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을 살고 싶은 곳에서”
지역에 청년 모이고, 자본 뒤따라
소상공인? 이젠 로컬크리에이터!
성공 핵심 ‘지역 정체성’에 달려
한때는 하숙촌을 이루며 번화했지만 세월이 지나 쇠퇴해버린 충남 공주의 구도심. 이곳으로 다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옛 가옥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가 생기고 근처 식당과 카페, 세탁소, 사진관이 연결되면서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처럼 관광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공주 구도심의 ‘마을호텔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들은 일명 ‘로컬크리에이터’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지역의 유산에 비스니스 모델을 결합해 죽어있던 마을을 되살려냈다.
‘로컬’이 뜨고 있다. 지역으로 청년들이 모이고, 자본이 흐르기 시작했다. 로컬크리에이터들이 전국 각지에 등장하면서 ‘로컬 신(local scene)’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이들의 모토는 간단하다. ‘하고 싶은 일을 살고 싶은 곳에서 하자!’
하고 싶은 일을 하자
강원 양양은 불과 5년 만에 서핑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한 해 70만명에 달한다. 양양 해변을 2030세대들로 가득 채우기까지는 박준규 서피비치 대표의 역할이 컸다. 서피비치는 40년간 출입이 통제됐던 군사제한구역을 서핑 전용 해변으로 탈바꿈시킨 로컬 스타트업이다. 강원에서 나고 자란 박 대표는 지난 2015년 체험 중심의 서핑 강습을 시작으로 F&B(식음료) 사업, 광고 사업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동해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 직장 생활할 때 우연히 강릉으로 출장 올 일이 있었는데, 너무 현대화가 안 돼 있는 거예요. 즐길 거리가 없는 옛날 느낌의 바다랄까…. ‘놀 땐 확실하게 노는’ 젊은 층을 잡으려면 그 공간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 중심에 ‘서핑’을 둔 거죠.”
간단한 결심으로 출발했지만 준비 과정은 길었다. 우선 서핑에 적합한 직선형 해변을 찾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어렵사리 800m짜리 한적한 해변을 찾았지만 철조망이 쳐진 군사제한구역이었다. 또 해수욕장으로 등록돼 있지 않아 물놀이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벽들이 오히려 특별한 해변으로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 박 대표는 “일반 바다에는 구명장비 없이 입수가 안 되지만 서프보드는 구명장비로 등록돼 있어 가능하다”면서 “우선 해변을 임대하는 공유수면허가를 신청하고 작은 컨테이너 박스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렇게 탄생한 국내 최초의 ‘서핑 전용 해변’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박 대표와 디자이너 두 명이 시작한 서피비치는 정직원 16명, 계절직 사원 70명이 일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매출만 30억원에 이른다.
업종 구분은 ‘무의미’
로컬크리에이터들은 전국으로 무대를 넓히고 있다. 지난 6월 중소벤처기업부가 처음 진행한 로컬크리에이터 발굴·육성 사업에는 3096팀이 지원해 22대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중기부는 상반기 140팀을 선발했고, 하반기 추가 140팀 선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업종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식당에서 공연하고, 공간 대여와 마케팅 기획 사업을 동시에 벌이는 식이다. 이 때문에 특정 업종으로 구분 짓는 게 어려워졌다. 국내 최초 극장식 레스토랑으로 불리는 ‘해녀의부엌’이 대표적이다. 수산물 위판장을 개조한 공간에서 제주 해산물로 요리를 맛보면서 해녀의 삶을 담은 연극 공연을 보고, 현직 해녀가 들려주는 해산물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김하원 해녀의부엌 대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한 공연예술가다. 공연과 요리의 균형이 생존 전략이다.
지난 2018년 2월 강원 속초의 폐조선소를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칠성조선소’도 마찬가지다. 3대째 가업을 이어받은 최윤성 칠성조선소 대표는 “공장 내부에는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뮤지엄과 배를 제작하는 공방이 있고, 한쪽에선 커피를 팔고, 야외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조형물로 꾸몄다”면서 “특정 업종으로 구분 짓기보다 그저 마을 주민과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에는 65년 전통의 칠성조선소 간판 글씨를 디지털 폰트 ‘산돌 칠성조선소체’로 출시했고, 조선소 건물에서 뮤직 페스티벌과 단편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경북 문경의 ‘리플레이스’는 20년간 방치된 폐양조장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바꿔 운영하고 있다. 이들도 2018년 한옥 게스트하우스와 로컬 편집숍, 카페 사업으로 시작해 영역을 확장시킨 케이스다. 떡와플, 오미자에이드 등 지역 농산물로 빵과 음료를 판매하는 동시에 귀촌을 원하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정착을 유도하고 있다.
