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CEO가 관심 없으면, CSR 꿈도 꾸지 마라”

지난주 두산의 한 임원을 만났는데, 명함을 새로 주면서 “바뀐 걸 한번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사회공헌팀에서 CSR팀으로 이름이 바뀌었기에, 축하와 격려를 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많은 사람은 ‘그게 그거 아냐?’라는 반응이 많다”고 웃었습니다. 두산은 지난해 박용만 회장이 10년 가까이 공들여 완성한 ‘두산웨이(Way)’를 전파하는 데 한창이었습니다. 임원의 휴대폰에 저장된 두산웨이를 한번 읽어봤습니다. ‘세계 속의 자랑스러운 두산’을 만들기 위한 아홉 가지 핵심가치를 보고 약간 놀랐습니다. 인재, 정직과 투명성, 고객, 사회적 책임, 안전과 환경…. CSR의 세계표준인 ISO 26000 일곱 가지 핵심 가치와 거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박용만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직접 나서서 CSR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각 계열사 CEO들에게 CSR을 독려한다고 합니다. 지난 10일 열린 ‘더나은미래’의 콘퍼런스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CEO가 관심 없으면, 아예 CSR을 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습니다. CSR을 제대로 하기란 참 쉽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대목이었습니다. 한 대기업 CSR 팀장은 “사회공헌은 그나마 부드럽지만, CSR에서 다루는 지배구조·노동 관행·공정거래·환경 등은 한결같이 예민하고 민감하지 않으냐”며 “일개 부서장이 어떻게 조직 내에서 이런 문제를 쉽게 거론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새 정부 출범 초기마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 사법기관 등이 나서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압박을 세게 합니다. ‘정권 말기가 되면 기업이 말을 듣지 않으니, 힘이 있을 때 밀어붙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지난 17일, 재계 2위인 현대차가 “물류와 광고 물량의 절반을 중소기업 등 외부 업체에 개방하겠다”고 전격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를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해외 진출 기업과 NGO를 위한 윈윈은?

#1. “한국의 한 유명 선박제조업체가 인근 지역에 조선소를 지으려고 하면서 지역 주민과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지난 19일 필리핀 출장길에서 만난 존 레이 티앙고 나보타스 시장과의 인터뷰 말미에, 통역을 도와준 하트하트재단 임문희 지부장님은 “개인적으로 여쭐 게 있다”며 시장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 그건 한국 기업이 아니라 중국 기업으로 아는데요.” 알고 보니, 지역 주민과 갈등을 겪는 것은 중국 기업인데 어찌 된 일인지 현지 주민들에겐 그게 한국의 H기업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 내친김에 임 지부장에게 “이곳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의 CSR 활동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최근 대형음료회사를 인수한 국내의 한 대기업 관계자와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CSR 활동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업 관계자는 “가난한 필리핀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려고 예산을 뽑아본 결과,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고 말했답니다. 필리핀에서 23년째 선교사로 지내고 있는 임 지부장이 이 예산 내역을 보니, 사립대학교 입학을 기준으로 뽑은 것이었습니다. 임 지부장은 “필리핀은 빈부 격차가 심해서, 사립대학 학비는 공립대학의 12~13배다”라며 “사립대학에 갈 정도의 경제적 수준이면 굳이 장학금을 줄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다”고 조언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대기업 관계자는 “올해는 사업 계획이 잡혔으니 내년쯤 다시 의논해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사례를 접하며, 오는 4월 10일 ‘더나은미래’가 주최하는 ‘해외 진출 기업의 글로벌 CSR’ 콘퍼런스와도 맥락이 닿아있어서인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필리핀 빈민촌임에도, 취재를 하러 간 기자에게 이름도 잘 모르는 한류

“자녀를 학대한 부모들은 항상 훈육했다고 우기더라”

