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의 N가지 질문
사람들의 ‘기적적인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올해 초, 별생각 없이 켠 유튜브에서 뉴스 영상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제목은 <“정말 충격적인 사람입니다”…방송 일주일도 안 돼 벌어진 일>, 섬네일은 <역시 참지 않는 한국인들 방송 일주일도 안 돼 ‘발칵’>. 자극적인 글귀는 무심코 영상을 눌러보게 한다. ‘도대체 뭐가 충격이라는 거지?’, ‘한국인들이 무엇을 참지 않았을까?’ 영상은 3일 간격의 두 뉴스 보도가 합쳐진 것이었다. 첫 번째 보도는 시민단체를 홀로 이끌어온 한 인물에 대한 것이다. 그는 16년간 무료 상담으로 수천 명의 사채 피해자들을 살려왔지만, 후원금이 끊겨 더 이상 피해자들을 돕지 못하고 해산 절차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보도는 첫 보도 이후 기적처럼 쏟아진 후원금에 해산 결정은 기적처럼 취소됐다는 소식이었다. 자극적인 제목과 썸네일 그대로 ‘충격적인 사람’과 ‘참지 않는 한국인들’의 이야기였다. 업로드된지 7개월이 된 해당 영상의 조회수는 현재 270만회를 훌쩍 넘는다. ◇ 기적적인 연대가 가능했던 이유는 의미와 ‘재미’ 어떻게 이런 기적적인 연대가 가능했을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어서일까? 뉴스에 보도된 인물은 십수 년간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을 도우며 누가 봐도 의미 있는 일을 해왔다. 하지만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다. 다만 그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닿지 않고 있을 뿐. 그럼 어떻게 그의 이야기는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아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닿게 되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재미’의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재미를 논하기 전 재미의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어사전의 뜻은 어쩐지 와닿는 의미가

청년들이 ‘정치적 효능감’을 못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년들의 ‘정치적 효능감’은 사회 발전과 민주주의의 미래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정치적 효능감’은 개인이 정치에 참여해 자신의 의견이 실제로 반영될 수 있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는 특히 청년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청년들이 자신의 목소리가 정치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느낄 때, 더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 변화를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청년은 전체 인구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지 못해 갈수록 참여율이 저조해지고 있다. 청년층은 일반적으로 기성세대보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은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정치가 자신의 삶과 직결된 문제를 다루지 않거나, 정치 시스템이 자신들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실제로 부동산 문제, 고용 불안, 학자금 대출 등 청년들의 삶을 크게 좌우하는 정책들은 종종 정치적 의제에서 소외되거나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청년들의 외적 정치적 효능감을 약화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복잡한 정치 시스템과 전문적인 용어 또한 청년들이 정치적 이슈를 이해하고 참여하기 어렵게 만든다. 청년들은 자신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느끼며 내적 효능감마저 낮아진다. 정치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효능감은 단순한 참여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효능감이 높은 사람은 정치적 이슈를 더 깊이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청년층이 정치적 효능감을 높이면 이들은 미래의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할 잠재적 주역이 된다. 정치적 효능감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유지하는 힘이다. 개인이 자신의 목소리가 정치적 결과에

어떻게 하면 ‘지방소멸’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지방소멸은 곧 ‘지역경제 쇠퇴’이자 ‘국가균형발전이 무너지는 것’이기에 시급한 정책과제로 여겨진다. 지방소멸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지방을 키우기 위해 지역 활성화 예산을 확충하고 지방의 관광상품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지방 인구 유출의 핵심 요인이니, 지방에 대학과 일자리를 늘려 청년인구 유출을 막아야 합니다.” 지방소멸을 주제로 질문하면 나오는 답변이다. 주로 제도적, 행정적인 시각에서 다뤄지는 거대담론이다. 그렇다면 지방소멸의 주체는 정부인가? 아니다. 지방소멸의 핵심 주체는 청년이다. 거주지를 이동하는 것도 청년,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청년이다. 그럼에도 청년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끌려오고, 또 다시 일자리가 만들어진 지방으로 이동하는 대상이다. ‘나’는 일자리만 있으면 이동 당해도 되는가? ◇ ‘나’의 이야기로 말하는 지방소멸 ‘나’의 입장에서 지방소멸을 이야기하자고 하니,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뱉어봐야 좀 전에 읽은 기사와 통계뿐이다. 그제야 문제를 느꼈다. 이 담론의 주체인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수천, 수만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이미 많다. 정량적 조사만으로 이 상황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거대담론은 잠시 옆으로 두고 청년인 ‘나’에 집중해 보고자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수도권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고 싶었다. 서울 지하철은 그만 타고 싶었고, 넘치는 인프라는 과하다고 느꼈다. 다르게 사는 법을 경험하고 싶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간 대학원도 서울에 있었다. 첫 직장도 서울이었다. 벗어나고 싶은 의지와 달리 한 번 서울에 닿고 나니, 경력을 쌓을수록 서울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서울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왜 서울로 끌려가는가’를 주제로 설문을 진행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얼마나 ‘포기’할 수 있나요?

