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 자선냄비
[Cover Story] 기자, 자원봉사자가 되다

2015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1년 365일 중 기억에 남는 ‘하루’는 언제인가요. 더나은미래는 연말을 맞이해 기자 5인방이 봉사활동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기자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로 말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남을 위한 하루’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선물이 될 것입니다. #1 정유진 기자, 독거노인 돕기 현장을 가다 “한우도 뽁뽁이도 좋지만… 이렇게 찾아와서 말벗 돼주는 게 제일 좋아” “지난 10월 31일 개최한 자선 바자회로 수익금 650만원이 모였습니다. 시니어스쿨 ‘동고동락’ 기금으로도 350만원이 모였고요. 이렇게 모인 1000만원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기초생활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100가구에 한우 사골세트를 드리기로 했어요. 최고 등급인 투플러스(1++)로만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봉사하고 나면 며칠 잠 못 잘 거예요. 엄청 무겁습니다(웃음).” 이종민 도촌종합사회복지관장의 말에 봉사자들의 시선이 스티로폼 상자에 쏠렸다. 사골 국물이 담긴 1.5ℓ 페트병 5개, 어른 머리통만 한 한우 살코기, 양념용 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난 15일, 경기도 성남시 도촌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 따뜻한 겨울나기’ 현장. 홀로 사는 지역 어르신 가정을 방문해 쌀·한우 사골세트·온수매트 등 겨울나기 물품을 전달하고, 외풍이 심한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는 자원봉사 일일체험을 했다. 오리엔테이션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됐다. 세미나실은 벌써부터 시끌벅적했다. 결혼이주여성으로만 구성된 봉사동아리 ‘다모’, 5년 차 성남시 봉사단체 ‘천사의 손’, 성남시 야탑동에 위치한 특수학교 ‘성은학교’ 교사 및 학생 등 2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파란색 봉사 조끼를 걸치고 쭈뼛쭈뼛 빈자리에 앉았다. 낑낑대며 스티로폼 상자를

[특별기고] 구세군 자선냄비는 하늘과 땅의 통로

지난해도 어김없이 12월 한 달 동안 거리에는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자리를 지켰다. 1928년 시작된 이후 한국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항상 계속된 일이다. 벌써 86년을 지켜온 사랑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운 겨울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종을 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손과 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꽁꽁 얼어 자선냄비가 끝나도 몸에 남아 있는 한기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2014년의 자선냄비는 전년도의 기록적인 금액을 넘었고, 애초 목표로 했던 65억도 훌쩍 넘은 68억3000여만원이 모금되었다. 한국구세군의 자선냄비는 1928년 시작 이래로 한 번도 모금액이 줄어든 적이 없다. 추운 겨울 한결같이 자선냄비를 지키는 사람들, 매년 최고 모금액을 달성하는 자선냄비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구세군 자선냄비는 1891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다. 1928년 12월, 홍수와 가뭄으로 고통받는 이가 많았던 한 해의 끝자락, 가난한 이들이 얼어 죽은 변사체로 발견되는 일이 일어나면서 당시 박준섭 구세군 사령관은 정부에 공식 모금을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그해 12월 15일 서울 명동 등 20여 곳에 처음 등장했으며 첫해 848원 67전이 모금되었고, 그 돈은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의 식사와 땔감에 쓰였다. 그 후 자선냄비 모금액은 계속 증가했고, 심지어 IMF 시기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2014년의 자선냄비는 그 어느 해보다 봉투 기부자와 그 안에 담긴 사연이 많았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용돈을 기부한 자녀들, 이젠 편지를 받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를 넣어 주신 분,

“한국전쟁부터 세월호까지… 우린 국민 情 전하는 심부름꾼이죠”

김영태 구세군 업무국장 “1984년 겨울, 구세군사관학교에 들어간 후 첫 자선냄비 봉사를 명동으로 나왔어요. 근데 마침 우리 바로 옆에서 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모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왠지 불편했죠. 그렇게 어색한 한나절이 지났는데, 그 스님이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종일 모은 걸 전부 구세군 자선냄비에 넣더라고요. ‘이게 구세군의 힘이구나’ 싶었죠.” 김영태(58·사진) 구세군 업무국장의 말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간 교회에서 구세군과 첫 인연을 맺은 김 국장은 구세군사관학교, 전라·충북 지방 책임자, 구세군 본부 재무부 등을 거치며 평생을 구세군과 함께 해왔다. 현재는 구세군의 자금·토지·물품·정보 등을 총괄하는 업무국의 수장(首長)이다. 지난 30년간, 찬 바람이 불 때쯤엔 어김없이 거리에서 종을 흔들었던 김 국장은 구세군 자선냄비의 강점에 대해 “대국민 모금 통로로서 갖는 정통성과 대표성”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너무 힘들 때 무임승차를 했다며 뒤늦게 기차 삯을 내거나, 지난 과오를 반성한다는 편지와 함께 수백만원을 기부하는 분도 있어요. 우리 국민의 대표 모금이란 생각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죠.” 실제로 구세군자선냄비에는 해마다 대통령의 금일봉부터 유치원생의 저금통까지, 650만 국민의 다양한 돈이 사연과 함께 쌓인다. ‘가장 어려운 순간 받았던 도움을 이제야 갚는다’는 익명의 기부자도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김 국장은 “1998년 ‘IMF 사태’로 인해 모두가 힘들었을 때도 자선냄비를 향한 온정의 손길은 줄지 않았었다”면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국민의 마음을 전하는 심부름꾼’이라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그런 신의(信義)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부랑아와 노숙자를 도우며 시작했던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한… 빨간 냄비 100억의 기적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에서 나눔까지 작년 모금액 97억… 해마다 증가해 위기가정 사업·청소년 복지 등에 후원 세월호 등 긴급구호 지원에도 쓰여 구세군 복지시설서 성장한 은행 지점장 취업 멘토·일대일 결연해 적극 후원 “모두가 외면할 때, 저를 받아준 곳은 한 곳뿐이었습니다.” 신선희(31)씨가 5년 전 겨울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갑작스레 임신을 한 그녀에겐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부모로부터 쫓겨난 후 미혼모 시설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만삭인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다짜고짜 입양을 권유하거나, ‘너무 늦게 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신씨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전화를 한 곳은 구세군 미혼모 시설인 ‘두리홈’. “예정일이 임박했는데 갈 곳이 없다고 하자, 두리홈에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빨리 여기로 오세요’라고 말했어요. 머뭇거리며 두리홈 입구를 서성거리는데, ‘찾아오기 힘들지 않았느냐’며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아들을 낳아 기르는 동안 신씨는 사회의 편견과 싸워야 했다. 중국에서 의학을 공부해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도, 면접을 볼 때마다 ‘미혼모 꼬리표’를 붙이며 불합격 통보를 했다. 어렵사리 병원에 취업했지만, 아픈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금방 그만둬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그녀를 받아준 곳 역시 두리홈이었다. 딱한 사정을 접한 두리홈에서 신씨를 후원자개발팀 인턴으로 채용한 것. “넉넉한 형편이 아닌데도 물품을 후원하고 기부하는 분들을 보면서, 앞으로 더 많이 나누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섯 살배기 아들도 구세군 자선냄비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해요. ‘종이돈’ 달라고 하면서 꼬박꼬박 기부합니다. 저와 제 아들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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