핵심은 ‘로컬 아이덴티티’
로컬크리에이터 성공의 핵심은 ‘정체성’이다. 지역 사회에 녹아들지 않고서는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로컬 비즈니스의 성공 요소로 문화 자원과 안정적인 임대료, 기업가 정신 등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문화 자원과 이를 통해 형성된 지역 정체성”이라고 설명했다.
지역 정체성을 핵심 가치로 삼은 대표적 사례는 전남 목포 원도심에 ‘마을펍’을 만든 ‘건맥1897협동조합’이다. ‘건맥’은 지역 특산물인 건해산물과 맥주의 첫 글자에서 따왔고 ‘1897’은 목포항이 개항한 연도를 뜻한다. 조합원은 100명. 이들은 활력을 잃은 해산물 거리를 살리자는 취지에 공감해 출자금을 내놨다. 입주 건물도 조합원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지역 자산화 방식으로 취득했다. 부동산 매입비와 공사 비용을 합친 전체 사업비 3억9000만원은 협동조합 출자금에 임팩트투자사 비플러스, 신용보증기금, 사회연대기금 등에서 조달한 자금으로 채웠다. 발생 수익은 지역 공동체와 나누기로 했다.
박기범 비플러스 대표는 “협동조합의 경우 조합원 모집과 출자금 조성 등이 쉽지 않고 의사 결정도 개인사업자나 주식회사에 비해 늦지만,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엔 가장 적합한 조직 형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장에서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분들을 만나 보면 지역 활성화에 기여하는 공통점은 있지만, 각자 비전과 지향점은 조금씩 다르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면서 “반드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갖춰야 한다고 할 순 없지만 이들이 로컬크리에이터라는 넓은 개념 속에서 서로 시너지를 내는 게 더 중요할 것”이라고 했다.
투자를 더하다
지역 곳곳에서 로컬신이 형성되면서 최근에는 민간 차원의 투자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부산 영도를 기반으로 한 도시재생 스타트업 ‘RTBP얼라이언스’는 지난해 7월 벤처캐피털 쿨리지코너인베스트먼트로부터 20억원의 투자를 이끌어냈다. RTBP의 출발은 영도의 조선(造船) 산업이다. 버려진 조선소 건물에 창업 공간을 마련하고, 과거 조선소 노동자들이 머물었던 빈집을 사들여 주거 시설로 바꿨다. 또 오랫동안 비어 있던 창고를 매입해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을 조성했다. 이들은 마을 전체에 걸쳐 일과 여가, 거주 공간을 제공하는 실험을 벌이고 있다.
도시 콘텐츠 기업 ‘어반플레이’는 지난해 7월 26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어반플레이는 동네의 다양한 로컬크리에이터들의 접점을 찾아 새로운 콘텐츠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매년 10개 이상 벌인다. 지난해에는 서울 연남동과 연희동 소재의 100개 상점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연희걷다:연연백화점’을 기획했다. 연희동과 연남동은 지도상 맞닿고 있지만 행정구역은 각각 서대문구와 마포구로 다르다. 어반플레이는 이 두 지역의 골목 곳곳에 떨어져 있는 상점을 연결해 ‘백화점’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골목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로컬 투자 전망을 긍정적으로 전망한다. 김정태 MYSC 대표는 “과거 지역 소상공인으로만 불리던 이들에게 ‘로컬크리에이터’라는 개념을 적용하면서 계층의 확장과 비즈니스 모델의 다양성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면서 “스케일업을 위해 법인화 작업을 밟는 개인사업자들도 전국적으로 발굴되고 있다”고 했다. 류인선 IFK임팩트금융 전략팀장은 “대부분 창업 1~3년 차라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큰 규모의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밝게 전망한다”며 “다만 단순히 투자나 융자만 이뤄져서는 생태계를 키우기 어렵고, 장기적으로는 로컬에 기반을 둔 엑셀러레이팅 조직도 생겨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