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사랑이 끓인 칼국수… 희망의 한 그릇 ‘후루룩~’

시민공모주로 만든 식당 ‘희망칼국수’ 천안시민의 돈 모아 만든 착한기업 ‘동행’의 첫 식당 직원 월급 10% 제외 판매 수익금 전액 기부 올가을 2호점도 오픈 예정… 벌써 1500만원 이상 모여 지난 2월 문을 열었다는 ‘희망칼국수’는 평일 점심시간에도 손님으로 북적였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도록 스무 명씩 늘어선 줄이 좀처럼 줄어들 줄 몰랐다. 이 칼국수집은 요즘 천안의 새로운 ‘맛집’으로 뜨고 있다. 하루에 파는 칼국수만 400인분이다. 칼국수의 생명인 육수가 시원한 데다, 6500원짜리 칼국수정식 하나만 시켜도 만두나 보쌈이 줄줄이 코스로 나오는 것이 인기 비결이라고 했다. 그러나 희망칼국수는 단순한 ‘맛집’만은 아니다. 맛있다는 소문만 듣고 찾아온 손님들은 ‘희망칼국수의 수익금 전액은 지역사회와 공익활동에 사용됩니다’라고 적힌 현판을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주부 이주현(38)씨는 “내가 먹는 칼국수 한 그릇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좋아서라도 앞으로 이 집을 자주 찾게 될 것 같다”며 웃었다. 희망칼국수는 천안시민들이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시민공모주’로 만든 착한기업 ㈜아름다운동행이 차린 첫 번째 식당이다. 박노진 아름다운동행 대표는 “시민공모주로 회사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온 지 불과 2주 만에 1억원이 모여서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현재 이 회사의 주주는 천안 시민 70명이다. 주주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부모님을 따라 저금통을 깬 중·고등학생, 아내와 상의해 적금 탄 돈을 냈다는 직장인, 한푼 두푼 모아온 모임 회비를 낸 친목회, 경쟁 관계인데도 선뜻 돈을 낸 이웃 식당 사장까지, 천안 곳곳에서 시민주주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섰다. “절반은 저도 아는

소리 없는 소통 기회… 향이 있는 소통의 장

청각장애인이 일하는 카페 ‘티아트’ 경복궁 역에서 인왕산 방향으로 꼬불꼬불한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그 꼭대기에 작고 예쁘장한 카페 ‘티아트’가 있다. ‘티아트’는 청각장애인들이 바리스타로 일하는 카페이자 사회적 기업이다. 홍차수입회사 ‘티월드’ 대표이자 수많은 티마스터, 바리스타 등을 길러낸 자타공인 홍차전문가 박정동(47)씨가 직접 운영한다. 만나자마자 홍차부터 권하는 박 대표는 나른한 오후 티타임을 즐기듯, 밀크티를 몇 모금 마시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홍차 수입 때문에 인도에 자주 가는데, 아마 2008년도일 거예요. 인도 콜카타의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종업원들이 다 청각장애인들인 거예요.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데, 그리고 저 역시 수화를 전혀 할 줄 모르니 큰일이다 싶었죠. 그래도 손짓 발짓 하며 결국 주문을 다 했어요. 음식도 맛있었고 서비스도 너무 좋았어요.” 그날의 짧은 경험이 박 대표의 눈을 뜨게 했다. 청각장애인이지만, 어떤 교육이나 지원도 받지 못한, 심지어 수화조차 배우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도 살아났다.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장(場)을 만들어 ‘소리 없는 소통’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인 것만 같았다. 박 대표는 자신의 경험과 강점을 살려 청각장애인들이 일하는 카페를 열기로 결심했다. “청각장애인들은 소리를 못 듣잖아요. 그래서 시각과 후각, 촉각이 자극되는 일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바리스타 일은 커피나 차를 만들면서 고객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거든요. 그럼 소리를 듣지 못해도 덜 단조롭고 덜 지루할 거라 생각했어요.” 우선 수화부터 배웠다. 청각장애를 가진 청년들을 만나려고 단체들을 찾아다녔다. 함께 일할 직원을

