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8일(수)
“아름다운 미래는 끝났다… 웰컴 투 디스토피아!”
“아름다운 미래는 끝났다… 웰컴 투 디스토피아!”
Share on facebook
Share on twitter
Share on print

[Cover Story] ‘디스토피아 빌런’으로 돌아온 정경선 HGI 의장

정경선(34)은 전기면도기를 못 찾아서 수염을 깎지 못했다고 했다. 까칠하게 자란 수염 때문인지 인상이 좀 변한 것 같았다. 예전과 느낌이 좀 달라진 것 같다고 했더니 “가르마를 바꿔서 그런가” 하며 웃었다. “한쪽으로만 가르마를 타면 탈모가 올 수도 있다고 해서 얼마 전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르마를 바꿨다”며 딴소리를 늘어놓는다.

현대가(家)의 일원인 정경선은 그간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선하고 스마트한 재벌 3세’ 이미지로 그려졌다. 지난 2012년 비영리단체인 ‘루트임팩트’를 만들 때부터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14년에는 임팩트투자사 ‘HGI’를 설립해 사회와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소셜벤처들에 투자하고 있다. 서울 성수동에 2017년 오픈한 혁신가들의 공간 ‘헤이그라운드’도 그의 작품이다. 지상 8층 지하 1층 규모의 건물에는 60곳이 넘는 소셜벤처가 입주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런 선한 이미지가 이제 지겨워진 걸까. 지난달 21일 헤이그라운드에서 만난 정경선은 작심한 사람처럼 ‘센’ 이야기를 쏟아냈다. “8년 전 루트임팩트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세상에 수많은 사회문제가 존재하지만 우리 모두가 ‘체인지메이커’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언젠가 모든 게 해결되는 날이 오리라 믿었어요. 참 순진했죠.”

가르마만 바뀐 게 아니었다. 정경선이 딴사람이 돼서 돌아왔다. 체인지메이커들이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 입으로 암흑의 시대 ‘디스토피아(dystopia)’를 선언했다. “네, 맞아요. 세상은 망했어요. 성장과 번영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암울한 시나리오가 펼쳐질 거예요. 웰컴 투 디스토피아!”

정경선 HGI 의장은 자신을 ‘기업가’보다는 ‘스토리텔러’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와 환경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임팩트 투자(Impact Investing)’에 관해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설득해왔던 그가 이번에는 새로운 이슈를 던지고 있다. 기후변화에 따른 디스토피아(dystopia)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주민욱 C영상미디어 기자

디스토피아 빌런

―충격 받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갑자기 세계관이 뒤집힌 이유가 뭔가요.

“인류에게 남은 시간과 자원이 얼마 없다는 걸 깨달은 거죠. 이미 우리의 일상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기록적 폭우와 태풍, 역대 최대 규모 산불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코로나19는 봉쇄와 단절, 혐오와 갈등을 불러오고 있어요. 야외 활동 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 됐죠.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생각할 단계를 넘어섰어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상황이에요.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세상. 그게 디스토피아죠.”

―기, 승, 전, 디스토피아. 완전히 꽂혔군요.

“god 출신 박준형씨가 모든 가격을 국밥으로 환산해서 말한다고 해서 ‘국밥 빌런(villan· 무언가에 집착하는 사람)’ 소리를 들은 적이 있잖아요. 전 요즘 무슨 이야기를 해도 모든 게 디스토피아로 결론이 나요. 이왕 이런 거 ‘디스토피아 빌런’ 콘셉트로 밀어붙일 생각이에요.”

―언제부터 이렇게 삐뚤어진 건지.

“2017년 미국 유학이 기점이 됐어요.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는데 워런 버핏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죠. ‘투자’에 대한 수업을 듣는데 계속 나오는 게 기후변화 이야기였어요.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NGO나 환경단체 활동가가 아니라 이른바 ‘금융 빠꼼이’라는 사람들이라는 게 더 놀라웠고요. 모든 걸 숫자로 계산하는 세상에서 가장 냉혹한 자본가들이 기후변화 때문에 패닉에 빠져 있었어요. 미국에서는 이미 산불이나 해안 침수 위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출도 안 되고 보험도 들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기후변화의 속도와 파괴력, 우리의 삶에 미치는 파장은 충격적인 수준이었어요. ‘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가 겪을 디스토피아는 어떤 모습인가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보고서에 따르면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후부터 지금까지 1도 올라갔다고 해요. 이런 속도로 기온이 올라갈 경우 2050년까지 다음 한 세대에 걸쳐 우리의 일상이 완전히 무너질 거예요. 심각한 수준의 폭염과 폭우가 수시로 들이닥치고, 농축산업이 타격을 받아 식량 공급에 문제가 생기겠죠. 영양실조, 감염병 등 공중 보건에 위기가 오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저지대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을거예요. 전 세계 주요 거점 공항들도 물에 잠기겠죠. 항공 대란이 일어날 거예요. 인천공항도 그중 하나예요.”

