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재난 속 빛난 ‘시빅해킹’
시민이 디지털 기술 등을 활용해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시빅해킹(Civic Hacking)이 코로나19 극복의 열쇳말로 떠올랐다. 확진자 동선을 제공하는 ‘코로나맵’과 전국 마스크 판매처와 재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마스크맵’ 등 시민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시민이 직접 만든 서비스가 쏟아지고 있다. 학생, 교사, 디자이너, 공무원, 비영리 활동가 등 서비스를 만든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감염병 확산이 본격화한 지난 2월 이후 무료로 배포된 코로나19 관련 서비스만 50여 개에 이른다. 정부는 시민에게 공공 데이터를 제공하고, 기업은 운영비를 대는 식으로 이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사회 재난을 겪으며 시민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는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동 대응 결성부터 마스크맵 공개까지… 숨 가빴던 일주일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하면서 전 국민은 ‘마스크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지난달 29일, 마스크 생산량의 대부분을 약국을 비롯한 공적 판매처에서 공급하는 ‘마스크 공적 판매’ 제도가 도입됐지만 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판매처별 마스크 수량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여론은 나빠질 대로 나빠졌지만 정부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해법을 들고 나온 것은 시민들이었다. 권오현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대표를 비롯한 개발자 17명이 ‘코로나19 공공 데이터 공동 대응'(이하 ‘공동 대응’)을 꾸려 지난 4일 국민 참여 플랫폼 광화문1번가에 “공적 마스크 재고 등 정부가 가진 코로나19 관련 공공 데이터를 개방해 달라”고 제안했다. 공공에서 재료만 넘겨주면 필요한 서비스는 민간에서 개발하겠다는 취지였다.
공동 대응은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1월부터 민간 차원의 대응 방안을 논의했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 데이터가 부족해 서비스 개발에 어려움을 겪었다. 공동 대응 초기 멤버인 중학생 강창완(14)군은 “집단 지성을 활용해 약국별 마스크 재고를 사용자들이 ‘수기’로 입력하는 방식도 고려했지만, 2만개가 넘는 약국을 모두 감당하기 어려웠다”며 “다른 개발자들도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긁어모으는 ‘막노동’을 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6일 데이터 공개를 결정했고, 11일부터 ‘마스크스캐너’ ‘마스크알리미’ ‘웨어마스크’ 등 30여 개 서비스가 동시에 쏟아졌다. 공동 대응이 정부에 제안하고 마스크맵 서비스가 개시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일주일이었다.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에 따르면 마스크맵 관련 서비스의 조회 수를 모두 더하면 시간당 최대 1000만건에 달한다.
17명으로 출발한 공동 대응 참여자는 현재 17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인천에 사는 김겸(12)군이 최연소다. 채팅 기반 코로나·마스크 정보 제공 서비스 ‘코로나봇’ 개발자로 이름을 올렸다. ‘광화문 주변 마스크 살 수 있는 약국 알려줘’라고 채팅창에 입력하면 목록이 쭉 나열되는 식이다.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복무 중인 유광무(20)씨는 ‘세이브마스크’ 서비스를 만들었다. 원활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요즘도 퇴근 후 매일 새벽 3시까지 유지·보수 작업을 한다. 170여 명 모두 대가 없이 무급으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다.
“정부를 믿어라”에서 “함께 해결하자”로
코로나19 사태는 미국·일본·대만 등 나라에 비해 발전이 더뎠던 우리나라 시빅해킹을 활성화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정부는 시민을 정책 수행의 ‘파트너’로 여기기 시작했다. 지금도 행정안전부, 서울시, 한국정보화진흥원 담당자가 공동 대응 채팅방에 들어와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공공 데이터 개방 운동을 하는 사단법인 코드의 오원석 이사는 “10여 년 전부터 시빅해킹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녀도 공공과 민간 사이의 벽이 깨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며 “사태 초기부터 정부가 민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말했다. 김은주 한국정보화진흥원 디지털혁신기술단장은 “마스크맵은 시빅해킹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사례”라며 “앞으로 정부의 문제 해결 방식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를 준비하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공동 대응은 현재 시빅해킹 커뮤니티 ‘코드포코리아(Code for Korea)’ 설립 준비에 한창이다. 지난 2009년 세계 최초로 설립된 이후 정부 감시 운동 등을 하고 있는 ‘코드포아메리카(Code for America)’를 본떴다. 코드포코리아를 정부와 시민이 직접 소통하는 채널로 삼고, 시빅해킹을 통한 사회 혁신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공공 데이터를 활용한 도심 주차난 해소, 블루투스 기술을 적용한 코로나19 확진자 접촉 여부 판단 등의 서비스 개발이 논의되고 있다.
코드포코리아 준비단의 메인테이너(main tainer·운영진) 역할을 맡은 대학생 강희원(20)씨는 “시민들이 각자 가진 재능으로 다른 시민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시빅해킹의 가치”라며 “프로그래밍을 모르는 사람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무료로 세이브마스크 앱의 디자인 작업을 한 대학생 이유진(20)씨, 코로나19 정보 제공 사이트 ‘유바이러스’의 영어 번역을 자원한 고등학생 김동연(18)군 등이 대표적이다.
2012년부터 활동한 ‘1세대 시빅해커(Civic Hacker)’ 권오현 대표는 “우리나라는 공공 데이터 공개 수준도 세계적이고 개발 인프라도 잘 갖췄지만, 활용하는 시민이 적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코로나19 사태가 시빅해킹 활성화의 분기점이 됐다”며 “‘나도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낀 시민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변화 속도도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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