종가의 정신적·물질적 가치 드러낸 ‘문장’… 브랜드 가치 창출할 것

종가(宗家)문화명품화 프로젝트_ 서울대 김경선 교수 요즘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을 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마음에 다가오도록 답을 주는 사람은 드물다. 서울대 디자인학부 김경선(40) 교수와의 만남은 좋은 자극이 됐다. 김경선 교수는 경상북도의 ‘종가(宗家) 문화 명품화 프로젝트’에 참여해 500년 종가들의 문장을 디자인해주고 있다. “디자인은 한마디로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음식의 포장은 이 음식이 어떤 맛이 날지, 어떤 향이 날지, 이 음식에 담겨 있는 사람의 노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통로 같은 것입니다.” 종가의 문장을 제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종가들은 그 가문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물질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가치들을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외부에 어떻게 표현되고 전달될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없는 문장을 굳이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직면해서도 김경선 교수의 뜻은 흔들리지 않았다. “종가에서 만든 된장이 대량 생산된 제품처럼 플라스틱 용기에 판매된다면 제대로 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종가의 가치를 그 가치만큼 드러나도록 보여줄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김경선 교수는 종가의 문장이 그런 역할을 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가의 문장이 종가에서 만든 제품이나 서비스와 결합되어 종가다운 브랜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경선 교수가 종가의 문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영국 유학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거리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간판들이었다. “왠지 간판에 관심이 갔어요.

[한국의 혼을 찾아서①] 무형문화재 최기영 대목장

“후대에 전할 기술·기법하나라도 더 남겨야지” 인간문화재는 어떤 모습일까? ‘한국의 혼을 찾아서’ 시리즈를 시작하며, 인간문화재와 첫 만남을 가지는 자리였기에 기자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최기영(68) 대목장은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74호이자 세계가 인정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작년까지 충남 부여군 백마강 일대에 1300년 전 사라진 백제를 재현하는 ‘백제문화단지’ 조성을 지휘했고, 서울 서대문 봉원사, 경기도 양평 용문사, 전남 순천 송광사, 창경궁, 남한산성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그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인간문화재는 한복을 입고 한과를 즐길 것’이라 생각했던 기자의 선입견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전수교육관에 들어서자마자 여지 없이 깨졌다. 최기영 대목장은 ‘삼부특수목재’라는 글자가 박힌 검은 작업복 점퍼를 입은 채 탁자에 코를 박고 한옥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현장 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상상했던 모습과 다르다는 말에 “대통령이든 서민이든, 어린 아이든 백세 노인이든 분수를 알아야 혀. 분수를 알아야 공부도 저절로 되고 기능도 저절로 익히게 된다 이 말이여. 목수는 목수로 끝내야 혀. 문화재니 교수니 해도 ‘나는 목수다’하고 생각허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말이지.”라며 웃었다. ‘나는 목수다’라는 목소리 속에는 대목장이기 이전에 목수라는 업에 대한 자부심과 작업에 대한 집요한 열정이 느껴졌다. 대목장(大木匠)은 나무를 소재로 집을 짓는 사람으로 나무를 다듬고 집을 설계하는 것부터 공사의 완성까지 책임지는 건축가다. 전통건축현장에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최기영 대목장은 신응수 대목장, 전흥수 대목장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로 당대가 지정한 대목장 세 명 중 한 명이다. 평생 목수를 하기로 마음먹은 때를 물었더니

“웨딩드레스, 식이 끝나면 평상복으로 수선해드려요”

‘대지를 위한 바느질’의친환경 결혼식 ‘에코웨딩’ 화분 꽃장식, 하객에게 선물로… 유기농 음식, 남는 건 싸가도록… “아직 장소 제약 많아 아쉬워”…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생애 그 어느 순간보다 빛나고 싶은 사람이 바로 결혼식 날 ‘신부(新婦)’다. 그 욕망을 공식적으로 풀어놔도 되는 결혼식은 그래서 종종 과한 느낌을 준다. 특히 식장, 음식, 웨딩드레스 등 결혼관련 상품이 죄다 ‘패키지화’된 한국의 결혼식은 비싸면서도 천편일률적이다. 결혼식 날 단 하루를 위해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물품들이 환경을 심하게 오염시킨다는 것도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결혼이 무엇인지 묻고, 상업화된 한국의 결혼문화에 대안을 제시하는 이가 있다. 사회적기업 ‘대지를 위한 바느질’의 이경재(31) 대표다. 이씨는 원래 의류회사와 방송국 의상실에서 일하는 평범한 패션디자이너였다. 그런 이씨가 ‘옥수수 전분’을 이용해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그린(green) 디자이너가 된 것은 한 방송을 통해 국민대 윤호섭 교수의 인터뷰를 보고서다. 이씨는 “‘환경이 이렇게 되기까지 디자이너의 잘못은 없나?’라는 윤 교수의 물음에 내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했다. 그 길로 이씨는 국민대학교 환경디자인 대학원에 진학했고, 자신의 전공인 ‘패션’을 통해 환경과 공존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쐐기풀, 한지, 옥수수 전분 등을 소재로 친환경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년에 170만 벌씩 버려지는 썩지도 않는 드레스는 새롭게 출발하는 한 가정의 시작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6년 연 첫 개인전에는 친환경 소재를 이용한 웨딩드레스 열여섯 벌을 전시했다. 이 개인전을 보러 온 한 여성 관람객이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수형자와 함께 심는 희망… 사고는 줄이고 용기는 키우죠”