김정미 경기도 아동보호전문기관장 15년 동안 아동 학대 관련 전문 상담가로 활동한 김정미 경기도 아동보호전문기관 관장은 “아동 학대는 부모가 적절한 자녀 양육 방법을 잘 모르는 데서 출발한다”면서 “부모의 생각, 생활 습관부터 차근차근 바꿔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동 학대’에 대한 국민 인식의 변화가 궁금하다. “2000년을 기점으로 아동 학대에 관한 인식 전환이 일어났다. 아동복지법에 ‘아동 학대’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심각한 신체 손상만을 아동 학대로 인정하던 분위기에서 아동을 방치하거나 정서적으로 상처를 주는 것도 학대로 인식하게 됐다. 실제로 2000년까지는 신체 학대 신고율이 가장 높았지만 2001년부터는 방임(35.2%)이, 2009년부터는 정서 학대(36.2%)가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동 학대의 유형이 변화했다기보다는, 국민이 아동 학대를 인식하는 범주가 신체 학대에서 정서 학대까지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정서 학대의 유형이 궁금하다. 정서 학대는 자녀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좁은 공간에 자녀를 혼자 가두어 두거나, 벌거벗겨 내쫓는 행위, 잠을 재우지 않거나, 아동의 나이에 적절치 않은 과도한 일을 시키는 것도 정서 학대다. 실제로 어릴 적부터 부모의 싸움을 보면서 자란 초등학생이 심각한 원형 탈모와 학교생활 부적응을 호소한 예가 많다. 지속적인 정서 학대는 우울증, 낮은 학업 성취, 도벽, 거짓말, 타인에 대한 공격성 등 아동의 정상적인 발달을 해친다. 특히 세 살 이전에 경험한 정서 학대는 치명적인 후유증을 낳는다.” ―’훈육’과 ‘학대’를 혼동하는 부모가 많다. 자녀를 올바르게 훈육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담하다 보면 부모는 ‘아이가 도통 얘기를 하지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기업의 CSR, 윤리적 책임도 다해야 완성

5년 전,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을 몇 개월 동안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언론에 짤막하게 보도되었을 때만 해도, ‘소문’의 진원지를 후속 취재할 길이 없어 사건은 묻히는 분위기였습니다. 며칠 후 유흥주점 종업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언론사가 이를 집중보도하면서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습니다. 로비를 받고, 늑장수사와 수사중단을 지시한 경찰 고위 간부들이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며 ‘법치국가’ 대한민국을 비웃는 듯한, 대기업 오너의 삐뚤어진 행태에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도, 올해에도 계열사 자금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태광, SK 등 대기업 총수가 구속되는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 높아지자, 일부에서는 반대 목소리도 제기됩니다. “기업의 진정한 책임은 이윤 창출을 통해 세금을 납부하고, 일자리를 늘려 고용을 잘하는 것 아니냐” “선진국은 기업 사회공헌 비율이 우리보다 훨씬 낮다” 등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최근 몇 년 사이 유독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요구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 조지아대 캐롤 교수는 CSR의 4단계 책임론으로 유명합니다. 1단계는 경제적 책임으로,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해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단계는 법적 책임으로, 공정한 규칙 속에서 법을 준수하며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단계는 윤리적 책임인데, 기업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비자와 종업원, 지역주민, 정부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기대와 기준,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단계 자선적 책임은 경영활동과 관계없이 기부나 사회공헌 등을 통해 사회로부터 얻은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설치하고 고장 난 채 방치… 왜 원조하나요