토요일 이른 오후, 침대에 내맡길 권리를 포기하고 나온 이들이 있다. 그들은 청년들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기 위해 모였다. 이들 앞에 놓인 종이 속 여러 질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얼마나 포기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이었다. 하나의 질문이 ▲과연 나는 얼마나 포기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사회는 무엇이지? ▲내가 가진 것들이 뭐가 있지? ▲그중에 어떤 걸 포기할 수 있지? 등 여러 질문으로 파생된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내가 포기한 적이 있던가?’ 우리의 첫 만남은 ‘포기’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N포 세대. 첫 신조어는 2011년에 등장한 삼포세대였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라는 뜻으로 취업난 등을 겪는 2030 세대의 어려움이 드러났다. 이후 오포세대가 나왔다. 앞의 세 가지에 취업과 내 집 마련이 더해졌다. 이어 칠포세대가 나왔다. 앞선 다섯 가지에 건강과 외모 관리가 더해졌다. 다음으로 구포세대가 나왔다. 앞선 일곱 가지에 인간관계와 희망이 더해졌다. 급기야는 십포세대, 완포세대, 전포세대가 나왔다. 그들은 삶을 포기했다. 포기가 주는 어감은 부정적이다. 결과주의적인 사회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어딘가 부족한 사람, 어딘가 모자란 사람. 이런 사회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얼마나 포기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 나를 자극했다. 포기했는데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마이너스로 플러스가 될 수 있다고? 포기가 긍정적일 수는 없을까. ◇ 개인을 존중하며

소비를 ‘줄이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2018년 IPCC는 ‘1.5℃ 특별보고서’에서 지구의 평균 온도를 산업화 이전에 비해 1.5℃ 높아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러나 5년이 2023년, 그 기준치를 넘겨버렸다. 이는 단순히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 5년 사이에 한국 바다에서 열대지방 바다에서 서식하는 백상아리나 고래상어가 나타나고, 사과를 비롯한 농산물도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아 가격이 치솟는 등 우리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변화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해졌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대다수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필자는 일반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 ‘환경을 위한 소비’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이 정치인의 당선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투표하는 것처럼, 시민은 기업의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기업의 생존 여부에 투표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 소비는 기업 생존 여부에 대한 투표 기업이 물건을 생산하는 이유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함이다. 적정 수준의 이윤을 발생시키지 못한다면, 기업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 이윤의 원천은 생산한 물건의 판매이며,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는 시민이다. 따라서 시민이 특정 기업의 물건을 전혀 구매하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물건을 생산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기업이 어떠한 상품도 생산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기업은 도산하게 된다. 즉, 시민이 어떤 기업의 어떤 물건을 구매하느냐는 작게는 그 물건의 생산 여부를 결정하고, 더 나아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투표인 셈이다. 최근 다국적

카카오톡으로 사람과 세상의 연결은 더 나아졌을까요?

장면 하나. 오늘 만날 사람? 내일이 휴가라 일찍 자기 아쉬워 함께 시간을 보낼 친구를 찾는다. 누구와 보낼지 고민하고, 전화번호부를 펼쳐서 일일이 찾을 필요도 없다. 친한 친구들이 있는 카카오톡 그룹 채팅방(단톡방)에 카톡을 보낸다. 딱 여섯 글자. ‘오늘 만날 사람?’ 장면 둘. 홈택스도 카톡으로 세금을 내기 위해 홈택스에 접속한다. 맥북으로 공동인증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카카오톡으로 로그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로그램을 깔 필요 없이 손쉽게 로그인했다. 장면 셋. 가족과의 소통 공간 2017년도에 중남미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걱정한 가족은 단톡방을 만들어 내 근황을 계속 물어봤다. 내가 잘 살아 있는지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전까지 가족은 단톡방이 없었고, 필요한 연락만 가끔 했다. 가족 단톡방이 생긴 이후에 가끔은 잡담을, 가끔은 근황 공유를, 가끔은 외식을 하자는 이야기도 나눈다. ◇ 10년의 시간이 바꾼 순간들 2010년 3월, 카카오톡이 출시됐다. 불과 10여 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카카오톡은 우리의 삶을 바꿨다. 친구들 사이의 소통부터 대학교, 군대에서의 공지와 회사 업무까지 사용하는 목적과 범위도 다양하고, 심지어 정부 사이트도 카카오톡으로 로그인이 가능하다. 카카오톡에 오류가 나타날 경우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멈추고, 뉴스는 카카오톡 오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런 삶이 단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카카오톡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우리는 지금, 카카오톡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에게 카톡이란 어떤 의미일까? 일상 대화뿐만 아니라 업무도 카톡으로 진행하면서 어느 순간 단톡방이 하나둘

미디어가 말하는 청년, 저희는 그거 아닌데요?

여기 한 청년이 있다. 김민준은 1994년생으로, 31살이다. 현재 경기도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있다. 서울 소재 모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해 제조업 계열의 총무팀에서 일하고 있다. 아침에 7시쯤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자차를 운전해 1시간 10분 정도 서울로 이동한다. 퇴근 후 집에 와서는 OTT로 이것저것 보다가 새벽에 1시쯤 잠이 든다. 민준은 정치엔 관심이 없고, 투표 외엔 정치적인 활동은 전혀 해본 적이 없어 캠페인에 참여해 본 적도, 집회에 나가본 적도 없다. 주말엔 수면시간이 두 시간 정도 늘어나고, 토요일 저녁에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하고,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다는 점 정도가 평일과 다른 점이다. ‘공정’과 관련해 김민준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권을 누리는 데에는 반대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과 상관없이 빈곤하거나 욕구가 있는 사람을 돌봐야 공정하다는 의견에는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얻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한데, 노력 없는 도움을 줄 순 없다. 그렇지만 어려운 사람은 돕고 살아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배워왔다. 쉽게 고르기 어려워 의견을 유보하고 있다. 김민준의 연간 총소득은 3200만원으로 98%가 회사 다니면서 번 돈이고, 나머지 2%는 주식에 투자해서 번 돈이다. 지금 갖고 있는 자산은 적금을 붓고 일해서 모은 돈이 1131만원이고, 주식에 투자해서 모은 돈이 259만원, 가상자산에 투자해서 모은 돈이 25만원 정도 있다. 여기에 부채도 비슷한 정도로 있는데, 학자금 대출 남은 돈이 58만원, 초반에 주식에 투자해 보겠다고 대출받았던 돈 36만원과 출퇴근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