교도소 아버지학교 토의·나눔·편지 쓰기‐ 머리가 아닌 삶으로 깨우쳐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성큼 다가왔지만 교도소는 여전히 겨울이다. 마음의 상처와 절망, 회한이 뒤섞인 수형자들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때문에, 반기는 이도 관심을 갖는 이도 없는 사회 때문에 한 번 더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두꺼운 철문 너머 교도소는 여전히 겨울이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수형자들과 함께 지내며 다양한 교정·교화 프로그램을 통해 수형자들에게 회복과 희망을 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전국 1만5000여 교도관들이다. 지난 금요일, 그중 ‘교도소 아버지학교’를 통해 수형자들의 마음에 봄을 선물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교도소 아버지학교’의 김동수(50) 사역팀장과 양훈석(49·진주교도소), 이남형(48·군산교도소), 김병용(44·소망교도소) 교도관들이다. ‘교도소 아버지학교’는 수형자들의 올바른 아버지상 정립을 통해 출소 후 재범 방지 및 범죄와 수형생활로 인해 깨진 수형자 가족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두란노아버지학교운동본부와 각 교정시설이 함께 운영한다. 교정본부에 따르면 2003년 여주교도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34개 교정시설에서 시행 중이다. 미혼자를 위한 예비아버지학교, 여성을 위한 어머니학교도 열리고 있다. 처음 시작할 당시를 묻자 “참 눈물이 많았다”며 김 교도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봉사자 분들이 강당을 마치 레스토랑처럼 꾸며 주셨어요. 깨끗한 테이블보도 깔고 테이블마다 장미꽃으로 장식도 했죠. 자리마다 한 명 한 명 수형자의 이름표도 마련했고요. 시간이 되어 강당으로 들어서는 수형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시절엔 수형자는 무조건 번호로 불렀거든요.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울고, 예쁜 장미꽃에 울고, 교도관이나 봉사자들이 손잡아주고 안아주는 것에 울고…. 눈물바다였습니다.”

‘커뮤니티 맵핑〈Community Mapping〉’ 선구자 임완수 박사

지역사회 문제점 ‘콕콕’ 짚어… 살기 좋은 곳으로 “뉴욕 방문 때 화장실 찾다 곤욕 ‘화장실 소개 사이트’ 개설 계기” 뉴욕에서 화장실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없는 게 없을 듯한 이 대도시는 여행자들 사이에 ‘화장실 가기 힘든 도시’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오죽하면 ‘뉴욕에서 화장실 찾기’를 주제로 한 책이 나왔을 정도일까.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임완수(45) 박사 역시 뉴욕에서 화장실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일년 중 가장 바쁜 크리스마스 시즌, 뉴욕 중심가에 있는 록펠러센터를 찾았던 그는 화장실에 갔다가 한 시간이나 줄을 서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말았다. “결국 기차역 몇 개를 지나치고야 화장실을 찾았다니까요.” 임 박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쉬자고 간 여행지에서 그는 화장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알고 보면 뉴욕에도 곳곳에 숨어 있는 공중화장실이 많을 텐데 사람들이 아는 곳에 대한 정보만 모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뉴욕의 화장실(nyrestroom.com)’이라는 웹페이지를 만들었다. 구글맵과 마이크로소프트 빙 맵스가 제공하는 편리한 지도 시스템을 활용해 누구나 뉴욕 지도 위에 공중화장실이 있는 곳을 표시할 수 있도록 만든 웹페이지였다. 지도가 완성되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뉴욕 시민들이 웹페이지에 찾아와 자신이 알고 있는 공중화장실을 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임 박사는 “뉴욕 화장실에 대한 책을 쓴 작가는 혼자서 조사를 하느라 3년이 걸렸다지만, 웹페이지를 방문한 사람들이 함께 뉴욕 화장실 지도를 완성하는 데는 1개월이면 충분했다”며 뿌듯해했다. 2006년 초에 만든 이 웹페이지가 뉴욕타임스(New

[필리핀 컴패션 취재_백이선 후원자] “故 스완슨 목사님이 그랬던 것처럼 후원 아이들 모두 손자·손녀처럼”