―’디스토피아 빌런’을 자처하며 나서는 이유가 궁금한데요.

“앞서 말했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디스토피아 빌런이라는 ‘부캐(부캐릭터)’를 앞세워서라도 공론화하고 싶어요. 그레타 툰베리가 ‘분노’로 공론화했다면, 저는 ‘수용’으로 공론화하려고요.”

―수용요?

“저뿐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가 대체로 수용을 잘하는 편이에요. 밀레니얼과 젠지(Z세대)는 알고 있어요. 사회가 마냥 성장하지 않는다는 걸요. 2000년 IT 버블, 2008년 금융 위기, 2020년 코로나를 겪으며 그걸 알게 됐죠. ‘무기력한 수용’은 우리 세대의 상징이에요. 탐탁진 않지만 이 디스토피아를 받아들이고 여기서 살아남는 가장 좋은 방법을 함께 찾자는 거죠.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지 말고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갈 수 있게 전략을 짜는 거예요. 그게 ‘최적화 전략’이죠.”

최적화

정경선은 7년째 이끌고 있는 HGI를 ‘최적화 모드’로 전환 중이다. “예전에는 임팩트에 우선순위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소셜벤처에 투자를 할 때도 각자가 내세우는 사회문제나 임팩트를 똑같이 존중하고 되도록이면 중립적인 자세를 가지려고 했죠.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디스토피아니까요. 한정된 자원이 있다면 먼저 투자해야 할 분야가 분명히 있죠.”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있다면요.

“당연히 생존에 관한 것들이죠. 대표적인 게 ‘푸드테크’ 쪽이에요. 식량 안보와 관련된 기술에 관심이 많아요. 기후변화로 농업 생산량이 떨어질 거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먹을 게 없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수라장이 될 거예요. 대체육, 배양육 등 다양한 분야를 보고 있어요.”

―투자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데이터’에 주목하고 있어요. 최근에 저희가 한국과 중국, 베트남의 의료·보건 섹터 논문 4만여 건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대기오염, 소외열대질병 등 우리 삶에 피해를 주는 요소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분석해 유의미한 데이터를 추려냈죠. 어떤 문제가 가장 시급한지, 어디가 취약한지 데이터를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정제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걸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회사나 기술에 투자하려고 해요. 그리고 하나 더. 우리가 가진 데이터와 임팩트투자 경험을 대기업에 제공할 계획이에요. 대기업들의 ‘임팩트 트랜지션(전환)’을 돕는 사업이죠.”

―대기업이 임팩트 전환을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설득이 쉽지는 않을 텐데요.

“어떤 일도 쉬운 일은 없죠(웃음). 긍정적인 신호는 최근 대기업에서 경영권 승계가 이뤄지면서 젊은 리더가 늘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기후변화나 사회문제에 관한 인식이 확실히 이전 세대와 달라요. 저는 대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의 좋은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특히 기후변화 같은 문제는 큰 기업이 앞장서서 해주는 게 훨씬 효과가 있다고 봐요. 이것도 최적화라고 할 수 있죠.”

―’임팩트 비즈니스’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임팩트 비즈니스의 목표였어요.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가 될 거예요. 취약 계층이 늘어날 테니 임팩트 비즈니스도 확장되겠죠. 반면 럭셔리 비즈니스 분야는 위축될 거예요. 최적화의 반대편에 있는 산업이다 보니….”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지는데요.

“너무 특정 업계를 지목하는 것 같아서(웃음).”

―전 세계 임팩트투자 규모도 확대되겠죠?

“그럼요. 가장 ‘안정적인 투자’니까요.”

―’착한 투자’가 아니라?

