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
봉사자 아닌 아시아의 ‘좋은 친구’ 되겠습니다

KB국민은행 사회공헌 ‘라온아띠’ “캄보디아에 다녀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아직까지 답을 찾진 못했지만 적어도 ‘다양성’이나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남들의 기준에 얽매이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거죠.” 23세 정여은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삶’에 대해 말했다. 영어 점수와 취업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여느 20대와는 달라 보였다. 정씨가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은 KB국민은행의 사회공헌사업인 ‘KB-YMCA 대학생해외봉사단 라온아띠’에 뽑힌 덕분이었다. ‘라온아띠’는 순 우리말 고어(古語)로, ‘좋은’, ‘즐거운’이란 의미를 가진 ‘라온’과 ‘친구들’이라는 뜻의 ‘아띠’가 합쳐진 말이다. 라온아띠라는 이름에는 말레이시아·베트남·스리랑카·캄보디아·태국·필리핀 등 아시아 6개국에서 5개월 동안 교육·건축·의료 봉사활동을 하며 현지인들의 ‘좋은 친구’가 되겠다는 봉사단의 취지가 담겨 있다. 정씨는 가톨릭대학교 국제관계학과에 재학 중으로 미국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비영리기구(NGO)에 관심이 많아 국제구호개발 NGO인 ‘굿네이버스’에서 1년 넘게 세계시민교육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 게시판에서 라온아띠 모집공고를 봤을 때 망설이지 않고 지원했다. 정씨는 2009년 3월 초 캄보디아에 도착해 5개월 동안 라온아띠 활동을 했다. 봉사단 활동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정씨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며 요구사항이 많아졌어요. 3개월쯤 지나서는 갈등이 심해졌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4개월이 넘어가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냥 다 같이 함께 생활하는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됐다. 정씨 스스로 ‘나는 봉사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서로 다르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주최한 한국YMCA전국연맹 송진호(48) 기획협력실장은 “라온아띠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대학생이 가장 주의해야 할

‘대한민국표 사회봉사’가 中 소학교에 피었습니다

SK China ‘써니 중국대학생지원봉사활동’ 베이징 시내 중심가에서 불과 차로 1시간 거리를 갔을 뿐인데, 도시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어둡고 좁은 길 안쪽으로 들어서자 곳곳에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었다. 골목 양쪽으로 서 있는 낡은 집들의 열린 문틈으로는 낡고 더러운 살림살이가 뒹굴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골목 끝에 다다르자 취재 목적지인 ‘펑잉 소학교’가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이곳은 농민공 자녀들을 위한 학교다. 농민공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주(移住) 전의 주소가 평생 따라다니는 중국 특유의 신분제인 호구제(戶口制) 때문에 농촌 호구를 갖고 있는 농민공들은 도시에 살더라도 각종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대부분이 저임금 일용직 노동자들이어서 삶도 고달프다. 자녀들도 비싼 학비와 선발에서 후순위로 밀려 일반 소학교에 다니는 것이 쉽지 않다. 중국 중앙교육과학연구소가 발표한 ‘중국 도시농민공 자녀들의 의무교육문제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농민공 자녀의 60%만이 일반 소학교에 진학한다. 나머지는 민간단체 등에서 세운 농민공 자녀 학교에 다니는 것이 최선이다. 펑잉소학교 역시 농민공 자녀 교육문제에 뜻을 둔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학교다. 정부의 정식 인가는 받았지만,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다. 시멘트 바닥의 운동장,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교실에서 열악한 현실이 엿보였다. 커튼도 블라인드도 없는 탓에 고학년 교실에서는 그대로 내리쬐는 햇볕에 눈이 부셔 칠판을 쳐다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해가 전혀 들지 않아 ‘냉동실’ 같은 저학년 교실보다는 나은 편이다. 혼자 쓰기에도 넓지 않아 보이는 책상에 부서질 것만 같은 의자가 3개씩 놓여 있다. 70여 명이 한

“세계에 우리 나눔정신 알리는 봉사자들이 진짜 애국자죠”

