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한수정의 커피 한 잔] 해방,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8월 23일은 ‘세계 노예무역 및 철폐 기억의 날’이다. 역사 속에서 인류가 부의 축적을 이루는 가운데 노예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로마 콜로세움을 열광의 도가니로 이끈 검투사들도 노예였으며, 일본의 도예 문화를 꽃피운 조선의 장인들도 노예였다. 남미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세계 곳곳에 공급한 것도 노예다.

이 중에서도 16세기부터 시작된 삼각무역에 동원된 흑인 노예들은 그 이전의 노예들과 매우 다르다. 검투사는 승리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장인은 그 재주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이 고안한 노예무역은 ‘흑인은 인간이 아닌 존재’로 개념화했다. 그래야만 노예선에 높이 30cm로 다섯 단을 쌓아 사람을 짐짝처럼 차곡차곡 눕혀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이런 상태로 운반되는 노예가 질병이나 영양실조로 상품가치가 떨어진다면, 바다에 밀어 넣어 수장을 시키고 보험금을 받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 된다.

영화 ‘벨(BELLE)’은 1781년 9월 자메이카를 떠난 노예선 ‘종(ZONG)’호에서 3일간 133명의 병든 노예를 바다에 수장시킨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보험금을 노린 사건이다. 종호는 영국에 도착해 보험금을 청구하나, 보험사는 거절했고 긴 재판이 이어졌다. 결과는 패소했고 이 일은 영국사회에 노예무역의 잔혹성이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초기 노예무역 반대론자들의 캠페인은 어쩌면 요즘 공정무역 캠페이너들의 활동과 비슷하다. 영국의 지식인들은 식민지에서 생산한 설탕 불매운동(boycott)을 벌이면서 ‘노예의 피로 만든 달콤함을 거부한다’며 인도산 설탕을 대안(buycott)으로 소비하기도 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주장이 담긴 신문이 돌고, 카페에서는 그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다. 그 카페의 커피는 공정무역이 아니었을 테니 노예의 피로 만든 음료를 마시며 노예 해방을 주장해야 하는 유럽 지식인들의 내면적 갈등도 상당했을 것 같다.

그런데 노예의 해방은 이러한 캠페인과 윤리적인 자발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3세기 동안 5천만명으로 추정되는 아프리카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희생시킨 결과, 영국과 유럽은 농업을 부흥시켜 산업혁명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이제 방적기와 증기기관차 등 당대 최고의 기술을 다루기 위해서는 농업이나 가사노동 등 육체노동에 특화된 흑인 노예보다는 말귀를 알아듣는 백인 임금노동자가 더 필요해진 것이다.

백인 임금노동자 중에도 임금이 가장 싼 어린이들이 희생될 차례였다. 이 시대 어린이 노동을 배경으로 한 동화가 1845년 출간된 ‘성냥팔이 소녀’ 다. 사실 괴담이라 할 정도로 현실일까 의구심이 들지만, 산업혁명으로 영국인의 소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대 뒷골목에서 비일비재 일어났던 일이다. 당시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어린이들은 유독성 증기에 노출되어 얼굴이 일그러지고 신체가 마비되어 일할 수 없게 되면 공장에서 쫓겨난다. 이때 공장 측이 퇴직금으로 준 것이 성냥이었고, 아이들은 이 성냥을 팔면서 거리에서 연명하게 된다. 성냥팔이 소녀가 죽어가면서도 성냥의 온기조차 마음껏 누리지 못한 것은 그것을 팔아 돈을 벌지 못하면 자신의 내일은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 유럽의 노예무역은 점차 폐지됐다. 미국도 동북부 신흥 공업지대 인력조달을 위해 남부의 노예를 임노동자로 유입시키기 위해 해방전쟁을 벌인다. 어린이들의 노동제공이 법으로 금지된 것도 점점 체계화돼 산업사회의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문해와 수리를 배울 수 있는 학교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훗날의 역사가들은 노예제의 폐지나 아동노동 금지 등을 자유, 평등, 인권 등의 가치를 내세운 자발적 시민혁명으로 포장하며 산업구조에 얽힌 인간 욕망은 가리고 싶어한다.

세계적인 석학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한다.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노예제도는 어쩌면 그 시대 삶의 성공 방식이었고, 그 성공의 DNA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개발도상국 농민들은 배우지 못한 불쌍한 존재이고 이것을 개선하지 못하는 개도국 정부는 부패했다는 논리다. 주인이 있는 노예에서, 주인은 없지만 노예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에게, 그리고 포스터 모더니즘 사회에서 스스로가 노동의 주인이면서 노예로 만든 피로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이 논리는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역사는 배웠지만 과거와 헤어질 결심이 서지 않았다.

앞으로 인간이 역사를 배워 진정 과거로부터 해방되고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낼 시간이 허락될까? 블랙스완쯤 되는 코로나가 그런 전환의 계기라도 제공하길 바랐지만, 사상 최대 무역적자에 집값은 떨어지고, 환율 폭등으로 온 나라에 난리가 나면서 우리의 미래는 다시 한번 부유한다. 답답한 마음에 다 지나간 노예제 폐지기념일 놓고, 한가한 소리 한다고 지청구 듣기 딱 좋은 글을 썼다.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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