한국전쟁으로 부모·형제 잃었지만 스완슨 목사 도움으로 대학까지 마쳐 후원금 외에 생일잔치·건강검진 등 “내가 받은 사랑만큼 갚아나갈 것” 세부시 남쪽 ‘로레가 성 미구엘 공동묘지’에 자리 잡은 무덤마을. 이곳에는 1만3000여명의 도시 빈민이 살고 있다. 1970년대, 집도 돈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공동묘지 내 비석과 비석 사이에 판자를 대고 함석을 얹어 집을 지은 것이 마을의 시작이다. 우리에게 리조트로 유명한 세부지만, 리조트에서 불과 20~30분 너머의 현실은 처참했다. 집들과 비석들이 한데 뒤엉킨 곳. 마약과 범죄, 매춘, 아동학대가 들끓는 무덤마을. 지난 11일 백이선(70) 후원자는 필리핀 ‘손자’ 리오넬(10)을 만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덥고 습한 날씨지만, 손자를 위한 선물로 가득한 여행가방을 손에 꼭 쥔 채 말이다. 컴컴한 골목을 들어서자마자, 불쾌한 냄새와 탁한 공기 탓에 저절로 기자의 손이 코로 갔다. 하지만 백 후원자는 가슴을 꾹 눌렀다. 60년 전 어린 시절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는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었다. “부모님과 형제를 어떻게 잃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요.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죠. 가족도 없고 집도 없으니, 하수구로 흘러내려 가는 수제비나 밥풀 찌꺼기를 주워 먹고, 길에서 잠자고…. 그렇게 살았죠.” 전쟁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마산애육원에 가서야 몸을 뉠 곳을 찾았다. 강냉이 죽일지언정 먹을 것도 생겼다. 낮에는 고아원 옆 작은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했다. 가냘픈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던 즈음, 그에게 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1952년

“뒤늦게나마 사회에 내 능력 환원할 수 있어 기쁩니다”

시니어 봉사자 오랜만에 봄날다운 포근한 날씨를 보이던 지난 13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 어르신 네 사람이 모였다. 보건직 공무원으로 청춘을 바쳤던 이상수(63)씨, 고등학교 과학교사로 시작해 3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이영출(66)씨, 간호사가 된 지 40년이 다 된 신정숙(61)씨, 독일에 있는 한국학교 전체를 관장했던 교육외교 공무원 출신 박종화(66)씨다. 얼핏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네 사람의 인생사를 들어보면 한 가지 접점이 있다. 바로 ‘시니어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은퇴 후에도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살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봉사활동을 하며 ‘제2의 인생’을 꾸려가고 있었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4명의 어르신 중 유일한 여성인 신정숙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니어 봉사자는 내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간호사였던 그는 현직에 있을 때부터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다가 퇴직 후 여러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서게 됐다. 의료 봉사활동 기회가 많았던 신씨지만 은퇴 이후에는 의료와는 관계없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다. 사람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퇴직 후 한 종교 단체에서 설거지 봉사를 제일 먼저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만족감이 크지는 않았다. 신씨는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해야 봉사하는 나도, 봉사 받는 사람도 더 만족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서울형 데이케어센터에서 치매노인을 돌보거나 종교단체 산하 복지원에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등 여러 가지 의료 관련 시니어 봉사를 하고 있다. 신씨는 “30년 넘게 간호사 생활을 했는데

파도 타고 세계로 움직이는 병원 중남미 넘어 아시아로…

병원선 ‘머시쉽’ 대표 돈 스테판스 부부 세계적인 의료봉사 단체 ‘머시쉽(Mercy Ships)’의 돈 스테판스(Don Stephens, 65)대표가 한국을 찾았다. 1978년에 설립된 이 단체는 배에 모든 의료장비를 갖춘 ‘움직이는 병원’을 운영한다. 지금까지 이 병원선(病院船)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은 사람은 무려 290만명에 달한다. 70개가 넘는 나라들에서 진행한 의료봉사 활동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9457억원. 매년 배에 올라타는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봉사자만도 1500여명이다. 이러한 머시쉽의 헌신에 라이베리아, 감비아 등 방문국 대통령들은 “국민 모두를 대표해 머시쉽 봉사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직접 배에 올라 감사 인사를 전하곤 한다. 돈 스테판스 대표가 ‘머시쉽’의 꿈을 품은 것은 셋째 아들 존 폴(John Paul)이 태어난 1976년이다. 뇌성마비를 지니고 태어난 아들은 평생 혼자 힘으로 먹지도, 씻지도 못할 운명이었다. “아들은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었어요. 저개발국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말이죠. 너무 가난해서 아무런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음에 품게 되었죠.” 병원선에서 직접 간호사로 활동한 아내, 디온 스테판스(Deyon Stephens, 64)가 당시를 떠올렸다. 부부는 아들이 태어난 지 2년 후인 1978년, 은행에서 100만달러를 대출받아 첫 번째 배를 샀다. 수술실, 진료실 등을 비롯한 의료시설과 장비를 위해서 모금 활동을 펼쳤다. 함께 할 봉사자도 모집했다. 그렇게 첫 번째 병원선 ‘아나스타시스(Anastasis)호’가 만들어졌다. 부부는 아예 배에서 살면서 직접 의료봉사를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드디어 배를 준비한 지 4년 만인 1982년. 첫 항해를 시작해 과테말라에서 의료봉사를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저개발국가의