제가 처음 국제구호개발 현장을 가본 것은 2006년입니다. 월드비전과 함께 케냐 투르카나 지역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보고 난 후 병원 건물 뒤편에서 한참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이는 두 손가락으로 팔을 감싸니, 한 마디가 남을 만큼 앙상했습니다. 케냐에서 또 한 번 놀란 현장은 드넓게 펼쳐진 ‘소람(Sorgho m·옥수수의 일종)’ 농장이었습니다. 수십년의 역사를 지닌 월드비전은 이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지역개발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작년 초, 저는 태양광 전등이 필요한 라오스 현장을 취재 갔다가 다소 민망한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라오스 싸이냐부리의 한 소학교에서 수십 명의 선생님이 점심만찬을 차려놓고 저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저를 안내한 분이 2년 동안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지낼 때 지은 건물이었는데, 코이카가 이 지역의 봉사단 파견을 돌연 없애면서 컴퓨터실은 무용지물이 돼버렸습니다. 그녀는 “너무 미안하다”며 매년 자비를 들여 라오스를 찾아 자체 애프터서비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원조하는 나라(공여국)’의 첫발을 내디딘 초보자에 불과합니다. 코이카가 생긴 지 22년 됐지만, ODA 규모가 늘어나고 개발협력과 관련한 관심이 높아진 건 10년도 안 됩니다. ODA 예산이 증가하면서 국내사업을 하던 NPO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해외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국제본부로부터 매뉴얼을 전수받을 수 있는 일부 초대형 NPO를 제외하면, 코이카와 토종 NPO, 기업, 대학, 병원 등 많은 곳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태양광이든, 수세식 화장실이든, 학교 컴퓨터실이든 지어주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라오스에 가보면 중국인들이 뿌려놓은 태양광 패널이 고장 난 채 방치된 걸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비효율, 이중규제… 이제 그만 내려놓으세요

기자 초년병 시절 가장 이해가 안 됐던 것은 공무원의 명함이었습니다. 같은 부처임에도 부서별로 명함의 모양과 디자인이 제각각이었습니다. “기관의 첫인상이나 마찬가지인데 통일하지 않으면 외부에서 어떻게 보겠느냐”고 했지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한 서울대 교수와 식사 자리에서 이 문제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을 들었습니다.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꾸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해야 간판업자도 먹고살고, 명함 파는 업자도 먹고산다. 과학기술 R&D 예산이 다 쪼개져서 나눠 먹기식으로 배분되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정부 부처도 비효율적인 걸 알지만 그 비효율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일자리가 생긴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꽤 그럴듯한 논리였습니다. 정부의 비효율과 중복문제는 해묵은 주제입니다. 한 NPO 고위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들어 청와대에서 ‘나눔문화를 정부 시책으로 삼겠다’며 정부 고위 관계자가 도와달라고 하기에 ‘이제 겨우 NPO가 스스로 자리잡았는데, 왜 정부가 나서느냐. 제발 관심 좀 끊어달라’고 말해서 불편한 분위기가 연출됐다”고 말했습니다. 한 기업 고위 임원은 “정부가 기업 팔을 비틀어 진행하는 사회공헌은 효과성도 낮고, 장기적으로 기업이나 사회에 모두 도움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실제 현 정부에서 부처별로 경쟁하듯 기업의 손길에 기댄 사회공헌성 프로그램이 많았습니다. 지난 11일 한국NPO공동회의와 한국비영리학회가 공동주최한 포럼에서도 이 같은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입법 예고한 ‘나눔기본법’에 대해 참석자들은 “목적별·대상별·부처별로 분산된 나눔 관련 업무를 총괄하지 못하면 또 하나의 이중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박두준 아이들과미래 상임이사는 “국세청에서 이미 자산 10억원 이상, 수입 5억원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고액기부 시대 만나는 비영리단체들의 고민

