겼는데, 식당 사장이 왜 남겼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고객이 주문한 내용 중에서 어떤 부분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이 고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면 재방문을 이끌기도 어렵다. 백종원은 이런 평소 신념에 따라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흑백요리사>에서도 어김없이 잔반통을 확인했다.

잔반통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는 통계로 설명할 수 있다. 에이브러햄 월드는 20세기 초중반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했던 통계학자다. 그는 ‘데이터 과학’이라는 말이 존재하기도 전에 데이터로 현실의 문제를 풀어냈던 데이터 과학의 선구자다. 월드가 풀었던 대표적 문제 중 하나는 2차대전 당시 미국 정부를 도와 전투기, 폭격기의 생존율을 높인 것이다. 전투기, 폭격기는 전투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무기다. 그러나 전투기와 폭격기 제조, 그리고 조종사와 같은 관련 인력 육성과 훈련 모두 높은 비용이 든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전투기와 폭격기의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데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비행기는 날개와 꼬리에 총격을 받은 경우가 잦았다. 이 제한된 표본을 보고 기체의 어느 부분을 더 견고하게 해야 전투기와 폭격기의 생존율을 높여진다고 묻는다면 보통 날개와 꼬리를 보강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사고가 단순하지만,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월드는 달랐다. 그의 사고는 깊었다. 그는 잔반통을 생각했다. 살아 돌아온 비행기뿐 아니라 격추당한 비행기를 생각했다. 그리고 격추당한 비행기들이 총격을 받았을 위치를 생각했다. 격추당한 비행기는 몸통에, 특별히 엔진에 총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엔진이 총격을 받으면 그 기체는 살아남지 못했으니까.

우리는 대개 월드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이처럼 살아 돌아온 비행기만 가지고 주어진 문제의 원인을 찾는 사고를 ‘생존 편향’이라 부른다.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도 그 본질은 서비스다. 정부도 마땅히 잔반통을 확인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러지 않는다. 이 서비스를 누가 제공하는지 생각해 보자. 국민은 의회가 하는 일 없이 자기들끼리 싸움만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의회는 어쨌든 적어도 선거철에는 국민 눈치를 본다. 선출된 대표들이 이때도 국민을 무시한다면 유권자는 이들을 다른 후보자로 교체한다.

관료는 다르다. 관료는 국민이 불만을 좀 품는다고 해서 그 자리를 잃지 않는다. 행정부가 눈치를 보는 곳은 의회다. 의회가 예산을 주고 감사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공공 서비스의 집행 방식은 국민의 불편을 따지지 않는다. 관료들은 그보다 의회에 꼬투리를 잡힐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규정에 집착한다. 서비스는 차순위이다 보니 공공 서비스도 서비스이지만 시민 고객에게 불편한 서비스가 너무나 많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예가 공문서다. 행정학자 폴 라이트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미국 연방 법령은 줄어든 적은 없고 늘어나기만 했다. 이건 작은 정부를 표방했던 레이건 정부 때도 마찬가지다. 규정이 늘어나고 까다로워질수록 시민들이 공공 서비스 이용을 위해 작성해야 하는 공문서도 늘어나고 복잡해진다. 결국 공공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신청서 작성에 쏟아부어야 하는 시간과 노력도 늘어난다.

일례로, 미국 정부가 저소득층에게 제공하는 대표적 복지 서비스인 ‘푸드 스탬프(식량 보조 프로그램)’는 신청서 작성에 평균 한 시간이 걸린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이 가난하다는 걸 입증하는 서류를 작성하는 데만 한 시간을 써야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민원인만 힘든 것이 아니다. 담당자들도 고통받는다. 결국 작성된 신청서는 일선 공무원들의 적격 심사를 거쳐야 한다. 공문서가 늘어나고 복잡해지면 일선 공무원들의 업무량이 늘어난다. 접수된 신청서가 처리되지 못하고 기다리는 대기 상태가 발생한다. 행정 시스템의 혈액 순환이 마비된다.

미국 정부는 202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잔반통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정부의 공공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시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이유를 규정중심주의에서 찾았다. 그래서 공공 서비스의 초점을 규정 준수에서 시민 고객의 불편 해소로 옮겼다.

현재 미국 정부의 데이터 기반 정책을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증거’와 ‘경험’이다. 2018년 ‘증거기반 정책수립법’이 통과되어 연방정부부터 지방정부까지 미국은 내부에 데이터 과학자를 채용해 자기 부처의 데이터를 활용해 정책을 분석하고 평가한다. 정책결정자의 감이 아니라 증거에 기반을 두고 정책을 수립한다. 미국의 조달국(GSA) 산하에는 ‘평가과학청(OES)’이란 연방정부의 임팩트 평가 전문 컨설팅 기관이 있다.

2022년에는 잔반통 확인이 국정 기조가 됐다. 백악관 내의 ‘정보규제사무국(OIRA)’은 시민이 공공 서비스에 접근하는 데 겪는 불편을 체계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하여, 실제로 이 불편을 줄이도록 권고한다. 매해 관련 보고서가 나온다. 2023년, 바이든 행정부는 연방 정부의 시민 고객 서비스의 ‘경험’을 개선할 것을 선포했다. 이 정부 서비스의 불편 측정 및 해소 프로젝트는 정부, 학계,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협력 사업이다. 필자도 미국의 캘리포니아, 뉴욕, 콜로라도 주정부 등과 함께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주문대로 음식이 나오는지 확인하듯, 규정대로 공공 서비스가 제공되는지만 확인하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격추된 비행기를 놓치고, 시민 고객의 소리 없는 불편을 놓친다. 이런 경험이 눈처럼 쌓이면 공공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신뢰가 떨어진다. 한 번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인공지능 강국 같은 구호에 비해 ‘잔반통 확인하기’는 섹시하지 않다. 그러나 잔반통을 확인하지 않고서 시민 고객의 만족을 높이기는 어렵다. 시민이 만족하지 않는 공공 서비스는 좋은 공공 서비스가 아니다. 잔반통을 확인하는 정부가 좋은 정부다.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필자 소개

학계와 실무를 모두 경험한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입니다. 존스홉킨스 SNF 아고라 연구소의 연구교수이며 하버드 케네디 스쿨 공공 리더십 센터의 연구위원입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의 데이터 과학자로 미국 정부와 협력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고, 빠르고,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리도록 돕는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KDI 정책대학원에서 데이터 과학 담당 교수로 일했고, 공익 목적의 데이터 과학을 소개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세종서적 2023)’란 책을 썼습니다. UC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미국 정치학회(APSA)로부터 도시, 지역 정치 부문 최우수 박사학위상(2022), 시민참여 부문 신진학자상(2024)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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