“2년 전 독일의 ‘바이엘’이란 회사가 미국의 ‘몬샌토’라는 큰 농업 회사를 인수했어요. 그런데 몬샌토의 ‘라운드 업’이라는 제초제가 암을 유발한다고 해서 소송이 제기됐고 바이엘은 소송 취소 합의금으로 최근 13조원을 물어줬어요. 여태까지는 장부상에 등장하지 않던 사회·환경적 비용이 전부 기업들에 돌아갈 거예요. 어찌 보면 바이엘은 최악의 투자를 한 거죠. 이런 일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면 임팩트투자는 가장 안정적인 투자가 되는 거죠. 사회·환경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노무 이슈는 없는지, 서비스와 상품은 안전하고 건강한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한 투자니까요.”

정경선 HGI 의장. /주민욱 C영상미디어 기자

스토리텔러

정경선은 ‘비영리’와 ‘영리’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다. 소셜벤처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의 CEO 자리는 유학을 가던 해 내려놨다. 대신 최고상상책임자(CIO)라는 재미있는 직함을 받아 소셜섹터의 미래를 ‘상상’하는 일을 하고 있다. 루트임팩트가 소셜벤처들의 시작을 돕는다면, 임팩트투자사인 HGI는 이들이 성장하고 규모를 키울 수 있게 투자를 해준다. 정경선은 지난 5월 HGI 이사회의 의장직을 맡아 장기적인 사업 방향을 그리고 있다.

―대학 졸업하고 ‘비영리’에서 일하겠다고 했을 때 집에서 뭐라 하시던가요.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걸 존중해주시는 편이에요. 사실 우리 집안에서 남자애(?)가 비영리에서 일한 역사가 없긴 했어요. 처음 일했던 곳이 아산나눔재단이었는데 그때는 부모님께 ‘패밀리 비즈니스’라는 명목으로 설득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별말 없이 보내주셨고요. 루트임팩트 설립할 때는…. 포기하신 듯했어요. 너 어차피 네 맘대로 할 거 아냐? 이런 반응이었어요(웃음).”

―경로를 이탈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제대로 가고 있네요. 창업해서 승승장구.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 DNA’를 가장 정통으로 물려받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코넌 오브라이언 아시죠?”

―네.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MC로 유명한….

“어릴 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해요. 괴롭힘 당하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인기 있는 사람의 조건’ 같은 걸 리스트로 작성해 봤대요. 공부, 운동 다 안 될 것 같고 ‘웃기는 것’ 하나는 재능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해요. 그래서 인기도 얻고 성공도 했죠. 저도 중·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한 기억이 있어서 이 이야기가 더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나라는 사람에게 특별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스토리텔링’ 능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 덕에 ‘임팩트투자’라는 새로운 분야를 공론화하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꽤 괜찮게 했던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착한 재벌 3세 이미지를 잘 소화하면서 그 서사를 사람들에게 주고 ‘착한 투자’라는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한 거죠.”

―기업가라기보단 ‘스토리텔러’라는 이야기인가요.

“기업가나 투자자보다는 스토리텔러에 훨씬 가깝죠. 우리 투자팀과 직원들이 일을 잘해주고 그걸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에요. 제가 대단해서 회사가 잘된 게 아니에요.”

―그 훌륭한 직원들과 함께 ‘글로벌’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방콕, 싱가포르, 뉴욕, 샌프란시스코, 베이징 등 세계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인류에게 닥칠 디스토피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특히 서울과 방콕, 싱가포르 등 아시아 도시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거예요. 거점 도시를 정해 이곳을 중심으로 자원을 투입하면 문제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죠.”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인가요.

“동남아시아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인 동시에 기후변화 피해를 가장 심각하게 보게 될 지역이에요. 2050년이 되면 베트남 남부 지방이 죄다 물에 잠기고, 태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10%가 해안 침수로 집을 잃게 된다고 해요. 가장 위험한 지역이지만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어요.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대규모 임팩트 자본을 조성해 이런 문제에 대비하려고 해요. 최대한 많은 돈이 임팩트투자로 모이도록 자본력을 가진 각국 대기업과 정부를 설득해나갈 겁니다.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정경선은 자신을 이기적이고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기후변화 문제와 임팩트 비즈니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에 기인한 것이라고 했다. “진정한 디스토피아는 암울한 상황 자체가 아니라 지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안녕(安寧)해야 결국은 나도 안녕할 수 있습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