정정섭 기아대책 회장 “내가 지난 21년 동안 한 일은 세상 곳곳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국제구호개발 NGO 기아대책의 정정섭(69·사진) 회장이 말했다. 대부분의 NGO가 가장 욕심내는 일이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가는 곳곳이 전쟁터이거나 재난이 휩쓸고 간 지역이고, 굶주림과 질병에 고통받는 땅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사람을 돕는 마음을 내는 것도 힘든데, 아예 현장에 눌러 살며 그들과 함께 할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이 1000명을 넘어섰다. 77개국에 보낸 ‘사람의 역사’에 큰 획이 그어진 셈이다. 1989년 기아대책을 설립한 정정섭 회장은 “후원자 사무실 한편에 책상 하나 놓고 시작했던 기아대책이 이만큼 성장했다”고 뿌듯해했다. 설립 첫해 780명에 불과했던 후원자 수는 2010년 현재 27만8000명을 넘어섰고, 1억8000만원(1989년)에 불과했던 후원금도 올 한 해 1246억원의 사업 예산으로 늘었다. 21년간의 세월 동안 정정섭 회장의 머리도 하얗게 세었다. 직원들과 함께 하는 산행에서 늘 1등을 했었지만, 올해는 무릎이 속을 썩인다. ‘신념’ 하나로 전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뛰는 기아대책 식구들 얘기를 할 때는 눈시울도 붉어졌다. 가장 어려운 곳에서 빛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2030년까지 10만명의 해외 봉사단원을 파견하는 것이 목표다. ―왜 사람입니까. “모금을 많이 한다고 좋은 NGO는 아닙니다. 사람이 함께 가야 믿을 만하고 확실합니다. 우리 후원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 사람들이 돕게 하려면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람이 가야 대한민국이 돕는다는 걸 여과

“사람 마음 움직이던 광고쟁이, 나눔 팔기 위한 준비였다”

문애란 한국컴패션 ‘상근 봉사자’ “기부 하라고 강요하기보다 인생에 어떤 영향 미치는지 얼마나 행복한지 어필합니다” 항상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팔기 어려운 상품이 ‘나눔’이라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상품’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게 할 것인지를. 그 고민 끝에 만난 사람이 광고회사 ‘웰컴’의 문애란(56) 전 대표다. 제일기획 공채 1기로 ‘최초’의 여성 카피라이터, 제작팀장, 독립 광고대행사 대표까지 ‘광고계 여성 1호’를 독차지했던 그녀가 이제는 국제어린이양육기구 한국컴패션의 ‘상근 봉사자(Fulltime Volunteer)’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갖고 싶도록, 더 많이 사고 싶도록 만드는 광고업계에서 더 소박하게 살고 더 많이 나누도록 해야 하는 비영리 부문으로 옮긴 이유가 궁금했다. ―광고 쪽과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늘 새로운 일을 추구하십니까. “새로운 일을 추구한다기보다는 그런 시대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발명가였던 아버지가 늘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던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요. 운이 따라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습니다.” ―컴패션에서도 ‘최초’의 상근 봉사자라고 들었습니다. 왜 ‘올인(all in)’을 선택하셨습니까. “거역할 수 없었던 마음의 소리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서정인(48) 한국컴패션 대표와 인연이 되어 필리핀의 어려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비전 트립(vision trip)’을 갔습니다. 저는 평생 광고 일을 하며 좋은 호텔, 좋은 경치, 좋은 음식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삶에 회의가 들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은 엄청나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면서도 행복해하고 있었습니다. 삶의

“진리와 봉사·실력과 인성 동시에 융합할 수 있는 인재 키울 것”

숭실대 사회공헌_ 김대근 총장 인터뷰 인도에 리빙워터스쿨 개교… 저소득층에 무료 교육 제공 대학 내 사회봉사 과목 운영… 200여 곳 복지기관서 봉사활동 진행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1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1861~1941)는 1929년에 쓴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에서 일제 식민 지하의 한국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동방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려운 이웃을 향해 밝은 빛을 비추는 나라가 되고 있다. 타고르는 우리에게 시성(詩聖)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타고르가 문학 못지않게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숭실대 김대근(63·사진) 총장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타고르는 불혹의 나이가 된 1901년에 캘커타 서쪽의 샨티니케탄(평화의 마을)에 학교를 설립했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당대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인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의 계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 학교와 마을은 여러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타고르의 교육 철학이 반영된 교육도시로 성장했고, 인도 독립 후에는 유치원부터 국립대학(비스바바라티대학)을 모두 아우르는 인도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샨티니케탄은 이제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재들의 요람이다.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고 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연구로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라고 불리는 아마르티아 센(77)도 이곳에서 배출됐다. 인간과 자유와 평화를 교육하는 샨티니케탄, 이곳에 한국의 대학이 세운 학교가 있다. 숭실대는 올 7월에 샨티니케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알려진 하누당가의 1500평 대지 위에 교실 4개와 다목적 실험실 2개, 중강당, 운동장과 놀이시설을 구비한 ‘숭실리빙워터스쿨’을 개교했다. 인도의 사립학교들도 부러워할 만한 수준의 시설을 갖춘

