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이 말하는 ‘내 인생의 나눔’]
방글라데시 쿠투팔롱 난민촌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미얀마가 보인다. 미얀마는 로힝야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떠나온 그리운 고향이다. 눈앞에 고향을 두고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 이웃의 집에 놀러 가고, 일을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당연한 권리조차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이것이 내가 아는 로힝야 사람들이다.
지난 19일,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에서 나는 이들을 다시 만났다. 지난 2017년 8월 미얀마 라카인주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로 인해 74만명이 넘는 로힝야 사람들은 집을 떠나 이웃 국가인 방글라데시로 피신했다. 1990년대부터 피신 온 난민까지 포함하면 91만명이 넘는다. 이들이 머무르는 쿠투팔롱 난민촌은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한 난민촌이다.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7년 12월,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의 부탁으로 쿠투팔롱 난민촌을 방문했었다. 유엔난민기구의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여러 곳을 방문했지만 당시 로힝야 난민들의 상황은 그 어떤 곳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처참하고 절망적이었다. 삶의 터전이 불타고 가족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유엔난민기구와 활동을 시작한 이후, 한 번 방문했던 난민촌을 재방문한 건 처음이다. 콕스 바자르 사무소의 직원들은 2년 전 내가 만났던 가족 중 두 가족을 찾아줬다. 난민들은 정식 거주지가 정해질 때까지 ‘트랜짓 센터(Transit Centre)’에서 임시로 머물게 된다. 2년 전 트랜짓 센터에서 만났던 ‘조흐라’는 현재 두 딸, 그리고 손녀와 함께 34개의 구역으로 나뉜 쿠투팔롱 캠프4에서 지내고 있었다. 미얀마에서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목숨을 잃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족들을 데리고 피신한 조흐라는 2017년 첫 만남에서 내게 말보다는 눈빛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했었다. 다시 만난 조흐라는 얼굴을 맞대고 앉은 내가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날이 너무 더워 하루에도 몇 번씩 공동 샤워 구역으로 씻으러 간다며 활짝 웃었다. 캠프 생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가던 조흐라는 내게 속삭이듯 두 딸과 손녀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전했다. 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다. ‘이 사태는 대체 언제쯤 끝나는 것일까?’
‘누라이샤’의 가족도 2017년 트랜짓 센터에서 만났었다. 누라이샤의 두 딸 모리암과 파트마는 2년 새 훌쩍 자라있었다. 다시 만나게 된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누라이샤의 눈시울이 바로 붉어졌다. 자신들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준 이방인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많은 감정이 전해지는 그 눈빛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2017년 8월 미얀마 군부의 탄압으로부터 급히 피신하던 누라이샤는 남편과 반년 넘게 연락이 끊겼다. 다행히 가족 모두 쿠투팔롱 난민촌에 무사히 도착했고,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으로 재회했다. 가족 단위로 진행되는 유엔난민기구의 난민 등록 과정(registration)이 중요한 이유다.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은 미성년자라면 이와 같은 절차를 통해 가족을 찾을 수 있다. 남편과 재회했지만 누라이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미얀마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로 허리를 심하게 다친 남편 대신 누라이샤가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고, 어린 두 딸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44만 명이 넘는 로힝야 아이들은 방글라데시 정부의 정책과 난민 신분의 제약 탓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배움터(Learning Centre)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있지만, 졸업장이나 공식 수료증이 없는 이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방글라데시에서도, 미얀마에서도 계속해서 교육을 이어나가기 어렵다. 로힝야족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문제다. 과거 레바논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은 내게 “한 세대의 단절된 교육을 완전히 복원하기 위해서는 100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국적과 상황이지만 난민들의 아픔은 늘 통해 있다.
난민촌 방문 일정의 마지막 날, 다시 찾은 쿠투팔롱 트랜짓 센터에서 한 달 전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두 가족을 만났다. 그 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로힝야 난민들은 여전히 탄압과 박해, 때로는 목숨의 위협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신하고 있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마흐무드는 미얀마에서 계속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자신의 나라’이기 때문에 도망치지 않고 버텼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가 갈아입을 옷부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급한 상황이지만, 마흐무드의 궁극적인 꿈은 자신의 나라 미얀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미얀마는 민주주의 국가이며, 국가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기본권을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기본권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물과 공기처럼 당연한 것들이다.
이번 방문 기간 중 난민 업무를 총괄하는 방글라데시 난민구호송환국장(Refugee Relief and Repatriation Commissioner)을 면담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는 공식적으로 난민을 막기 위해 국경을 폐쇄한 적이 없으며, 수십 년간 계속해서 로힝야 난민을 수용하고 보호했다”며 “이러한 관대함의 근간은 정부가 아닌 국민”이라고 했다. 난민을 관대하게 수용하는 국가의 일원이라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자긍심은 방글라데시 지역사회와 로힝야 난민을 보다 가깝게 묶어준다. 하지만 난민 100만명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자원을 나눠야 하고,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가 생기고, 사회·경제적으로 야기될 수 있는 여러 이해 충돌 등이 장기화된다면 지역 주민들의 지속적인 환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방글라데시 정부의 고민과 우려도 이 지점에 놓여 있다.
전 세계 난민의 8할 이상은 대한민국, 유럽, 북미 등 선진국이 아닌 인접국이 책임지고 있다. 난민 발생의 원인인 각종 분쟁의 책임은 특정 국가에만 있다고 볼 수 없다. 모든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국제사회 그 누구도 특정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들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것은 특정 국가나 절대자, 신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무엇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할 것인가? 여러분의 선택이다.
[글=배우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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