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남자가 생리대 더 잘 만들수도”… “과학의 페미니즘화 꿈꿔요”

성별 고정관념 깬 女와 男 ‘여성과 젠더’를 말하다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 & ‘주식회사 29일’ 홍도겸 대표 

여성 문제를 해결하는 두 남녀가 만났다. 한 명은 로봇과 사랑에 빠진 ‘로봇 덕후’, 다른 한 명은 ‘반값 생리대’를 만든다. 무심코 성별을 짐작했다면 예상과 다를지 모른다. 이공계 여성을 지원하는 ‘걸스로봇’의 이진주(40·여) 대표, 국내 1호 반값 생리대 ’29days’를 제작한 ‘주식회사 29일’의 홍도겸(34·남) 대표 이야기다. 더나은미래는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성별 고정관념을 깬 대표 2인의 공동 인터뷰를 기획했다. 지난 21일 서울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만난 두 대표는 여성과 젠더 이슈에 대해 2시간 동안 열띤 이야기를 나눴다.

ⓒ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걸스로봇은 ‘여성과 과학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과 싸우고, 더 많은 여성이 이공계에 진출해 살아남도록 지원하는 소셜벤처다. 펠로십(장학생) 지원부터 국내외 과학 콘퍼런스 참석, 페미니즘 토크 콘서트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해에는 WISET(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와 함께 이공계 여성 100명과 토크콘서트를 열었고, 올해 초에는 세계 최대 단체인 AAAS(전미과학진흥협회)의 연례회의를 다녀와 스토리펀딩을 개설해 1000만원을 훌쩍 넘겼다. 주식회사 29일은 선진국보다 2배 이상 비싼 생리대 단가를 낮추기 위해 직접 만든 생리대를 국내 업체를 통해 생산한다. 지난해 2월 정식 출시한 29days 생리대는 한 팩에 2500원(16개입, 중형 기준). 합리적인 가격에 찾는 사람이 늘면서 지난 한 해 매출이 4억원을 넘겼고, 서울시 예비사회적기업 인증도 받았다. ‘생리대 파동’이 터진 지난 하반기에는 5차까지 예약판매를 할 정도로 품절 사태를 빚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2015년 말 나란히 창업했다. 각자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왜 ‘여성’이었나.

홍도겸(이하 홍)=스스로 가졌던 질문은 ‘왜 여성인가’보다 ‘왜 여성이 불편한가’였다. 미국에서 6~7년 학교에 다니다 한국에 왔는데, 이전엔 몰랐던 이야기가 주위에서 들렸다. 생활필수품인 생리대를 사는데 숨겨야 한다거나, 생리대 가격이 널뛰기해 두세 달치를 한꺼번에 산다고 했다. 많은 여성이 불편을 느끼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창업을 했다. 생리대 시장이 ‘레드오션’이란 우려도 있고, 대안으로 생리컵이나 면생리대도 나오고 있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생리대, 그중에서도 중형 타입부터 시장을 바꾸고 싶었다.

이진주(이하 이)=공대로 진학했다가 국어교육과로 전공을 옮겼고,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워킹맘이 되면서 커리어를 끝냈다. 좌절하며 제주로 내려갔는데, 당시 아이를 낳고 복직을 준비하던 변호사 친구가 스트레스로 세상을 떠났다. 여러 사건을 겪고 나니 ‘여성은 인문계열에서 할 만큼 했다. 죽도록 해봤으니 이제 기술을 갖자’는 생각이 들더라. 과학기술계 내 젠더와 여성 문제가 낙후돼 있던 것도 컸다. 이공계 내 여성 비율은 10~15%이고,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로봇과 인공지능을 다루는 기계공학계열의 여성은 6.8%다. 이공계 내에서 여성과 퀴어, 젠더 다양성을 높여가며 ‘과학의 페미(페미니즘)화’ ‘페미의 과학화’를 꿈꾸고 있다.

생리대 29days의 친환경적인 패키징도 2000여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로 선정됐다. ⓒ주식회사 29일

―창업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면.

이=여성 과학자 대부분이 여성들이 모여 ‘으쌰으쌰’ 한다고 하면 좋아하신다. 다만 ‘수퍼우먼’으로 불리는 여성 원로 중에는 “여자들만 따로 모이면 열등성을 증명하는 것 아니냐”면서 후배들에게 “노력하면 일과 가정 두 가지 다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중간세대가 사라지는 걸 눈으로 지켜본 이공계 여학생들을 좌절시키는 말이다. 이런 ‘언니’들을 설득해 어떻게 더 큰 지지와 자원을 가져갈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남성 중에는 ‘여자가 이 바닥(이공계)에 왜 들어왔나. 어디 꿀 발라 놨나’ 하신 분도 계셨다. 2년 반 동안 자비로만 5억원을 쓰면서 활동했더니 이제 진정성을 의심하는 분들은 없어졌다.

