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국내 최초 발달장애인 위한 ‘쉬운 책’… 글 읽는 즐거움 선물합니다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지난달 22일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도서 출판기념회’에서 발표하는 함의영 대표의 모습.
지난달 22일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도서 출판기념회’에서 발표하는 함의영 대표의 모습.

“딱 봐도 재미없어 보이죠?” 샛노란 표지에 선명한 검은색 글씨로 쓰인 ‘O. 헨리 이야기’. 책을 훑어보는 기자에게 한마디가 날아왔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이라고 표지에 크게 쓰면 누가 볼까요? 독자의 자존감을 위해 표지에 ‘장애인’ 용어 빼고 무조건 ‘재미없게 간다’가 원칙입니다.(웃음)”

올해 초 조금 특별한 책이 세상에 나왔다. 발달장애인의 눈높이에 맞춘 ‘쉬운 책’이 주인공. 표지는 일반 책과 다를 바 없지만, 읽는 이를 고려해 완전히 새롭게 쓰였다. 지난해 1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달 23일, 국내 최초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펴낸 함의영(35) 피치마켓 대표를 만났다.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혁신’

2014년 초, 공익 프로젝트와 컨설팅을 진행하는 소셜벤처 ‘스위치랩’을 운영하던 함 대표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멤버의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발달장애인이었기 때문. “전문 지식도 없고 네트워크도 없었어요.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발달장애인을 고용하는 사회적기업 ‘베어베터’를 찾아갔죠. 이진희 대표님과 이야기하면서 발달장애인들에게 정보 자체가 차단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들에게 꼭 글 읽는 즐거움을 알려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도서 제작은 ‘피치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특수 교육 전문가와 출판업계, 삽화 디자이너 등 다방면의 전문가를 모으고 각색은 2013년 말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발표한 ‘발달장애인용 쉬운 책 개발’ 보고서를 참고했다. 그렇게 2014년 말, ‘세상에 없던’책이 빛을 봤다. 반향은 컸다. 무료 배포한다는 공지를 올리자마자 문의가 쏟아졌다. 처음 인쇄한 300부에 더해, 국립장애인도서관의 후원으로 300부가 추가로 배포됐다.

◇고된 이중 생활… 슬럼프를 이겨낸 한 통의 편지

첫 번째 책 출간 이후 함 대표의 고민은 커졌다. 재정 확보가 되지 않는 이상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 함 대표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홍대 근처에 카페를 열었다.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카페 사장으로 ‘이중 생활’을 했다. 10㎏ 이상 살이 빠지고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울 때쯤,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우리 아들은 발달장애인입니다. 스무 살이 되도록 동화책밖에 읽을 수 없던 아들입니다. 그런 제 아들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주셔서 정말 눈물 나도록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눈물 나게’ 소중한 일이라는 걸 안 이상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아예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참여도 크게 늘렸다. 발달장애인 작가 3명이 삽화 작업에 참여했고, 서울시립지적장애인복지관의 도움으로 3명이 책 감수를 맡았다. “‘나’와 ‘너’,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헷갈려 하시더라고요.” 감수 결과는 ‘통 폐기’. 세 번을 새로 쓴 후에야 작업이 끝났다. 함 대표는 “두 번째 책은 비장애인이 보기에는 어색하고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 편한 글과 발달장애인들에게 편한 글은 다르다”며 “쉬운 단어로 쓰인 아동 도서가 발달장애인을 위한 도서가 될 수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정보 영역 확대돼야

함 대표의 최근 관심은 제공하는 정보 영역의 확대다. “감수를 했던 분들의 대화 주제가 단순한 일상에서 ‘책’으로 바뀌었어요. 자신이 그리고 싶어하는 것만 그리던 작가들에게서도 누군가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반영하는 ‘디자이너’로서의 면모를 발견했죠. 발달장애인을 위한 정보의 영역이 커져야 함을 느꼈습니다.”

최근에는 근로계약서를 쉽게 쓰는 프로젝트를 했다. 무료 배포 소식이 알려지자 사용 문의가 이어졌고, 법무법인 한결은 쉬운 글로 바꾼 계약서의 법적 검토를 진행했다. 대웅제약은 실제로 사용 중이다.함 대표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정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며 “발달장애인을 포함해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콘텐츠 제작에 힘쓰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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