“나의 상처 드러내니 아이들과 소통 더 쉬워졌죠”

휴넷에 재능기부하는 정린 대표 “스무 살까지만 살 거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6년씩이나 더 살려고? 진짜 죽으려고 해본 적은 있니?’라고 되물어요. 그러면 아이가 좀 누그러져서 제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죠” 지난 11일 서울시 구로구에 있는 휴넷 사무실에서 만난 정린커뮤니케이션 정린(44) 대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웃으면서 말했다. 정린 대표는 직장인 경영교육 전문업체인 휴넷에서 주니어성공스쿨 강의를 맡고 있다. 지금 진행 중인 강의는 휴넷 근처에 있는 ‘파랑새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저소득층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휴넷이 사회공헌 사업으로 매출액의 3%만큼 소외계층에게 강의를 기부하는 ‘오렌지 프로젝트’를 하는데, 정린 대표는 이 프로젝트에 동참해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정린 대표는 “아이들의 본심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이들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느끼면 아이들이 스스로 변한다”며 “강의가 끝나면 모든 아이들이 나와 포옹을 하고 가는 것이 원칙인데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고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정린 대표가 아이들에게 잘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어렸을 적 받았던 상처들 덕분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고문관 역할을 했던 정린 대표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와 세 오빠를 때렸다. 아버지가 받은 전쟁의 상처를 가족 모두가 떠안은 셈이다. 어린 정린 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교회에 가서 아버지를 얼른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상처받은 아이들과 공감대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정린 대표는

[착한카드의 차별성] 아까운 수수료 줄이고소멸 포인트는 없애고

매달 금융수수료만 수천만원 착한카드는 비영리단체 수수료 면제 보건의료·미혼모 돕기 등 원하는 후원 분야 지정할수도 착한카드 캠페인이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나면서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착한카드를 만드는 방법이나 ‘착한카드 봉사단’ 등의 이벤트에 참여하는 방법을 묻는 독자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 착한카드 소지자에게 할인이나 선물을 제공하는 ‘착한가게’가 되겠다는 개인 사업자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착한카드 캠페인은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와 하나SK카드·월드비전·국제기아대책·굿네이버스, 한국컴패션·(재)바보의 나눔 등 국내의 대표적인 비영리 단체 5곳이 함께 하는 기부문화 확산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신용카드인 ‘착한카드’를 만들면 연회비 5000원에 조선일보 더나은미래가 5000원을 매칭기부하고, 착한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포인트가 자동 기부되는 ‘생활 속 나눔 캠페인’이다. 착한카드를 이미 만든 독자들은 착한카드가 가진 장점에 대해서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한국컴패션 후원자이자 착한카드 소지자인 최지은(29)씨는 “기부할 마음은 있는데 매달 돈을 내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포인트를 기부할 수 있는 착한카드가 나눔을 시작할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며 착한카드를 추천했다. 하지만 여전히 착한카드가 가진 차별성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독자도 있었다. 다른 카드와 비교했을 때 착한카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비영리 단체의 후원자가 착한카드로 정기 후원금을 납부할 때’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비영리 단체의 정기 후원자가 후원금을 납부하는 방법으로는 지로용지·계좌이체·신용카드 등이 있다. 후원자가 어떤 방법을 이용하더라도 비영리 단체는 정기 후원금의 일부를 수수료로 따로 떼어 금융결제원, 신용카드 결제중계업체(VAN사), 신용카드사 등에 지불해야 한다. 후원자가 지로를 이용할 때는 최저 80원에서 최대 400원을, 계좌이체를 이용할 때는 최저 3원에서 140원 정도를