한두 달 전쯤, 비영리단체의 젊은 간사들과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애로사항을 자연스럽게 털어놓았는데, 한 단체의 간사가 재밌는 얘기를 했습니다. “서울의 송파·강남·서초 권역의 지부를 맡고 있는데, 이 지역의 고액기부자들을 따로 관리해보려고 본부 후원관리팀에 물어봤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 본부 후원관리팀에선 그 데이터베이스 자체가 자신의 실적이기 때문에 빼앗기는 걸 싫어한다. 고액기부자 관리는 해당 지부에서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라고 하더군요. 신년을 맞아 더나은미래 팀원들은 ‘향후 5년 기부&모금 트렌드’ 전망을 듣기 위해 모금액 100억원 이상 대형 NGO 9곳의 모금 전문가들을 만났습니다. 예상대로 고액기부 시대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 본부를 둔 인터내셔널NGO와 달리, 토종 NGO들은 “최신 모금 기법과 기부자 관리, 세무와 법무 등 거액 모금에 경험이 없어 고민” 이라고 했습니다. 위 사례와 같이 고액기부자 관리를 본부에서 할 지 해당 지부에서 할 지 등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논의를 아직 시작조차 못하는 상황입니다. 고액기부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면 초기에는 대학교나 병원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모교를 발전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 아직은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영리단체 또한 곧 고액기부자를 모시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날 겁니다. 이 과정에서 비영리단체의 질적 전환이 또 한 번 요구될지도 모릅니다. 최영우 도움과나눔 대표는 “서울대의 외부 발전위원이 60명가량인데, 시어머니가 60명이나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이 열려 있지 않으면 쉽지 않다”며 “임기 제한 규정이 없는 비영리단체의 이사회 문제, 늘 제기되는 회계 투명성

[나눔의 리더를 찾아서] ⑭ 에스더 라던트 미국 프로보노 인스티튜트(PBI) 회장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변호사 인식부터 바꿨죠” 35년간 공익 변호사 활동… 전문적인 지식·서비스 공익 위해 재능기부하는 프로보노 활성화 위해 1996년 ‘PBI’ 설립 로펌 총 근무시간 3~5%… 프로보노 활동 쓰기 운동 140여개 대형 로펌 및 기업 법무팀 100곳 참여 PBI 회원 된 로펌에는 자가 검진 프로그램 제공 콘퍼런스로 고민도 나눠 에스더 라던트(Esther F.Ladent) 회장은 폴란드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에 의해 아버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어머니는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강제로 보내졌다. 4년 동안 모진 고문과 죽음의 문턱에서 절반이 넘는 가족을 잃었다. 갈 곳도, 머물 곳도 없이 떠돌던 이들은 오스트리아 난민 캠프로 향했다. 음식과 약품을 찾는 피란민들 틈에서 에스더 회장은 태어났다. ‘사회적 약자들이 외면당하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그녀는 35년간 공익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미국변호사협회(ABA) 의장에 올랐다. 그러나 성공이 보장되는 자리를 마다하고, 1996년 동료 한 명과 함께 워싱턴에 ‘프로보노 인스티튜트(Pro Bono Institute, 이하 PBI)’를 설립했다. PBI는 대형 로펌 변호사들의 프로보노(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서비스를 공익을 위해 재능 기부하는 것)를 활성화하고, 모니터링하는 NGO다. 에스더 회장은 로펌 변호사들이 총 근무시간의 3~5%를 프로보노 활동에 쓰기로 서약하는 운동(로펌 프로보노 챌린지 프로젝트)을 벌여, 미국 내 140여개 대형 로펌과 기업 법무팀 100곳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변호사 개인의 자율에 맡겨졌던 프로보노 활동을 로펌의 사회적 책임이자 의무로 인식 전환을 일으킨 것. 이를 통해 미국 로펌의 프로보노 활동은 지난 15년간 300% 이상 증가, 2010년 역대 최고인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작은 칭찬 한마디가 아이들의 닫힌 마음 열어