[Cover story] “돈 한줌 쥐여주기보다, 자신의 지역 지켜낼 ‘사람’에 집중”

이성민·김창숙 캄보디아 기아봉사단 요즘이 캄보디아의 1년 중 가장 시원한 때라고 했는데,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넘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3시간여를 포장도 안 된 붉은 흙길을 달렸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햇빛 속에 꼼짝없이 앉아 있다 보니, 온몸은 땀으로 젖고 속은 메슥거렸다. 수도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쭘끼리’군(郡)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쭘끼리’라는 이름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산악지대와 밀림지대가 많은 이곳은 캄보디아에서도 특히 눈물과 상처가 많은 지역이다. 게릴라전을 펼치기 좋은 지형 탓에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킬링필드’로 대변되는 학살과 내전을 1998년까지 겪었다. 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무너지면서 일부 군대가이 지역 산악지대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모든 집이 가족을 잃거나 장애인이 된 식구를 끌어안고 산다. 이 땅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부터 이 먼 거리를 쉼 없이 왔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기아대책에서 15년 전 캄보디아 기아봉사단으로 파견한 이성민(53)·김창숙(48) 부부다. “당시만 해도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인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6살·3살의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캄보디아에 왔습니다. 긴급구호 활동을 펼치느라 항상 위험한 곳에 있으면서 많이 용감해졌죠, 뭐.” 이성민 씨는 국내에서 긴급구호, 국제개발 활동 자체가 없었던 1989년, 해외 원조를 목적으로 세운 기아대책의 1호 간사이자 긴급구호 활동가다. 대한민국표(表) 1세대 해외 긴급구호 활동가인 셈이다. “그 시절 이 지역은 외부와의 왕래도 거의 없었어요. 먹을 것도 부족한 형편이니

현대제철 대학생 봉사단 ‘사랑나눔 미션 완료’

현대제철은 2009년부터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다하고 주변의 소외계층에 대한 대학생들의 자발적인 관심을 북돋우자는 취지에서 대학생 봉사단을 모집했다. 2009년 1기를 발족한 해피예스(Happy Yes) 대학생봉사단은 ‘봉사는 나의 행복이며 주변의 어려움을 돕는 데 주저 없이 Yes’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00명의 대학생으로 구성된 해피예스 대학생봉사단 1기는 2009년 당진지역을 중심으로 집수리 활동을 전개해 총 32가구의 집수리를 완료했다. 또 당진 능안생태공원 쉼터를 조성하고 당진 전대초등학교에서 여름봉사캠프를 개최, 초등학교 시설물 보수와 벽화그리기 등 교육환경 개선활동을 전개했다. 지난해에 이어 2010년 6월 발족한 ‘현대제철 해피예스 2기’ 대학생 봉사단 100명은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4박5일의 일정으로 여름봉사캠프를 열고 포항지역 소년소녀 가장, 독거노인 가구 등 어려운 이웃들의 주거환경 개선에 참여, 총 10가구의 보금자리를 새롭게 꾸몄다. 그간 현대제철은 회사 임직원과 지역사회 그리고 NGO 등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사회공헌 활동을 펼쳐왔다. 이러한 사업에 대학생 봉사단도 동참함으로써 지역사회에서 협력의 시너지 효과가 점점 극대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기다리는 분들 있어 행복… 이런 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구나”

