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더나은미래와 함께 저도 많이 변했더군요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일들이, 살면서 종종 생깁니다. 서른 살에 아기를 낳고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가 그랬고, 원고지 1000장에 달하는 첫 책을 탈고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요즘 또다시 이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CEO를 인터뷰해왔고 유명 CEO가 쓴 경제경영서들을 읽었건만, 역시 경험만 한 스승은 없는 것 같습니다. 침대에 머리가 닿기만 하면 1~2분 만에 잠드는 저는 ‘잠이 오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더나은미래’를 잘 이끌어야 하는 책임감과 부담감에 한숨이 나왔다가, 미래에 대한 설계와 기대감으로 부풀어올랐다가, ‘글쟁이로 평생 살고픈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현실 부정까지 하룻밤에도 여러 번 혼자서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더나은미래는 지난달 성수동 생활을 마감하고 광화문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광화문빌딩 9층에 위치한 사무실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습니다. 기자들과 함께 ‘으쌰 으쌰’ 하면서, 많은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 하나뿐인 공익 섹션을 만드는 자부심을 갖고,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좋은 콘텐츠와 프로젝트를 하나씩 선보일 것입니다. 올 초 거인병 앓는 전 농구 국가대표 김영희씨의 기사를 보고, 독자 한 분이 하얀 봉투에 1만원을 넣어서 보내왔습니다. 더나은미래를 만들면서 제 삶은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습니다. 뭔지 정확하게 설명할 길은 없는데, 예전의 저처럼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아! 내가 변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희 지면을 꼼꼼하게 읽는 독자들 또한 마음속 울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와 ‘가슴’이라고 하지요. 머리와 가슴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깝죠, 나누는 기쁨

2015 아너 소사이어티 5人 인터뷰 지난 한 해 1억원 이상 기부한 아너소사이어티(이하 아너) 회원은 총 299명이다. 더나은미래와 공동모금회가 이 회원들을 분석한 결과 ▲서민층 ▲고인(故人) 기념 ▲지인 추천 ▲3040 ▲여성 기부가 눈에 띄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유가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가입한 아너 회원은 지난해에만 9명으로, 전체 고인 기부(19명)의 절반에 가까웠다. 2015 아너를 대표하는 5명을 만나 고액 기부 스토리를 들어봤다. 이들은 하나같이 “내가 느낀 나눔의 기쁨을 더 많은 이에게 나누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편집자 주 잘 쓸줄 알아야 진짜 부자 아니겠어요? 20년 모은 1억원 기부 허위덕씨 “아들 가족과 함께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 처음 ‘기부’ 이야기를 꺼냈어요. 혹시 반대하면 어쩌나 싶어서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그런데 며느리가 제 손을 꽉 쥐고 말하더군요. ‘어머니, 어떻게 그런 훌륭한 결심을 하셨어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어요.” 지난 14일, 경기도 군포시 자택에서 만난 허위덕(78) 아너는 “밤에 자려고 누우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라며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허씨는 지난달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77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했다. 20년간 모은 돈을 쾌척한 그의 이야기는 동네에서도 단연 최고의 이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척, 중학교 동창회 친구, 스포츠센터 아주머니들까지 연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며 축하의 말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허씨는 자신을 그저 ‘평범한 할머니’ 라고 말한다. 그가 기부한 1억원도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며 틈틈이 저축한 쌈짓돈이다. “큰아들의 결혼

우리가 몰랐던 그들 마음속 숨겨둔 이야기

편견… 우리가 몰랐던 사람들 우리는 편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익숙치 않은 모습을 보면 손가락질 하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곤 합니다. 에이즈 환자, 고령지 예술인, 아마추어 작가, 여성 택시기사 등 우리가 접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못 읽는다고?’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할 뿐, 글 읽는 건 문제없을 거야’….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일반적 생각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청년 기자들이 만난 우리 이웃 중에는 편견과 통념을 깨는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가 많았다. 편집자 주 #1 “안마사 말고 교육자 되고 싶어” -중도 시각장애인 김태연씨 김태연(43)씨가 시각장애 1급 진단을 받은 것은 28세 때. 설상가상으로 백내장도 진행됐다. 형광등 불빛이 숟가락에 반사되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부모님과 같이 살 수가 없었다. 창문에 선탠지를 바르고, 암막 커튼을 치고 혼자 4년을 살았다. 실로암 복지관의 문을 두드린 것은 ‘할 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시각장애인도 대학에 갈 수 있어요.” 복지관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동료의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김씨는 사범대에 진학해 영어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시각장애인이 되기 전, 학습지 선생님으로 활동했었던 경력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씨는 불혹(不惑)의 나이에 이화여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교재’ 문제였다. 학기 초가 되면 비상이다. 김씨는 “점자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거나 볼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시각장애가 발생한 경우에는 점자를 읽을 수 있는 분들이 정말 적다”고 했다. 실제 점자를 읽고 해독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은 전체 시각장애인의 5% 정도(2014년 기준). 많은