“철판이 뽑혀 나오는 기계래요. 이걸 보는 순간, 그냥 아빠 생각이 났어요.” 중학생 여자아이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습니다. IMF 때 사업이 망한 아빠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사진 속에는 서울 문래동에서 발견한 기름때 묻은 공장기계가 있었습니다. 아이와 저는 이 작품 제목을 ‘아빠’라고 붙이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활짝 웃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저와 더나은미래 기자들은 서울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일일강사를 했습니다. 두산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시간여행자’의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청소년 60명은 지난 5개월 동안 사진과 역사를 배우고, 서울 문래동과 부암동 등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년 1월이면 이 작품은 전시회에 걸리게 됩니다. 저는 아이들이 작품집에 실릴 에세이를 직접 쓰도록 돕는 일을 맡았습니다. 한 아이는 온통 새까만 바탕에 하얀 국화꽃 사진을 대표작으로 골랐습니다. “왜 이 사진을 찍었느냐”는 질문에, 처음에 “그냥 흰 국화꽃이 좋아서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상처받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제가 1지망으로 원했던 고등학교에 떨어졌어요. 2지망 고등학교 원서를 넣고 오는 길에, 제가 가고 싶었던 1지망 학교에 원서를 넣으려고 깔깔대며 버스를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났어요. 속상해서 죽고 싶었어요. 이 꽃을 그 아이들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었어요.” 에세이 제목을 ‘2지망’으로 정했습니다. “네 얘길 써보라”는 말에 아이는 “정말 이 얘길 써도 돼요?”라고 반문하더니, 나중에 멋진 에세이 한 편을 만들어왔습니다. ‘문화역 서울 284′(구 서울역사)라는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도,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어지럽게 엉켜 있는 전선과 콘센트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촬영한 아이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친구들과 갈등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뜬구름 잡는 보육 정책, 부모들만 ‘끙끙’

가히 전쟁입니다. 둘째 딸 유치원 보내기 말입니다. 발품 팔아 정보 모으고, 눈치작전으로 원서 넣고, 당첨돼도 유치원비에 ‘억’ 소리 나는 게 대학 입시 전쟁 못지않습니다. 역시 우리나라에선 ‘눈치’가 빨라야 살아남습니다. 만 3세까지만 있는 가정어린이집에 보낼 때, “미리 5세반이 있는 다른 어린이집에 등록해둬야 한다”는 조언을 흘려 들었습니다. ‘설마’ 했죠. 지난 11월부터 아이를 보낼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알아보며,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며칠 전, 한 어린이집에 원서를 넣으러 갔더니 “어머니, 어차피 넣어봐도 안 되니까 그냥 가세요” 하더군요. 서울시 보육 포털 서비스에 들어가, 어린이집에 대기 등록하니 한 곳은 37명, 또 한 곳은 120명 넘게 줄 서 있더군요. 유치원은 더 가관입니다. 근처 공립학교 유치원은 모조리 반일반(9~1시)뿐이었습니다. 공짜라고 해도, 직장맘에게 ‘그림의 떡’입니다. 사립 유치원은 70만~90만원대의 학원비를 자랑합니다. 대개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하는, 하루 5시간 교육비치곤 너무 비쌉니다. 청소년수련관에서 운영하는 유아 체능단에 접수, 저녁 9시 무렵 추첨을 하러 갔습니다. 작년까지는 선착순이어서 “새벽 2시부터 줄 섰다” “아르바이트까지 고용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올해 교육부의 ‘선착순 금지’ 지침 때문인지 추첨제로 바뀌었더군요. ‘김○○’. 추첨 항아리에서, 제 딸아이의 이름이 불리자 환호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날 추첨이 끝난 강당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습니다. 접수만 해놓고 당일 추첨에 참가 못한 이들을 두고, ‘당첨된 것으로 봐야 한다’ ‘추첨 의사를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등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탈락한 부모들은 “재추첨하라”고 소리를 높여 결국 재추첨이 벌어졌고, 결국 이미

