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격차 지수 156개국 중 102위(세계경제포럼, 2021년). 유리천장 지수 OECD 회원국 중 10년 연속 꼴찌(영국 이코노미스트, 2022년). 여성 이사 비율 72개국 중 69위(딜로이트 글로벌, 2022년). 한국의 성평등 성적표다.
우리나라는 1987년에 남녀고용평등법을 제정했다. 경력단절 여성의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법도 2008년 제정됐다. 올해부터는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인 주권상장법인의 경우 여성 이사를 1명 이상 선임해야 한다. 법과 제도가 적지 않음에도 기업의 성차별은 왜 시정되지 않을까? 물론 실효성이 낮은 법과 제도도 문제다. 그러나 법과 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시장과 공급망, 투자자의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ESG가 한국 기업의 성차별을 해소하는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일본 공적연금(GPIF)은 2017년부터 ‘여성 지수(Empowering Women Index)’를 도입했다. 신규 채용 비율, 근속연수, 관리자 비율 등에서 성 다양성이 높은 기업에 투자한다. 블랙록, SSGA 등 글로벌 투자회사들도 ‘젠더 관점 투자(Gender Lens Investing)’를 한다. 투자자들은 투자한 기업에 여성 다양성을 높일 것을 요구하고, 여성 이사가 부족한 기업의 남성 이사 선임에 반대투표를 던지기도 한다.
여성 이사를 한 명 선임하는 것은 쉽지만, 여성 관리자 비율을 높이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투자자들이 여성 지수를 만들어 투자하는 것은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몇 년 전 국민연금도 젠더 관점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거래소가 여성 지수를 개발하고 있고, 젠더 관점 투자를 시도하는 회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스타트업 투자사인 소풍벤처스는 2018년부터 젠더 관점 투자를 하고 있고, 2021년 기준 젠더 관점 투자 비중은 약 35%다. 소풍벤처스는 ‘젠더 안경을 쓰고 본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이라는 리포트도 발간했다.
ESG 평가와 공시에도 젠더 이슈가 포함돼 있다. 한국거래소의 ‘ESG 정보공개 가이던스’에는 성별 임직원 현황, 차별 관련 제재 건수 및 조치내용, 육아휴직 사용 임직원 현황이 들어가 있다. 세계 증권거래소의 ESG 지표는 전체 직원뿐 아니라 신입·중간관리자·고위직 성 비율로 세분하고 있다. EU의 ‘비재무 정보 공시 가이드라인’에는 육아휴직 근로자의 성별 비율, 임시직의 성 비율, 성별에 따른 교육훈련 시간 등이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보다 지표가 구체적이고 성차별의 핵심에 다가가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iversity, Equity & Inclusion, DE&I)과 ‘인권’의 맥락에서 젠더 이슈를 중시하고 있다. 다양성을 경쟁력의 원천으로 보고 다양성 전략과 목표를 수립해 추진한다. 인권실사(Human Rights Due Diligence) 프로그램에 성차별을 포함한다. 3M코리아는 여성 고용 비율 50%를 목표로 삼고 있고, 로레알은 2016년에 관리직 여성 40% 할당제를 도입했다. 씨티그룹은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해 2018년부터 임금 조정을 실시했다. 포드는 ‘재진입 프로그램’을 마련해 2년 이상 경력이 단절된 사람들을 위한 직무교육, 채용, 멘토링 등을 추진한다. GAP은 공급망과 지역사회 관계에서도 성평등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에는 2020년 기준 17개국 80만명의 여성이 참여했다. 공급망에도 여성 다양성을 요구하고 지원하는 흐름은 가속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글로벌 기업 중에는 법률업무를 위임할 때 로펌의 입찰 제안서에 남녀 변호사를 모두 포함하는 팀을 구성하도록 하고, 로펌 구성원의 성비를 적을 것을 요구한다.
다양성은 형평성과 포용성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여성이 육아를 전담하고, 임신·출산으로 일한 불이익이 계속되는 것은 차별이다. 탄력적 근로, 재택 근로를 포함하여 임신·출산한 여성을 위한 근무 및 휴가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포용적 문화 없이 다양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3M코리아에는 ‘옹호자인 남성들’(Men as advocates)이라는 모임이 있다. 남성 직원들이 성평등 문화를 확산하고 옹호하기 위한 인식개선과 활동을 한다. 남성이 바뀌어야 성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정의 관념 때문에 성평등을 강조하고 여성 다양성을 투자기준으로 삼고 있을까? 아니다. 다양성이 있는 기업이 더 경쟁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맥킨지는 임원의 성별 다양성이 높은 상위 25% 기업이 하위 25% 기업보다 순이익이 21% 높다고 분석했다. 한국은 낮은 출산율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절박한 현실이다.
CJ그룹은 지난해 기준 임원 여성 비율 14.8%, 관리직 여성 비율 30.9%, 전체 여성 비율 51.1%로 다른 기업보다 3배가량 높다. 포스코는 ‘경력단절 없는 육아기 재택근무제’를 도입해 자녀 수에 따라 최대 6년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롯데는 2017년부터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 제도를 도입했다. KB금융은 ‘WE STAR’라는 여성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ESG가 성차별을 해소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