어른들은 알까요, 우리도 ‘평범한 꿈’ 꾼다는 것을

불안… 위기에 몰린 미래세대 가정 폭력·학교 따돌림 벗어나도 가출로 인한 또 다른 위기 생겨 소년원 출원자·미혼모 청소년 등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돼야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비단 노래 가사만이 아니다. 사회에서 낙인찍히고 배제된 소년원 출원자, 미혼모 청소년, 탈학교 비활동 청소년, 수감자 자녀들. 이들을 위기로 내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어른들의 잘못일지 모른다. 기성세대는 무엇을 놓친 걸까. 위기에 놓인 미래세대에게 직접 물어봤다. “소년원은 또 다른 ‘무법천지’죠.” 정현성(가명·17)군은 6년 전 가출 후 세 번이나 소년원에 갔다 왔다. 양아버지의 잦은 폭행을 피해 가출한 것이 방황의 시작이었다. 양아버지는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건 예사고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야구 방망이로 구타했다. “쇄골이 골절되기도 하고 몸에 멍이 없어질 날이 없었죠. 경찰에 여러 번 신고도 해봤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죠.”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건 좋았지만, 길거리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또래 아이들과 끊임없이 도둑질을 저질렀다. 결국 경찰에 덜미가 잡혀 2010년 소년원에 처음으로 수감됐다. 하지만 소년원에서 갈수록 폭력성만 커졌다. 고참 문화 때문이었다. “한방을 쓰는 열다섯 명가량 사이에는 철저히 상하 계급이 나뉘었죠. 심지어 옷깃으로 신분을 표시했어요. 대장은 감시와 CCTV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서 이유 없이 가혹한 폭행을 하거나 시키죠. 그러면 당한 애들이 새로 들어온 애한테 복수를 하면서 폭력이 계속 되풀이됐죠.” 그는 소년원 내에서 말썽을 피워 3개월 동안 이송됐던 한길정보산업학교(제주소년원)에서 “진짜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엄마의 편지도 거기서

활짝 열어주세요, ‘다름’ 향해 닫혀 있는 마음의 門

소외… 한국이 낯선 사람들 제3국서 출생한 ‘중도입국자녀’, 탈북 청소년으로도 분류 어려워 다른 인종·출생의 편견 없이 마음의 문 열고 다가와 줬으면 법무부가 발표한 ‘2014년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 연보’에 따르면 국내 출·입국자는 6000만명을 넘어섰고, 국내 체류 외국인은 179만7618명으로 전체 인구의 3.5%를 차지했다. 한국 사회에 터를 잡은 이주민들,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어떠할까. 우리 주변 이웃들의 솔직한 목소리를 담았다. “저는 영화감독이 될 거예요.” 지난해 말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서 만난 김화령(22)씨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꼽으며, “외로움, 고독, 죽음 등 인간 내면 깊숙한 부분의 감정과 상처를 매만지고 싶다”고 했다. 연신 밝은 표정으로 꿈을 이야기하던 그녀에게 새해 목표를 묻자 급격히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제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영어도, 수학도 정말 어려웠는데, 포기하지 않고 만날 책을 붙잡고 살았어요.” 옷소매로 눈가를 매만지던 그녀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지원한 대학 6곳에서 모두 낙방했기 때문. 그녀는 “남한 아이들과 실력 차이가 나는 걸 아니까 정말 죽도록 열심히 했건만, 도저히 경쟁이 안 되더라”고 했다. 올해보다 내년이 더 걱정이다. 화령씨는 “새해에는 우리를 위한 제도가 나올까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탈북 학생들의 경우 특별전형으로 여러 개 대학에 합격하고 골라서 다닐 정도인데, 왜 화령씨는 등록금 지원은커녕 대학 문을 두드릴 기회조차 없었을까. ‘입국의 비밀’ 때문이다. 화령씨처럼 탈북 어머니를 따라 제3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제3국 출생 북한이탈주민자녀’