홍=남성 공동대표 2명이 창업을 했다. 처음에는 남성이란 점이 전혀 문제가 안 됐다. 대기업 독과점 구조인 생리대 산업에도 남성이 대부분이더라. 대중과 소비자를 만나면서부터는 남성으로서 경험해보지 못한 분야인 만큼 더 잘 알아야 한다고 느꼈다. 여성 2000여명을 만나고 온·오프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하며, 제품의 콘셉트와 패키지에 반영했던 이유다. 남성에게 생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로 이야기가 빙빙 돌면서 인터뷰에만 30분 이상 걸릴 때가 많았고, “겪어보지 않은 남성이 생리대를 만드느냐” “깔창 생리대 이후 시장성을 보고 온 거 아니냐” 등의 질문을 받기도 했다. 취지를 말씀드리고 합리적인 가격을 강조했더니, 결국 나중엔 응원해주시더라.

―창업 생태계에 여성, 남성에 대한 편견은 없나. 가령 ‘여성은 체력이 약해서 안 된다’거나.

이=여성들이 체력이 약하지 않다는 증거가 바로 저일 것 같다(웃음). 제주도에서 두 아들을 키우며 지난 2년 반 동안 서울과 제주를 수시로 오가며 일해왔다. 아이 문제로 하루 세 번까지 비행기를 타봤다. 다들 제게 “생각보다 독한데”라고 해주시는데 듣기 좋다. 여성에게 딱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제가 만난 여성 창업가들도 모두 멋있고 ‘정력적’이다. 보통 여성들이 학교에서는 범생이로, 이후엔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등 사회가 제시한 틀에 맞춰 사는 경우가 많은데, 틀을 깨고 창업에 나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결심이고 보통 의지가 아니다. 이들을 ‘엄마라서 강하다’가 아니라, ‘여성이라 대범하고 여성이라 독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홍=저만 해도 바쁘게 움직이는 이진주 대표와 달리, 체력이 약한 편이라 되도록 동선을 최소화하고 5시 30분~6시면 퇴근한다. 각자 다른 개인의 성향일 뿐 무엇이 좋고 나쁘다거나, 성별로 구분 짓거나 고정관념에 갇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역으로 남성이기 때문에, 생리대 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여성이 말할 때와 또 다른 임팩트를 낼 수 있을 것이란 역발상에서 출발했다.

100% 동감한다. 밀레니얼은 성별을 남녀가 아닌 스펙트럼의 개념으로 바라본다. 걸스로봇에도 트렌스젠더인 팀원이 있고 팀 안에서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과 젠더 다양성 운동을 하고 있지만, 성별을 떠나 개개인의 삶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어느 한 쪽이 아닌 모두의 성공이 될 것이다.

올해 초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AAAS(전미과학진흥협회)에 참석한 이진주 대표(왼쪽에서 두번째)와 걸스로봇 팀원들. ⓒ걸스로봇

―편견을 깨는 더 많은 도전이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앞으로의 계획은.

홍=편견 없이 각자가 행복한 일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회사도 여성 특화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을 통해 창업했고, 이후 예비사회적기업 소관부처도 여성가족부로 신청했다. 여성이 많은 곳에서 피드백을 듣고 무의식중에 가지는 편견이나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을 다듬기 위해서다. 앞으로는 티슈 결합형 등 여성의 불편을 줄여주는 제품을 제작하고, 위생교육 캠페인을 진행해 위생문화도 개선해보려 한다. 판매량의 일정 비율로 수익금을 적립해 취약계층에 생리대를 보내는 기부도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이=지난해 ‘D3 임팩트 나이츠’에 참석했을 당시, 대다수가 남성이었고 여성 투자자와 기업인·스태프를 다 합쳐도 20명 남짓이었다. 그래도 “여성이 왜 이렇게 많죠”란 말이 나오더라.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정하려면 여성 비율을 최소 절반으로 맞추는 숫자적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걸스로봇은 올해 ‘살롱’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미투(Me too·나도 말한다) 운동이 곳곳에 점으로 있던 이들이 동시에 목소리를 낸 자리였다면, 상시로 만날 자리를 마련하고 존경할 만한 롤 모델도 초청하려 한다. 장기적으로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사람을 키워나가는 것도 꿈이다.

ⓒ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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