나눔 실천하는 이발사 아저씨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이 되면 양천장애인종합복지관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평상시 복지관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던 사람들까지 지하 2층에 마련된 간이 이발소 앞을 서성거린다. 조규동씨가 익숙하게 간이 철제 의자에 앉자 조병헌(63세)씨가 이발 가운을 두르고 가위질을 시작했다. 조병헌씨가 이곳에서 이발 봉사를 한 것은 3년째. 규동씨는 “아침 10시부터 어두워지도록 하루 종일 머리를 깎는데도 매번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조병헌씨가 이발 봉사를 시작한 것은 30년째이다. 이곳을 포함, 이발소가 쉬는 매주 수요일마다 여러 복지기관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한다. 한 번 갈 때마다 보통 50명 정도의 ‘단골’이 눈 빠지게 기다린다. 사람들이 몰려 점심도 국에 만 밥만 꿀떡 넘기고 다시 가위를 잡는다. 6남매 중 장남인 조씨는 18살에 혼자 상경해 이발 기술을 배웠다. 32살에 결혼하고 집과 직장이 자리를 잡아 갈 무렵 어머니와 아버지가 1년 새 모두 돌아가셨다. 그가 이제 막 부모님께 따뜻한 밥 한 그릇 올릴 수 있겠구나, 마음먹은 찰나였다. 고향인 홍천에서 아버님 상을 치르고 서울에 올라오는 길, 만나는 어르신들이 모두 아버지처럼 보였다. 노인정 봉사를 처음 시작한 것도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노인정이 재개발로 철거될 때까지 자원봉사를 나갔어요. 어려운 형편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더 나이가 들면 아예 조그만 복지시설을 마련해 오갈 데 없는 분 20명 정도를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꿈도 생겼습니다.” 조씨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2002년부터 3년 동안은 아예 가게 문을 닫고 명지대를

맥쿼리 코리아 자원봉사…나눔 전한 당신들께 “봉사상을 수여합니다”

창립 10주년맞이 자원 봉사 나서 전 직원 3000만원 기금마련해 기부 회사에 남은 직원 헌혈로 봉사하기도 “한사랑마을은 다른 재활시설에서 감당하기 힘든 중증 장애아들이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대부분 버려진 아이들이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어요. 눈치도 빨라서 봉사자의 심리 상태를 금방 알아 차리니까 편하게 대하시는 게 중요해요.” 어린이재단이 운영하는 중증장애인 재활센터 한사랑마을의 최금숙 후원나눔부장이 주의사항을 설명하자, 24명의 맥쿼리 코리아 직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날이 처음 경험하는 자원봉사였다. 아이들이 머무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직원들은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지 못했다. 2명씩 짝을 지어 10여개 방에 들어간 후, 한동안은 한쪽에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11시 30분. 식사 시간이 되자 직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몸을 가누기 힘든 아이를 안고, 받치며,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 떠주는 밥인데도 잘 받아 먹었다. 맥쿼리 인터내셔널 리미티드 이지원씨는 고개를 고정시키지 못하는 미혜(가명)가 밥을 받아 먹다 계속 흘려도 밥 한 그릇을 다 먹였다. 맥쿼리 삼천리자산운용팀 신진숙 상무는 한사랑마을에서 가장 어린 수진(6세)이를 맡았다. 신진숙 상무는 “20대부터 어린이재단에 매달 기부해 오고 있었지만 봉사활동은 처음이라 긴장했다”며 “아이들이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잡고 놓지 않은 걸 보고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맥쿼리 파이낸스코리아 이승현 차장은 뇌성마비로 몸을 못 가누는 영희(가명)씨의 휠체어를 밀었다<사진>. 영희씨가 기분 좋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는 복지사마다 웃으며 한마디씩 건네기 시작했다. “영희야 그렇게 기분이 좋아?” “영희는 남자 자원봉사자만 좋아해.” 이승현 차장은