소방관 제복은 壽衣… 일하다 다쳐도 국가 지원은 하늘의 별 따기

부산 해운대소방서 중동 119 안전센터 노재훈 소방관 인원 모자라 3교대도 어려워 7~10월엔 종종 24시간 근무 부산의 한 색소 회사.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은 참담했다. 인화성 물질인 색소 가루에 불이 옮아 붙으면서 화마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렸지만 오히려 색소 가루가 떠오르면서 사방이 불바다로 변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찔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화재 진압용 물줄기가 일으킨 바람에 날린 색소 가루가 소방관의 장화와 옷, 얼굴을 뒤덮었다. 눈·코·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독한 색소에 숨을 쉬는 게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호스를 놓을 수는 없었다. 고성능 화학차가 도착해 소화 거품을 쏟아낸 지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불은 꺼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퇴직을 고민했던 소방관은 결국 방화복을 벗지 못했다. 올해로 23년째 화재 현장을 뛰고 있는 노재훈(47·사진) 부산 해운대소방서 중동119 안전센터 소방관의 이야기다. “1993년 9월 경북 문경소방서에서 소방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부산 사하소방서에 있을때는 사고가 워낙 많이 나서 2시간 이상 진압해야 하는 화재 현장을 하루에 7차례 이상 뛰기도 했어요. 요새는 건물에 소방 시설도 잘 갖춰져 있고 안전 의식도 높아져서 화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대신 안전사고나 구급 현장에 많이 출동하는 편이죠. 24시간 센터를 운영해야 하는데, 중동은 인원이 많지 않아서 8명씩 구성된 3개조가 맞교대를 서고 있어요. 원래대로라면 3교대를 해야 하지만 근무자 중 누군가가 휴가나 교육을 가게 되면 인원에 공백이 너무 크니까 맞교대를 설 수밖에 없습니다. 인근

직업에 貴賤 없다? 매일 무시당하는 게 우리 일이죠

노동… 외면 당한 삶의 현장 병동 청소하다 오염된 주삿바늘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찔려요 OECD 28개 국가 중 ‘여성이 일하기 좋은 나라’ 꼴찌(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2015), 최저임금 이하 소득 노동자가 7명 중 1명꼴로 가장 많은 나라(OECD, 2015).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노동 현실’은 국제사회 성적표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지난 한 해 일한다는 이유로 고통받아야 했던 근로자들이 현실을 짚어봤다. “외부인 출입이 통제된 병실에 무시하고 들어가려는 보호자에게 ‘그러면 안 될 텐데요’라고 했더니 바로 욕설이 날아오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뒤로 돌아 나오는 것뿐이었어요. 하는 일이 청소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람을 멸시하는 그 눈빛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적응하기 힘드네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10년째 청소일을 하는 윤석현(가명·61)씨. 그는 일할 때 인간적 존중을 받기 어렵다고 했다. 윤씨는 “맨 처음 청소를 시작했을 때는 사람들의 무시하는 눈길이 어찌나 낯설고 무섭던지 3개월 동안 8㎏이 빠졌다”고 말했다. 그는 병동을 청소하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오염된 주삿바늘에 찔린다. ‘사용한 주사기를 지정된 쓰레기통에 버려달라’는 그의 부탁은 1년차 인턴에게도 제대로 가닿지 않는다.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아무 데나 주사기를 버리는 의사 선생님들이 있어요. 특히 1년차 인턴 선생님들이 가장 힘들어요. 한번은 용기를 내서 조심스레 ‘주사기만이라도 쓰레통에 넣어달라’고 했더니 ‘뭐야, 재수없어’라며 눈을 흘기더군요.” 사용한 주삿바늘에 찔릴 때마다 윤씨는 자신이 청소한 병실의 쓰레기를 검사실로 가져가야 한다. 쓰레기에서 감염균이 나오든 그렇지 않든 검사를 받는 것이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연탄의 추억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지난 연말, 더나은미래 기자들과 함께 연탄 봉사를 했습니다. 늘 다니는 성수동 지하철역 근처였는데, ‘뒷골목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연탄 때는 집이 딱 두 곳밖에 없다 보니 이런 지역은 오히려 기업에서 ‘그림이 안 돼’ 거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연탄을 나르는 우리를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던 한 노인은 “그 정도면 됐다”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반면, 중년 아줌마는 우리를 도와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리며 연탄을 날랐습니다. 알고 보니 노인은 쪽방 아줌마에게 밀린 월세 독촉하러 온 집주인이었습니다. 쪽방에 혼자 산다는 아줌마는 “작년에는 초봄까지 추웠는데 연탄이 없이 지내다 다리 근육이 마비되기도 했다”며 “연탄 한 장 한 장 땔 때마다 여러분을 생각하겠다”며 고마워했습니다.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기자들에게 “연탄 때 본 적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1년가량 연탄을 때고 ‘곤로’에 밥을 해먹는 고등학교 1학년 자취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연탄을 보니 그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친구와 저는 각각 월세 3만원씩 내고 쪽방에 같이 살았는데, 그 집에는 온갖 군상이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시때때로 부부싸움으로 악다구니를 쓰고 가재도구를 마당에 집어던지는 중년 부부도 있었고,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며 세무대학 입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독학생도 있었습니다.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저는 저녁 자율학습 시간에 잠깐 빠져나와 자취방으로 내달렸습니다. 제 자취집에선 우리 고등학교의 화장실 창문이 다 보이고 친구들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연탄불을 간 후 급히