[나눔의 리더를 찾아서] ⑬ 대한적십자사 유중근 총재

“생명줄처럼 이어진 네트워크… 적십자만의 힘이죠” 헌혈 국한된 이미지 벗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적십자의 가치 넓힐 것 자원봉사자와 취약 계층 일대일 결연 ‘희망풍차’ 위기 가정 기금 마련 소외계층 진료비 지원 자원봉사자 35만 명 적십자의 혈액같은 존재 ‘희망나눔봉사센터’ 열어 획일적 나눔이 아니라 수혜자 입장 배려한 기부 개인의 나눔 참여 늘어야 107년 역사의 대한적십자사 최초 여성수장. 유중근(68) 총재는 인터뷰 전날, 기자의 프로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대개 기자들은 취재원 사전조사를 꼼꼼히 하지만, 취재원이 기자의 신상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만나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라고 했다. 인터뷰 당일인 지난 5일, 단아한 갈색원피스 차림의 유 총재는 펜으로 꼼꼼하게 메모한 질문지를 들고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15년간 봉사위원으로 몸담아 왔을 때와 달리, 107년 역사의 국내 대표 구호기관의 첫 여성수장이라는 부담감도 만만찮았을 것 같다. 어떤 비전과 목표로 총재직을 수락했고, 가장 역점을 둘 사업은 무엇인가. “매우 큰 조직이다. 직원만 3300명이다. 본사와 지사 14곳, 봉사관 50곳, 혈액원과 검사센터 관련 21개 기관, 헌혈의 집 131곳, 적십자병원이 6곳이다. 총재 임명을 받았을 때 부담이 컸지만, 이유와 소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취임 후 살펴보니, 대한적십자사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헌혈’이나 ‘이산가족’으로 국한돼 있었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대한적십자사’를 모토로 세웠다. ‘희망풍차’ ‘희망진료센터’ ‘300만 헌혈캠페인’ 등 3가지를 중심사업으로 정했다.” ―지난 7월 ‘희망풍차’라는 브랜드 BI까지 새롭게 론칭했는데, ‘희망풍차’가 무엇인가. “12만 성인 자원봉사자들이 4대 취약계층과 일대일 결연을 맺는 것이다.

[나눔의 리더를 찾아서] ⑫ “경주 최부자가 곳간 열었듯… 글로벌 기업 걸맞은 성숙한 기부 필요”

나눔의 리더를 찾아서⑫… 류종수 유니세프 사무총장 미국 포담 대학원 시절 ‘유나이티드 웨이’에서 방과후학교 모금 도와 ‘아시아나’와 유니세프의 ‘사랑의 기내동전모으기’ 18년 동안 70여억원 기부 60년전 도움받던 아이들 글로벌 리더로 성장해 민간기부 7위 한국으로 의외의 인물이었다. 지난 4월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 한국위원회 신임 사무총장을 맡은 ‘류종수(50)’라는 이름은 국내에선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1994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생긴 이래 18년 동안 박동은(77) 사무총장 체제로 운영되던 사무국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도 궁금했다. 취임 6개월여가 흐른 지난 15일, 창밖으로 경복궁이 바라보이는 서울 종로구 창성동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실 4층에서 류 사무총장을 만났다. ―대학 시절 이후 20년 동안 미국에서 모금전문가로 활약해온 경력을 인정받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선임됐습니다. 어떤 포부를 갖고 있는지요. “뉴욕 포담대 대학원 시절, 미국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격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 뉴욕본부에서 인턴생활을 했어요. 지역아동센터의 방과후학교를 맡아 프로그램 개발과 기금 모금을 하는 일이었어요. 시니어가 임신으로 공석이 된 자리를 제가 이끌었는데 모금이 400% 늘었어요. 저는 숫자에 탁월하고 목표 집중도가 높습니다. 뉴욕은 모금·배분이 매우 발전돼 있어요. 교육·보건·환경 등 종류별, 기관별로 카테고리가 세밀하게 나뉘어 있어 기부자가 선택만 하면 되죠. 사립고등학교, 뉴욕중앙노조위 등의 기금 모금을 도왔고 뉴욕 플러싱 YMCA에서 동양인으로서 최연소로 이사장이 됐어요. 모금 분야도 전문가가 되려면 여러 종류·기관의 기금 모금을 해봐야 해요. 경험에서 나오는 동물적인 본능이 중요하죠. 저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를 국제 구호개발의 ‘파워하우스(Power House)’로 만들고 싶습니다.” ―”현재 5% 수준인 기업 기부도 국제 평균인 12~13%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