[Cover story] 아프리카서 희망농사 짓는 이상훈·이송희 부부

지치지 않는 아프리카 봉사”말라리아도 우릴 못 막아요” 이상훈(43), 이송희(37) 부부는 결혼생활 15년 중 9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세 아이 중 두 딸도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났다.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시달리며 16년째 긴급 구호와 지역 사회 개발에 헌신하고 있는 이 부부는, 이달 말 아이 셋을 데리고 다시 아프리카 르완다로 떠난다. ‘청년’ 이상훈과 ‘젊은 아가씨’ 이송희의 첫 만남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 200만명이 넘는 르완다 난민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그곳에서 ‘희망 농사’를 지을 예정이다. 운명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 이상훈씨가 르완다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94년이다. 종족 분쟁으로 대학살을 피해 수백만 명의 르완다 국민들이 난민이 된 상태였다. 극심한 식량부족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신문에 난 ‘기아대책 봉사단’ 광고를 보고 지원한 상훈씨는, 겨우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르완다에 파견됐다. 의사 2명, 간호사 5명으로 이뤄진 팀과 함께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밀어닥치는 난민들로 의료팀은 하루 종일 치료와 수술로 전쟁을 치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천막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먹는’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모두 힘들고 피곤하니 밥 당번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누가 밥을 할거냐, 김치는 왜 없냐며 매일 큰소리가 났지요.” 상훈씨는 젊고 철없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지 싱긋 웃었다. “이대로는 의료 봉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근 국가들의 봉사단원들에게 SOS를 보냈지요. 다행히 케냐 나이로비에서 도와주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반가운 마음에 상훈씨는 공항까지 달려나갔다. 당연히 40~50대

공익 위한 전문지식 기부 ‘프로보노’ 운동 뜬다

최근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프로보노’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프로보노는 라틴어 ‘프로보노 퍼블리코(Pro Bono Publico)’의 줄인 말로써 ‘공익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오늘날 프로보노는 법무·의료·교육·경영·노무·세무·전문기술·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전문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벌이는 봉사활동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올해에는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10개 사회적 기업 장기 멘토링), 중소기업진흥원(사회적 기업 조직진단), 수출입은행(수출 관련 사회적 기업 지원), 한국공인노무사회(인사 노무 상담),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원가 계산 및 수익성 분석),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디자인 지원) 등 새로운 회사와 기관들이 이 운동에 참여할 예정이다. 사회적기업지원센터 정선희 이사는 “기업처럼 큰 단체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은퇴한 경영가·의사·건축가 등 다양한 개인 프로보노들도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 차원에서의 프로보노 운동이 일어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생겨나고 있다. 경영컨설팅 프로보노로 활동 중인 정상곤 전 베네세코리아 회장은 “프로보노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 내에서 격려받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화의 정착과, 사회적 기업이 필요한 프로보노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체계적인 매칭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백광우 교수 인터뷰_”매월 300~400명에 무료 봉사… 같은 길 걷는 후배 기다려”

2002년 개인 병원 정리 후 장애인 돕는 제자 키우고자… 아주대학병원 교수직 맡아 “봉사를 한 지 10년이 되던 해까지는 저도 거만했어요. 아픈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주니까요. 20년이 넘으니까 비로소 이제 내 일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0년이 되자 저와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매월 평균 300~400명, 31년간 17만건의 무료 치과 진료. 아주대 치의학과 백광우 교수(58)의 지난 30년간 봉사 내역이다. 백 교수는 1979년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의사자격증을 따자마자 서울 시립 아동보호소(현재 꿈나무 마을)의 고아들을 대상으로 무료 치과 진료를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해외 봉사로 눈을 돌려 매년 3번씩 자비를 들여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필리핀의 어린이집 4곳을 돌며 무료 진료를 해 왔다. 한 번 갈 때마다 그는 약 3000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돌아온다. 2008년부터는 매주 목요일마다 안양소년원을 찾아가 진료를 하고, 2009년부터는 서울시립영보자애원의 여성 장애인도 진료해 오고 있다. 백 교수가 매월 300~400건의 무료 진료를 소화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치료의 질이다. 그는 치과병원과 동등한 수준의 장비가 갖추어지기 전에는 진료를 하지 않는다. 자비를 들여 필리핀 어린이집 4곳과 안양소년원, 꿈나무 마을에 대학치과병원에 버금가는 진료 장비를 구입해 기증한 것도 나름대로의 원칙 때문이다. “누구나 인간적인 치료를 받고 싶잖아요. 몇명을 치료해 주었느냐 보다 적절한 치료를 해 주었느냐 못해 주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백 교수가 처음부터 전공을 치과로 정하고 봉사 활동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서울 공대에 지원하려고 입학서류를 들고

더나은미래 특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