[Cover Story] 나는 대한민국 1%입니다

[Cover Story] 더나은미래가 만난 50人의 특별한 이웃 前 농구 국가대표 김영희 “거인병으로 쓰러진 나를 일으킨 건 나눔” 5152만9338명.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의 숫자입니다(2015년 12월 기준). 아파트에선 경비원 아저씨, 회사에선 청소부 아줌마, 식당에선 아르바이트생을 쉽게 마주칩니다. 요즘엔 얼굴색이 다른 이들도 지하철에서 자주 보입니다. 이들이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나요. ‘더나은미래’는 청년 기자들과 함께 ‘좀 다를 것 같은’ 우리 이웃 50명을 만났습니다. 거인증을 앓는 전(前) 농구 국가대표 김영희 선수의 이야기를 커버 스토리에 담았고,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 한국이 낯선 사람들, 놓아버리기엔 너무 안타까운 미래 세대를 찾아갔습니다. 더불어 행복한 삶을 위한 1%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입니다. 편집자 주 “너무 커서 무섭죠?” 커다란 손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키 205㎝. 국내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이자 전 국가대표인 김영희(52·사진)씨가 악수를 청하며 건넨 첫 인사였다. “우리 동네에선 ‘거인 아줌마’로 불려요(웃음). 처음엔 아이들이 매일같이 저희 집 앞에 몰려와서 ‘거인, 나와라~’ 하고 놀려댔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집으로 아이들을 불러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죠. ‘아줌마 착한 사람이야. 농구선수 아줌마야. 아줌마 놀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앞으로 아줌마 안 놀리면 나갈 때마다 맛있는 것 줄게’ 하고요. 그때부터 주머니 가득 사탕, 과자를 넣고 다녀요. 이젠 절 모르는 사람들이 ‘거인이다~ 남자야? 여자야?’ 하고 수군대면,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아니야, 마음씨 착한 거인 아줌마야. 농구선수 아줌마야’라고 말해줘요. 얼마나 예쁘고 고마운지 몰라요.” 김씨는 80년대 명실상부한 농구계

[대한민국 사회문제 지도로 그리는 사회적 기업의 미래] ⑥·끝 정부와 사회적기업, 진짜 사회문제 해결하고 있을까?

[미래지도 프로젝트] (6·끝) 정부 예산은 과연 국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문제에 쓰이고 있을까. 사회적기업은 국민이 심각하다고 느끼는 사회문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을까.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와 사회적기업연구소(소장 서재혁), 연세대 공공문제연구소 정부와기업연구센터(센터장 장용석)가 함께 ‘대한민국 사회문제 지도로 그리는 사회적기업의 미래(이하 미래지도)’ 프로젝트 진행 결과, 정부 예산-사회문제 간 미스매치(불일치) 현상이 매우 큰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정부 예산은 국민이 진정 바라는 사회문제 해결에 쓰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문제 ‘톱3’는 안전 위협(77.6%), 소득 및 주거 불안(14.33%), 노동 불안정(5.23%)이었다. 반면, 현 정부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입한 분야는 교육 불평등(27.1%·약 51조9556억원)으로 나타났고, 세월호 이후 급증한 안전 위협 예산(26.6%·약 50조9743억원)과 보육·정신건강·일, 가정 불균형 심화 등을 일컫는 ‘삶의 질 저하’ 예산(20%·약 38조4378억원)이 그 뒤를 이었다. 이는 2013~2014년 정부의 평균 예산 약 307조 중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쓰인 평균 194조9050억원(기획재정부 재정통계)을 신(新)사회문제에 따라 재분류해 차등 분석한 결과다.(국민 인식의 경우, 2012~2014년 조선일보·한겨레·매일경제 종합면 1~4면에 실린 기사 빅데이터 3만1808건 및 트위터·네이버블로그·다음아고라 등 온라인 6개 채널에 최근 1년간 게시된 477만531건을 분석한 결과다.) 정부의 예산 투입 현황은 전문가가 우선순위로 꼽은 사회문제와도 불일치했다. ‘더나은미래’가 안전·가계 부채·부동산·비정규직·청년 일자리·통일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50명을 심층 인터뷰하면서 해결이 시급한 사회문제를 순서대로 3가지를 꼽아달라는 질문을 던지자 ‘노동 불안정(78점)·소득 및 주거 불안(69점)·안전 위협(54점)’이 꼽혔다(우선순위에 따라 1~3점 차등 배점). 일반 국민과 전문가가 꼽은 사회문제는 우선순위는 다르지만, 톱3 항목이 모두 같았다. 반면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2주짜리 인생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얼마 전 만난 기업 사회공헌팀 관계자가 이렇게 묻더군요. “더나은미래 팀은 어떻게 그리 열정적인가요?” 곰곰이 생각하다 “헝그리 정신이 살아있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기자들의 삶이란 게 늘 그렇듯이, 밤낮이 없고 취재가 있으면 주말에도 현장에 나갑니다. 게다가 더나은미래는 섹션 발행뿐 아니라 대학생 공익기자를 양성하기 위한 멘토링도 하며, 비영리리더를 위한 교육과정에도 나서서 홍보 관련 멘토링도 합니다. 책자도 발간하고, 콘퍼런스 준비도 하고, 공익사업 기획도 직접 합니다. 일도 많고 피곤할 텐데, 더나은미래 기자들은 참 씩씩하고 열정적입니다. 내년 더나은미래가 온라인, 모바일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데, 모두 자기가 CEO인 양 아이디어를 냅니다. 다혈질 편집장인 저는 마감 때면 모질게 기자들을 몰아붙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기사는 다시 쓰게 하고, 취재가 부실하면 “왜 그것밖에 못 하느냐”고 구박합니다. 마감이 끝나면 항상 후회하지만, 2주마다 늘 ‘도돌이표’입니다. 12월 초, 영국 출장을 가느라고 마감 때 완전히 지면에서 손을 뗐습니다. 불안했지만 눈을 딱 감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멋진 지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편집장의 빈자리를 메워준 팀원들을 보는데, 어느새 성큼 자란 자식을 보는 것처럼 대견하고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이번 송년호 마지막 커버스토리의 주인공은 그동안 고생한 우리 기자 5인방입니다. 때때로 ‘이 지긋지긋한 2주짜리 인생’이라고 한탄하면서도, ‘어디 퀄리티 높은 공익 콘텐츠 없는지’ 매일 고민하고, 마감 때면 밤새워가며 원고 쓰는 기자들입니다. 내년에도 더나은미래는 이 든든한 기자들 덕분에 잘 굴러갈 것 같습니다. 어려울수록, 식구들이 더 소중한 법입니다. 유례없는

[더나은미래 논단] 사회복지서비스, 이용자 중심 ‘바우처 제도’를 주목하라

[더나은미래 논단] 최근 한국의 사회복지 환경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저출산·고령화, 양극화, 가족 기능 약화 등의 변화는 복지 욕구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공공 사회복지 지출이 2000년 GDP의 5% 수준이었으나, 2014년 배 이상 증가해 10%를 넘었다. 절대적 수준은 아직 OECD 평균(약 22%대)에 비해 여전히 낮지만, 2000년 이후 증가율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이 중 가장 변화의 속도와 폭이 큰 분야가 사회복지 서비스 영역이다. 2000년대 이전의 사회복지 체계가 주로 생계 보호를 중심으로 한 사회보험과 공공부조 위주였다면, 2000년대 이후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복지 서비스의 확대가 특징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2012년 개정된 ‘사회보장기본법’은 한국의 사회보장 체계를 기존의 두 축(사회보험과 공공부조)에 사회 서비스를 포함한 세 개의 축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산 측면에서도 2000년대 이후 보건복지부 예산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분야가 노인, 아동, 장애인, 여성과 가족 등 사회 서비스 영역이다. 양적으로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지만, 과연 서비스 수요자인 국민의 복지 욕구에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국민의 복지 체감도는 여전히 낮고, 사회복지 서비스는 아직도 값싸고 질 낮은 서비스로 인식되고 있다는 평가다. 양적인 확대를 넘어 이제는 질적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질적인 변화를 추동하는 대표적인 흐름이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의 변화다. 우리나라 사회복지 서비스 공급 체계는 전통적으로 공급자 중심 체계로 발전해 왔다. 국민이 국가로부터 서비스를 받을 권리인 ‘사회권’ 차원에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